- 바바라 쿠니의 『미스 럼피우스』-
"선생님,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오랜만에 찾은 독서모임. 익숙한 얼굴들 사이로 녹록지 않은 하루가 느껴졌다. 여전히 그들이 일하는 교실은 전쟁터처럼 숨 가쁘게 돌아가는 듯하다. 가벼운 마음에 환한 미소로 답하는 나와 달리 그들의 표정은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워 보였다. 그래도 난 1년 만에 만난 그들이 어제 본 것처럼 낯설지 않았다.
퇴직하고 세 도시를 오가며 바쁘다는 내 대답에 오히려 더 궁금해했다. 무엇이 좋으냐고 물었을 때,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지만 이내 대답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어 좋아요." 그러자 한 후배가 "저도 빨리 그만두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그 안에 진심이 묻어났다. 다른 후배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퇴직한 나를 부러워하는 마음을 애써 감추지 않았다. 나는 덩달아 그동안 글을 쓰고 곧 책이 나올 것 같다는 이야기도 전했다. 그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또다시 흔들렸다.
강사라고 말하기는 그렇지만 그날 모임에 난 초대받았고, 1시간 넘게 모임을 이끌어야 했다. "제가 좋아하고 닮고 싶은 사람이 있어 소개합니다"라는 말을 시작으로 가지고 간 그림책을 펼쳤다. 책 속 주인공의 이름은 미스 럼피우스.
우리는 그림책을 천천히 읽어나갔다. 미스 럼피우스가 이루고자 했던 세 가지 소망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멀리 여행하고, 바닷가에 정착하며,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그녀는 우리에게 조용히 묻는다. 인생에서 진정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제적 부, 학교에서의 승진, 자녀의 대학 진학 등 개인적 소망과 연결된 것들은 아주 많다. 다 열거하기도 부족할 만큼. 평소 솔직한 성격의 후배가 문득 물었다. "부모님은 항상 제게 가장 중요한 건 돈이라고 하셨어요. 정말 그런 걸까요?"
미스 럼피우스가 말하는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드는 일'과는 거리가 있는 발언이었다. 역시 그녀다운 솔직한 질문이다. 미스 럼피우스처럼 나 역시 의미 있는 이상적인 세계를 동경한다. 그러면서도 '돈'을 무시하지 못하는 속물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한 그녀의 말에 많은 의견이 오갔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그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향한 갈망이 여전히 살아있다. 오히려 나보다 후배가 겪는 이런 고민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더 빨리 찾게 해줄지도 모르겠다.
"여긴 꼭 열대의 섬 같다. 하지만 진짜 열대의 섬은 아니지."
그림책 속 이 장면에서 나는 다시 한번 깊이 숨을 들이켰다. 30년 넘게 다닌 학교도 그와 비슷했다. 안정적인 직장이었지만, 그곳에서 '진짜'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었을까? 미스 럼피우스처럼 나도 그런 의문을 품었다. 그녀는 진짜 열대의 섬을 찾아 떠났고, 나는 '퇴직'을 선택했다. 그 선택의 의미를 되새기니 어깨가 절로 펴졌다. 그녀는 바다를, 나는 세 도시를 오가는 삶을 선택했다.
이제 나는 세 도시를 오가며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대전에서는 학생이 되어 글쓰기를 배우고, 새로운 분야인 어반스케치에 도전하고 있다. 당진에서는 도서관 프로젝트 1인 1책에 참여하고, 논산에서는 시골집을 정리하며 부모님을 돌본다. 각기 다른 도시, 다른 사람들과 만나며 나는 조금씩 '진짜' 내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미스 럼피우스는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다짐했던 약속을 모두 실현했다. "어른이 되면 아주 먼 곳에 가볼 거예요, 나이 들면 바닷가에 와서 살고, 그리고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드는 일도 할 거예요." 특히 그녀가 마지막으로 해낸 일을 보고 우리의 대화는 더욱 깊어졌다. 미스 럼피우스가 온 마을을 루핀꽃으로 가득 채운 장면이다.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 그녀에게는 꽃이었다면, 나는 무엇일까? 독서모임 회원들은 어떤 생각을 품고 있을까?
마을을 아름답게 만든 그녀의 이야기가 유독 가깝게 느껴졌다. 인류를 위해 헌신한 나이팅게일의 이야기도 아니고, 딸이 서울대 의대에 합격해 환하게 웃던 엄마의 이야기도 아니어서 오히려 좋았다. 멀리 여행하고, 바닷가에 살며, 꽃을 심는 일. 평범하지만 행복이 깃든 일상이었다. 그래서 더 마음에 와닿았다. 나도 그녀처럼 그런 삶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평범한 사람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아름답게 살 수 있다는 소박한 진리를 그녀가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친근하게 다가왔다.
후배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내가 선택한 이 길이 옳았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의 눈빛 속에서 나는 '진정한 삶'을 찾아 떠날 준비를 하는 이들을 보았다. 언젠가 그들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할 것이다. 미스 럼피우스가 루핀꽃을 심었듯이, 나는 글(지금, 가장 열심히 한다)을 심고, 그들은 또 다른 꿈을 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