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년 스티커
작년 이맘때쯤 집 앞에 작은 무인카페 하나가 생겼었다. 원하던 맛있는 빵집이 아닌 무인카페라니. 처음엔 조금 아쉬웠다. 그래도 동네에 새로 생긴 가게는 가봐야겠다 싶어 늦은 시간 산책을 마치고 무인카페로 향했다. 낯선 공간에 들어갈 때마다 어색해하던 버릇은 사람이 없는 무인카페도 피할 수 없었다. 어색하게 들어선 나는 습관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하려다 이내 멈추고 거대한 기계와 눈이 마주쳤다. '자, 이제 어떻게 하는 거지?' 숨이 막히게 어색했다.
신기하게도 거대한 기계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면 맛있는 핫초콜릿이 나왔다. 사람이 없어도 되는 게 신기했지만 동시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자리를 하나 잃는 기분이 들어 씁쓸했다. 하지만 동네 사람들은 무인카페를 좋아했다. 아파트 단지 내에 있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눈치 볼 사장도 없고, 무엇보다 깨끗했다. 나 역시 맞은편 셀프 세탁방에서 빨래를 기다리는 동안 자주 이용했으니 무인카페는 성공적이라 말할 수 있겠다. (물론 사장님의 월매출 사정은 잘 모르지만..) 그렇게 무인카페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손길을 받으며 점점 빛나기 시작했다.
늘 그 자리에 있으면 익숙해지고 당연해진다. 하루하루를 사느라 시간이 흐르는 걸 잊어버린 채 살다 보니 엊그제 생긴 것 같은 무인카페 앞에 '일주년 스티커'가 크게 붙어있었다. 내가 잘못 본 건가 싶어 한참을 바라봤다.
‘벌써 일 년이 지났다고? 말도 안 돼’
보통의 가게처럼 금방 사라지지 않을까 싶었던 나의 부끄러운 생각이 와장창 깨졌고 당당하게 일주년 스티커를 붙이고 있는 카페의 모습에 나는 조금 부러움을 느꼈다.
일 년,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보내면 지나는 시간. 누군가에겐 짧고 누군가에겐 긴 시간.
나에게 22년은 엄청난 시간이었다. 오래 함께 살았던 강아지를 보내고 보낸 첫 해였기 때문에 시작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외로운 봄, 깨달은 여름, 지친 가을, 슬펐던 겨울까지. 나이는 진작 성인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물음표가 가득한 세상이라 답을 찾지 못한 어른으로 또 일 년을 보냈다. 원래의 나였다면 여기서 한숨으로 가득 채우기만 했을 것이다. 변한 거 없이, 발전한 거 없이 또 일 년을 살았구나...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좌절하기 전에 나는 나의 작은 변화들을 찾고싶었다. (무인카페한테 지기 싫은 마음이 불타올랐나보다.)
[작년과 비교했을 때 달라진 점]
1. 그동안 다니지 못한 여행들을 많이 다녔다. (경주, 속초, 강릉, 부산, 제주, 여수, 순천, 통영 등)
2. 달리기를 꾸준히 하기 시작하여 체력이 좋아지고 있다.
3. 간식은 끊지 못했지만 건강하게 먹으려고 '생각'은 열심히 한다. (실천은 아직 부족함)
4. 나의 주변 사람들을 진심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5. 엄마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됐다.
무인카페는 조금씩 변했고 기어이 버텨냈다. 반짝이는 조명과 여전히 깨끗한 청결은 유지한 채. 어쩌다 한번 나오는 새로운 메뉴. 넓은 자리는 없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용케 일 년을 버텼고 지금도 버티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나 역시 용케 일 년을 버텼고, 지금도 버티고 있긴 하다. 똑같은 삶이 지루하고,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수십 번의 현타가 올 때가 있긴 하지만 생각해 보면 조금씩 변화했다. 변화를 싫어하는 내가 많은 변화를 뒤늦게 느끼고 있을 만큼. 그렇게 살아왔다.
시간은 우리를 자꾸 건들면서 지나간다. 그렇게 일 년의 시간이 지나간 흔적을 바라보면 희미하게 변화한 것들이 눈에 띈다. 나를 잃지 않는 범위 내에서 약간의 변화는 반갑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난 내년의 내가 처음으로 궁금해졌다. 그래서 나만의 기념을 해볼까 생각 중이다. 무인카페처럼 몸에 일주년 스티커를 붙일 순 없겠지만, 그래도 나만의 기념은 언제나 흥미로우니까.
많은 게 바뀔 거란 큰 기대감은 없지만 최소 일 년 내내 입고 있는 나의 잠옷 하나 정도는 바뀌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를 하며, 오늘도 늘 그랬듯 비슷하게 살아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