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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주혜 Oct 31. 2023

들개와 우리 개

[연재] 생명으로 우리는 귀엽다

'도심 곳곳에서 들개 출몰, 마주칠까 두려워'  어느 날의 지역뉴스 헤드라인이었다. 뉴스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대략 이렇다. 유기견 몇 마리가 야생화가 되는 과정에서 공격성을 갖게 되었고 자연적으로 번식하여 무리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들은 도심에서 무리를 지어 다니고 산책길에 만나는 사람이나 동물에게 공격을 할 수 있으니 주의를 해야 한다고 했다. 지자체는 '동물보호법상 유기 동물을 함부로 사살할 수 없게 돼 있어서 들개도 포획틀로 잡을 수밖에 없는 데다, 계속 움직이는 개들을 붙잡는 것도 쉽지 않다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결과적으로 이렇다. 들개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들은 그 어디에도 없으니 알아서들 잘 피하라는 식이다. 짧은 뉴스 브리핑이 오래도록 내 머릿속에 남는다. 들개들은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을까. 이 개들의 운명은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앞으로도 어떻게 될 것인가. 궁금했다.


뉴스로 보이는 개들의 모습은 우리 동네 산책길에서 만나는 여느 반려견들과 다르지 않았다. 강아지들은 천진난만한 모습이었고 어미 개들은 목줄만 채우면 '어느 집 누구 개'라 불릴만한 외모를 갖고 있었다. 야생이 그들을 키웠다고는 하나 사람과 함께하는 삶도 제법 잘 어울렸을 모습이랄까. 그래서였을까. 나는 화면에 보이는 개들을 경계하라고 했던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오히려 공격적으로 들렸다. 그러나 이것은 뉴스에 보도된 내용 그대로 반드시 경계해야 할 일이다. 나의 소중한 이웃이, 나의 반려견이 다칠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공격할 수 있는 동물인 그들에 대하여 나는 왜 무서운 대상으로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다름을 규정한 이들의 목소리가 더 아프게 들렸던 걸까. 그 생각의 지평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나의 부모님 집에는 올해 17살이 된 개가 있다. 이름은 복실. 복실이가 나의 아버지를 만난 건 어쩌면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부모님은 은퇴 시점에 맞춰 전원주택 생활을 하기로 결정하셨다. 도심 근교에 미리 땅을 사 둔 아버지는 직접 도면을 그리고 벽돌을 쌓아 올리며 집을 지었다. 그야말로 직접 쌓아 올린 내 집마련에 성공하셨다. 집의 골조가 올라갈 무렵 건축 자재들을 한쪽 마당에 쌓아두었는데 어느 날 나무판자와 벽돌 등 정리되지 않은 기둥 사이에서 복실이가 발견됐다. 복실이를 처음 발견했을 당시 아버지는 동네 떠돌이 개인 줄 알았다고 한다. 언젠가 자기 집으로 가겠지 생각했지만 복실이는 갈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복실에게 밥을 주기 시작했고 마음도 함께 주게 됐다. 그래도 아버지는 복실이가 언제든 떠난다면 붙잡을 생각은 없었다. 복실이가 잠시 놀다 가기 좋은 곳이 이곳이면 그것으로도 좋겠다 싶었다. 시간이 흘렀고 집이 다 지어질 때까지 복실이는 집을 지켰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우리 가족이 됐다. 마치 복실이가 우리 집을 선택한 것만 같았다. 어디에서 왔는지, 어떤 강아지였는지 알아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복실이에게 이름표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복실이가 만약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지지 못하고 다시 떠돌이 생활을 택했다면 복실이의 운명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뉴스에 갑자기 출몰하는 검은색 개를 조심하라는 문장과 함께 출연할지도 모를 일이다. 복실이는 우리 가족의 막내가 되었고 아버지는 복실이의 산책담당, 엄마는 밥담당, 동생은 미용담당, 나는 목욕담당으로 복실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온전히 즐겼다. 우리 가족은 복실이가 없는 우리 집을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복실이를 키우면서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동물이 먼저 인간에게 손을 내밀 수도 있다는 거였다. 나는 줄곧 인간이 동물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하고, 인간이 먼저 동물을 위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복실이는 우리에게 먼저 다가왔고 우리 가족을 위해 자신의 자리를 만들고 때론 내어주기도 했다. 동물은 어쩌면 인간에게 인간이 머리로 생각하려고만 하는 사랑에 대해 마치 본능적으로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물이 인간에게 보여주는 눈빛과 발짓 그리고 온몸으로 표현하는 사랑은 인간이 계산하고 이익을 따지며 추후를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온전하게 동물의 사랑을 느껴본 사람은 알 수 있다. 우리의 생각이 그저 무지한 반복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런 동물들이 인간에게 바라는 것은 돌봄 이전에 필요한 살핌이다. 오직 자신을 잊지 않고 살펴주기를 바랄 뿐이다. 인간이 동물을 살피기 시작하면 동물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준다. 그 한 사람의 살핌에 온전히 사랑과 삶을 의지한다.


만약 복실이에게 아버지가 밥을, 아니 마음을 주지 않았다면 복실이는 들개가 됐을 수도 있겠다. 또 다른 누군가의 살핌을 찾아 헤매거나 생존을 위해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를 택했을 것이다. 들개가 우리의 일상을 위협하기 때문에 이들을 조심해야 한다는 뉴스를 보고 우리 개의 산책길을 염려하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인다. 지자체의 빠른 조치를 당부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전에 들개들의 하루에 대하여 먼저 궁금했어야 한다. 이들이 도심에서 맹수가 되기 전에는 누군가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을,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 먹고 어디든 열심히 달렸을 것임을, 이들이 몇 년 전 어떻게 태어났고 어디에서부터 출발한 여정이었는지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 집 반려견과 똑같은 모습을 한 '개'일지라도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살피지 않으면 우리 개도 맹수가 된다. 그러나 누군가의 살핌과 돌봄이 이들의 생을 전혀 다르게 한다. 동물칼럼니스트 김소희는 저서 <모든 개는 다르다>에서 개와 인간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개에 대한 사랑은 현시대에 이르러 생겨난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인간과 개의 사랑은 이미 1만 2천 년 전부터 시작되었고, 그 사랑은 사나운 야생동물 '늑대'를 애교 넘치는 푸들과 치와와로 탈바꿈시켜 놓았을 만큼 뜨거웠다.' 개와 인간에 대한 관계와 존재의 규명은 사랑으로 달라진 것이다. 나는 들개들의 상황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도 이 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만약 이들을 단순히 인간을 '공격'하는 대상으로 여기고 경계하며 나아가 포획하고 사살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일상과 단절시키는 방향성으로 조치한다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유기견들을 보호하고 입양하며 개체수를 조정하는 일까지 우리의 법과 제도, 그리고 인간의 인식이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들개들은 또다시 누군가를 공격하고 위협하는 존재로 살아남기를 택할 것이다. 그에 따른 결과는 곧 인간에게 돌아온다.


나는 사랑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는 말을 좋아한다. 사랑이란 참 거창한 말이어서 이걸로 뭐든 해결하겠다는 글들이 이해되지 않을 때도 많지만 결국에 내가 원하는 것이 사랑으로 변화된 세상인 것 같다. 어딘가에 오늘도 생명으로 존재하는 동물과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당장의 허기를 채우는 떡이 아니라 따뜻한 마음으로 세운 안전한 지붕일지도 모르겠다. 그 어느 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리고 맑은 날이나 한 번도 밥을 달라 하지 않고 그저 누군가가 세운 나무 지붕 아래에 가만히 앉아 있었던 복실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충만하다. 지금 거리를 헤메이는 어느 들개도 살핌과 사랑을 잃어버린 누군가의 '우리 개'였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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