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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텔라 Dec 19. 2024

물들고 물들이다

That’s what friends are for

"이거다! 이 노래였어."

며칠간 꽉 막혔던 속이 뻥 뚫리는 것만 같았다.     




얼마 전, 집에서 아이들과 슈렉 영화를 보고 있던 평범한 저녁 시간이었다. 갑자기 흘러나오는 배경 음악.

“딴따다~ 딴따다~ 딴따다다 따다다~ for sure.”

익숙한 멜로디. 이 노래의 제목을 찾기 위해 인터넷 검색을 해보고 허밍으로 음악 찾기를 해봐도 도무지 노래 제목을 알 길이 없었다.

“자기야, 나 이 노래 아는데 제목이 뭐였지? for sure 만 기억나.”

웬만한 올드팝 제목은 전주만 듣고도 기억하는 편이었는데, 어쩐 일인지 가사도 ‘for sure’ 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나이 들었다는 증거. 특히 출산 후 점점 심각해짐을 느낀다.

남편도 알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난다며 서로 “뭐였지? 뭐였지?”만 반복하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운전 중 켠 라디오에서 “딴따다~ 딴따다~” 흘러나오는 멜로디. 타이밍도 어쩜 이렇게 완벽한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라디오를 켜자마자 시작된 그 노래.

슈렉에서 멜로디만 흘러나왔던 것과는 달리 가사를 정확히 들려주는 원곡 “That’s what friends are for.”

이토록 기쁘고 흥분될 일인가.



어려운 한자성어와 함께 이어지는 DJ의 멘트는 이 노래를 찾았다는 기쁨에 더해,

나를 돌아볼 수 있게 해주는 귀중한 순간을 선사했다.      


내 곁에 있는 사람이 나를 설명해 준다.
근주자적: 붉은색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붉게 물들고 먹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검게 물든다. 착한 사람과 사귀면 착해지고, 악한 사람과 사귀면 악해짐에 비유함.
마중지봉: 삼 밭에서 자라는 쑥이 붙들어 주지 않아도 곧게 자라듯 사람도 주위환경에 따라 선악이 다르게 될 수 있음을 뜻하는 한자성어.
한 사람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친구를 보라.    

출처: EBS 라디오


누구나 어렸을 적부터 자주 들어오던 이야기.

특별히 감흥이 없던 이 말이 마흔 넘어가니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은 알 듯했다.

우리네 삶은 혼자서는 잘 살아갈 수 없다. 이는 살아보고 경험해 보니 더욱더 와닿는다.
내 곁에 누구를 허용하고 곁에 두느냐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서서히 물들어 간다는, 또한 나만 물들어 가는 것이 아닌 나도 곁에 있는 이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즉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DJ의 부연 설명이 가슴 깊이 쑥 들어왔다. 그러면서 어느 시점에 그 사람을 만났던 것이 긍정이든 부정이든, 그 어느 방향으로도 나에게는 영향을 미쳤을 것이란다.




곰곰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가깝게는 가족과 친구들, 성인이 되어 일로 만난 이들, 아이를 통해 만난 이들, 같은 종교 안에서 만난 이들. 너무나도 다양한 사람들 속에서 나는 어떻게 물들어 가고 또 어떻게 물들이고 있을까?

유년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인연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참 여러 사람들을 만났었고 지금도 만나고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도움을 청하여 도와주면, 나중엔 결국 자신이 혼자 잘해서 된 것 마냥 뻔뻔해지사람.

꼭 이런 사람들이 자신의 자랑거리는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려 못 참으면서,

정작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할 순간에는 입을 꾹 닫는다.

더 이상은 나도 그런 인간관계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

그저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는 비즈니스 관계로 남을 뿐. 상대방은 나를 변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단지 그러한 인간관계를 더 이상 지속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아니, 정확히는 쏟을 에너지가 부족하다.


예전에는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도 해보았지만 나이 들어가며 함께 고갈되어 가는 나의 체력적, 정신적 에너지를 이런 인간관계에 쏟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조차 '나 자신은 혹시 이런  적이 없었나' 돌아보는 계기가 되니 꼭 나쁜 영향을 주었다고만은 할 수 없을 것 같다. 서로의 성향과 결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편이 낫겠다.

게다가 나에겐 자주 만나지 못해도 존재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활력이 되는, 곁에 둔 사람들이 많기에 남은 에너지는 그 사람들을 위해 아껴두고 싶다.

외적이든, 내적이든 정말로 가진 자는 말이 없는 법.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기 때문이다. 자격지심에 나를 내세우는 사람이 아닌, 내 곁에 있는 이런 겸손한 이들을 본받아 나 또한 겸손해지길 다짐해 본다.



예전에도, 지금도 계속 내 곁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들.

이 사람들을 생각하니 감사 기도가 절로 나온다.

일일이 이름을 다 말할 수는 없으나 이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과연 존재할까?

내가 어려운 늪에 빠져있을 때 손 내밀어 꺼내주고, 기쁠 때는 자신의 일처럼 함께 기뻐하며 축하해 주던 가족과 이웃이 있었기에 그 과정 속에서 단단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건 분명한 사실이자, 다시 생각해 보아도 참 감사한 일이다.     

 

살면서 가장 감사하는 일 중의 하나가 바로 나는 참 인복이 많다는 것이다.

돌아보면 도움이 필요했던 순간마다 적재적소에 고마운 가족과 벗들이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나 역시 주위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신념에 서서히 물들어 왔다.

삶의 지표를 ‘사랑’으로 두고 살아가다 보면 물질적 부도, 사회적 지위도 나의 행복을 결정짓는 요소가 아니라 바로 내 사람들과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가장 큰 행복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된 순간이다.

하지만 알고 있다. 가까운 사람만 챙기지 말고 소외받은 이웃들도 함께 사랑하고 돌볼 때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걸. 지금껏 내가 한없이 넘치게 받았던 사랑을 이제는 소외된 이웃과 나누어야, 비로소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      




올드 팝송 하나로 시작 된  인생 고찰; 인간관계에 대하여


결론은, 감사기도로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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