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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ttScience May 31. 2023

왜 ‘미래교육’ 이어야만 했을까?

매시간을 교육의 흐름에 살고 있는 미국 국공립 혁신학교 선생님의 이야기.

‘미래교육’이라고 굳이 이름은 지어야 한다면, 그건 여태껏 하지 않았던, 그렇지만 해야만 하는 그 아이들의 생각을 꺼내보는 교육이 아닐까? 그게 어떤 식으로 지금 우리 곁에 맴도는 단어들이던, 아이들의 다양성을 존중해 주고, 다양성의 존중을 규범화시킬 수 있는 공간을 언제든지 열어둘 수 있으며, 그 공간에 들어서는 누구든 자신의 배경지식과 사회경제적 영향력을 다 소진하면서 정정 당당하게 다양성이라는 규범의 범주를 넓히는 연습을 하는 교실에 사는 아이들이야 말로 진정한 ‘미래교육’을 받고 있는 게 아닐까?

아이를 낳고부턴 여느 이민자 생활을 하는 부모님들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을 자주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한국말도 기억이 안 나고 영어로도 단어가 기억이 안나는 0(영) 개국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빈번하게 모든 한국적 사고에 기반한 고민들을 언어적으로 접근하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지금 일하는 고등학교에서 2년 차를 끝내고 여러 한국 소셜미디어를 통해 가장 많이 들은 단어가 ‘미래교육’이다. 왜 하필이면 ‘미래교육’ 일까? ‘차세대 교육’ 도 아니고, ‘학습성취기반교육’ 도 아니고, 심지어는 이미 많이 나돌아 다닐 대로 널브러진 ‘프로젝트 기반교육’도 아니다. 

패션이 그렇듯 교육적 트렌드도 돌고 돈다고 배웠다. 미국에서 교직에서 일한 8년 동안 그 말이 참임을 너무 깨달았다. 석사과정을 할 때만 하더라도 미국 국립과학기구 (National Science Foundation)의 인증이 찍힌 교재들은 어느 학군이나 너나 나나 없이 사들였고 그 교재들을 파는 중심에는 언제나 같은 회사가 있었다, Pierson. 지금 미국 과학교육은 Next Generation Science Standard (NGSS)를 기반으로 흘러간다. 심지어 2008년에 처음 파일럿된 이 기준들을 들춰보면 결국은 NSF에서 제시했던 과학자, 과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배경지식, 소양은 바뀐 것이 없다. 심지어는 가장 잘 나가는 NGSS 교재를 파는 회사 역시 달라진 것이 없다, Pierson. 그렇다면 그 소위 잘난 미국교육은 ‘미래교육’을 하고 있는 것일까?

결국은 어떤 사회적 현상을 따라가고, 교육을 그에 맞춰서 어떻게 진화시키느냐의 차이인 것 같다. 우리는 소위 진화라고 생각하면 뭐든 어떤 특정한 것의 특성이 진보적으로 나아지는 것을 생각한다. 하지만 과학을 하는 사람들이 ‘진화’의 정의를 들여다보면 단순히 긴 시간 동안 바뀌어온 환경에 적응하다 보니 결국 생물학적 구조와 생리학적 역할들이 서서히 바뀌어 간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교육도 바뀌어가는 사회경제의 정서, 기술적 진보, 그리고 기후변화에 맞춰서 진화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리고 그 진화가 어쩌면 우리가 생각했던 진보적인 것이 아닌 퇴화적인 모습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한국 교육계는 여느 때처럼 험난한 과도기를 겪고 있고 선택의 길로에 올라섰다. ‘미래교육’이라는 단어를 다시 우리 입밖에 내뱉는 순간 교육계는 너무 많은 질타를 받았고 그만큼의 실망감을 안겨줬다.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수긍하는 입장의 일반인에겐 어무나 황당무계한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입시전형은 천천히 바꾸되 고교학점제는 최대한 빨리 코로나의 물결을 타고 시작돼야 하는 것이었고, 그것과 엇박자로 한국식 국제 바칼로레아, KB, 는 충분히 모든 것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잡음을 선두로 오직 2개 시험 교육지에서 운영됐다. 그런데 입시는 아직도 꿈쩍을 하지 않고 대학등록률은 추락하고 심지어 출산율도 떨어지고 있단다. 이런 우리가 ‘미래교육’이라는 말을 입밖에 내뱉고 명명할 자격이나 있을까?

언제부터 우리 교육엔 ‘아이들’이 빠진 걸까? 결국은 교육을 받아서 이 나라, 이 사회를 점검하며 구축하고 이끌어가야 할 사람들은 정작 그들인데. 나이가 어려서? 경험이 부족해서? 능력이 없어서? 기회를 줘야 평가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호랑이, 사자, 금붕어, 캥거루, 기린에게 나무 타는 걸 시험으로 내준 꼴의 교육을 해오던 사회로서, 언제까지 각자의 개성과 영재성이 너무나도 다른 아이들을 무시하며 집어넣는 교육만을 해야 할까? 

‘미래교육’이라고 굳이 이름은 지어야 한다면, 그건 여태껏 하지 않았던, 그렇지만 해야만 하는 그 아이들의 생각을 꺼내보는 교육이 아닐까? 그게 어떤 식으로 지금 우리 곁에 맴도는 단어들이던, 아이들의 다양성을 존중해 주고, 다양성의 존중을 규범화시킬 수 있는 공간을 언제든지 열어둘 수 있으며, 그 공간에 들어서는 누구든 자신의 배경지식과 사회경제적 영향력을 다 소진하면서 정정 당당하게 다양성이라는 규범의 범주를 넓히는 연습을 하는 교실에 사는 아이들이야 말로 진정한 ‘미래교육’을 받고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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