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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질바질 Jan 22. 2024

아직 축의금을 갖고 있어요.

나의 작은 부엌살림살이에 관하여_도마

결혼한 지 삼 년이 되어가지만, 축의금 봉투 두 개와 축의금 일부를 갖고 있다. 축의금을 지금까지 간직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축의금 봉투 때문인 것 같다. 잘 살라고, 축하한다고 담담하게 적혀있는 짧은 카드를 품은 축의금 봉투에서 풍기는 진심이 여전히 좋다. 그리고 내 앞길에 꽃길이 항상 펼쳐질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축의금 봉투가 있는데, 그 봉투는 하늘빛이 감도는 초록색으로 잔잔한 꽃들이 가득 차 있고, 봉투 한 귀퉁이에는 “행복한 날들이 꽃길처럼 펼쳐질 거야.♥”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짧은 이 한마디를 읽을 때면 왠지 모를 행복감과 그 당시 벅찬 감정들이 내 마음속에 잠시 밀려온다.      


생각해 보면 어릴 적에는 이유식 한 숟가락만 잘 받아먹어도, 어설픈 걸음마만으로도 나를 바라보는 이들은 환한 미소로 박수와 환호를 해주었다. 유년 시절의 모든 행동은 축하받을만한 것뿐이어서 축하받는 삶은 오히려 당연하였을 것이다. 학생이 되어서는 어린 시절보단 덜 하지만 입학식과 졸업식이 때마다 있어 소소한 축하를 끊임없이 받았다. 하지만, 직장인이 되고 쳇바퀴를 도는 어른이 되자 그저 그런 하루에서는 축하받을 일이 점점 사라졌다. 서글프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평범하게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이 오히려 어른에게는 더 축하받을만한 일이니까.      


그런 평범한 일상에 쏟아진 축하와 처음 받아보는 축의금은 정말 고맙고도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들을 추억 속에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대부분의 축의금은 내가 지나온 시간 속 어딘가에 잘 흘러 들어가 나의 결혼생활에 작은 발판과 추억을 만들어 주었다. 그렇지만 내가 늘 ‘부산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선생님께 받은 축의금을 기억이 나지 않는 어딘가에 사용하기는 찜찜하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싫었다. 나는 일찍이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선생님과 만날 때면 우리 할머니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여기서 잠시 부산 선생님을 소개하자면, 선생님은 엄마의 고등학교 은사님이시다. (화학 선생님이셨지만) 선생님께서 나의 이름을 지어 주셨고, 그렇게 나는 태어나면서 선생님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런저런 마음으로 나는 오랫동안, 어쩌면 평생 사용할 수 있는 원목 도마를 선생님의 축의금으로 구매했다. 돌이켜보니 어처구니가 없는 생각임을 얼마 전에 알게 되었는데, (인터넷에서는 원목 도마 사용 기간을 1년-1년 반 정도 사용하라고 권고한다.) 소모품인 도마를 평생 사용할 생각을 하다니! 아마도 내 기준에는 비쌌던 금액 탓에 ‘평생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얼마 전 나는 고장 난 물건을 두고 “이런 걸 평생 쓸 수 없게 만들었다고?” 불평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물건을 오래 사용하는 습관 때문에 나의 뇌는 ‘오래’를 어느새 ‘평생’으로 인지하나 싶어졌다. 무지하고 순수하여 소모품인 도마마저 평생 사용하려고 했던 그 시절의 나를 ‘작은 물건도 소중히 오래 사용하는 사람’이라는 단어로 감싸 안아본다.     




순수함과 기쁜 마음만 갖고 살았을 어린이의 마음으로 잠시 돌아가는 결혼식 전후의 시간을 돌이켜보니 그 시절이 다시금 소중해진다. 어릴 적 받았던 수많은 미소와 응원들이 한껏 압축되어 무미건조한 어른의 일생에 단비같이 찾아오는 결혼식. 진실한 마음과 축하가 모인 기쁜 결혼식 날. 그때 벅찼던 마음이 다시금 떠오른다. 가끔은 힘들어서 투덜거리는 ‘나’이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그때의 기운을 되살려 오늘도 내일도 잘 살아내기를 바란다.


택배로 도마를 받은 날, 대장간에서 산 칼을 꽂은 뒤 사진을 찍어두었어요.(친정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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