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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노랑 May 06. 2024

해외출장#1. 갈래, 아냐 싫어, 아니 가고 싶나?

10번 울리고 1번 다정한 마성의 해외출장

'방과 후 직장인'은 사원증을 찍고 나오는 순간 진짜 현실이 시작된다고 믿는다. 해외출장도 어떻게 보면 사원증을 찍고 나온 것이니.. 이 오묘한 경계에 관해 얘기해보려고 한다.


난 해외 사업하는 곳에서 일하고 있다. 사회초년생 시절 약 2년 반정도 국내 사업을 했던 것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4년 반동안 해외영업 - 상품기획 - 영업전략 직무를 거치며 글로벌 시장을 상대로 일하는 중이다. 그렇다 보니 해외출장은 필수다.


친구들에게 해외출장을 간다 하면 백이면 백 똑같은 반응이다. '와, 부럽다.' 부러워하는 이유인즉슨 회사 돈으로 해외에 나가기 때문이다. 비행기 값도 회사 돈, 호텔 값도 회사 돈. 심지어 그곳에 가서 생활하는 비용도 회사에서 준다. 묘사만 보면 공짜 여행이 따로 없다. 이렇게만 보면 안 갈 이유가 없지.


그러나 회사는 자선단체가 아니다. 절대 아무 대가 없이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 출장은 자고로 똑 부러지는 결과물로 응당 보답해야 하는 법. 그 결과물을 내기 위해 한국에서부터 미리 준비하고 조율하고 심지어 보고서도 미리 만들어두어야 한다. 임원진에게 출장 사전 보고는 필수다. 또 가서는 어떻고. 여기가 서울인지, 밀라노인지 아니면 코엑스인지, 메쎄 베를린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실내에 갇혀 밤낮으로 일한다. 뒤바뀐 시차에 맞게 낮에는 현지 업무, 밤에는 본사 업무. 아, 맞아. 경유지에서도 대충 끼니를 때우고서 밀린 메일을 하나씩 처리한다.


이렇게 날 힘들게 하는 녀석이지만 어린 시절 괜히 흔들거리는 이를 혀로 밀며 아픔을 즐기듯 나는 해외출장을 꽤나 좋아한다. 아마 출장 중 가끔씩 만나는 단비 같은 순간 덕분에 힘든 건 홀라당 다 까먹어버리는 것 같다. 역시 망각은 신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다. 10번 울려도 1번 다정한 그 모습에 마음을 뺏겨버린 것이다. 세대를 막론하고 나쁜 남자가 늘 인기 있는 것도 이 이유 때문이다.


출장의 단비는 크게 두 종류다. 업무의 뿌듯함과 퇴근 후 자유시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리는 전시회 IFA 출장을 갔을 때 출장의 매력에 단단히 빠졌다. IT사업부를 대표해 간 것이라 챙겨야 할 것이 정말 많았다. 내 제품이 아니더라도 모든 전시 제품의 스펙을 익혀야 했고 VIP 투어 스크립트 작성과 부스 Promoter 교육까지 담당해야 했다. 당연히 Promoter들은 독일인이기 때문에 한국어로도 힘든 제품 설명을 영어로 진행해야만 했다. 가는 비행기에서 달달 외우며 가느라 한숨도 못 잔 기억이 난다. 고비 넘겼다고 생각이 때쯤 사전에 공유받지 못한 현지 Press 방문이 이루어졌고 또한 사업부를 대표해 내가 진행하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전시회가 시작되면 본사에 보낼 경쟁사 동향 보고서 작성이 필요하다. 구두를 신고 1만 평이나 되는 전시장을 누빈다. LG, Samsung을 지나 DELL, ASUS, Acer, MSI 등등.. 경쟁사가 어떤 새로운 제품을 출품했는지 살펴본다. 전시 시작 1일차에 보고서 초안을 본사에 발송해야 하기 때문에 마음이 급하다. 우리 부스로 돌아와 보고서를 쓰다가 갑자기 놓친 정보가 있다면 또다시 퉁퉁 부은 발을 구두에 구겨 넣고 길을 나서야 한다. 그 와중에 거래선이 왔다. 잠시 회의에 참석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냥 빨리 보고서나 마무리하고 싶지만 여유로운 웃음으로 말한다. Of course!


그렇게 하루종일 햇빛 한번 제대로 못 보고 보고서를 쓰고, 부스를 대응하고, 거래선과 회의를 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다가온다. 보통 출장을 나가면 따로 정해진 퇴근 시간이 없지만 전시 출장은 다행히 전시장 Close와 함께 퇴근이다. 이제부터는 함께 온 출장자들과 즐거운 저녁시간이 시작된다. 우버를 타고 나가 브란덴부르크 문 근처 레스토랑에 갔다.

스테이크에 피자에 먹고 싶은 거 잔뜩 주문하고 각자 맥주도 한잔씩 시켰다. 크.. 갑자기 이곳이 유럽이구나 실감이 나며 행복이 머리 위로 사르르 흘러내린다. 솔직히 음식은 그리 맛있지 않지만 맥주는 독일답게 끝장난다. 워낙 친하게 일하던 분들과 함께 온 덕분에 식사 중에도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누구 팀장 얘기, 누구 임원 얘기, 또 퇴사한 동료 얘기. 이렇게 재밌을 수가. 단체 출장을 오면 왠지 모를 전우애가 생겨 더 애틋하고 친해진다. 알게 모르게 끈끈해지는 동료들과의 유대도 출장 중 맛보는 기쁨에 한 몫 한다. 여기에 대해선 할 얘기가 많으니 다음번에는 이것을 주제로 써야겠다!


식사가 끝나고 다 같이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그렇게 걸어서 베를린 돔도 만나고 기념품도 샀다. 아무래도 독일이니 베를린 이니셜이 담긴 병따개 마그넷을 샀다. 그러던 와중 누군가 '다 같이 쇼핑 한번 갈까요?'라고 말하자 너무 좋아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근처에 있는 쇼핑 거리로 이동해 누구 먼저 할 것 없이 일사분란하게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COS, A.P.C, 칼하트, 프라이탁에 맨 몸으로 들어가 마음에 드는 옷과 가방과 함께 나왔다. 한국보다 훨씬 싸서 안 살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나중에 공항에서 택스 리펀까지 받을 생각을 하니 거의 뭐 공짜로 산 것 같은 기분이다. 다시 모여 각자 쇼핑 목록을 살펴보니 개성에 따라 제각각이지만 표정은 행복이 넘실넘실한 것이 똑같은 얼굴이다. 분명 전시장에서는 다들 지쳐있었는데 언제 이렇게 생기발랄해진 건지 재밌을 따름이다.


즐거운 저녁 시간이 끝나고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다시 피로가 몰려온다. 으윽.. 샤워를 마치고 오니 더 죽겠다. 하지만 나에겐 아직 끝내지 못한 보고서가 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억지로 노트북을 열고 보고서를 쓴다. 무슨 경쟁사가 이리도 많은 건지. 찍어둔 사진과 부스에서 직접 확인한 정보를 집대성하여 보고서를 완성한다. 시계를 보니 벌써 새벽 2시다. 한국은 출근할 시간이겠구나. 얼른 메일 전송 버튼을 누르고 침대로 다이빙한다.


이렇게 낮에는 전시장, 저녁은 도심, 새벽은 호텔에서 보내는 쳇바퀴 같은 12박 13일을 보낸다. 몸이 지칠 대로 지치지만 내가 기획한 제품에 관심을 갖는 방문객과 부스에서 리뷰 영상까지 찍어가는 유튜버들을 보며 짜릿한 전율을 느낀다. 거래선 미팅에서는 제품 출시 일정에 맞춰 공동 프로모션 진행이 결정되었고 그 자리에서 물량 협의까지 완료되었다. 그리고 본사에서는 보고서 초안을 바탕으로 최종 보고까지 완료되었다는 후련한 소식이 날아왔다.


낯선 이국 땅에서 착실히 퀘스트를 수행한 끝에 마침내 최종 결과물까지 컨펌 완료되었다. 글에 모두 적진 않았지만 본사 업무 대응을 위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회의에 참석한 날도 있었고 하루종일 구두를 신고 다니며 밴드로 덕지덕지 발을 감쌌지만 이곳저곳 상처 나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해냈다. 그 와중에도 남는 건 추억이라며 꾸역꾸역 베를린 거리를 거닐었다. 출장지는 해가 지고 나서야 볼 수 있는 반쪽짜리 도시에 불과하지만 그 추억은 마음에 오래 남아 나를 간지럽힌다.


일정이 끝나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는 예외없이 그대로 뻗어버린다. 심지어 IFA 출장 때는 이륙한 줄도 모르고 잠이 들었다. 뒷자리에 앉은 선배가 등받이 넘겨도 된다고 말을 해주었을 때, 그때 잠들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꼿꼿이 앉은 채로 잠들 만큼 온 체력을 쏟고 온 것이다.


지난 4월에는 이탈리아 밀라노에 7박 8일로 출장을 다녀왔다. 하루하루 작은 에피소드는 다르지만 큰 줄기는 같았다. 출장 전 가득한 걱정거리. 비행기에서 미리 준비하는 업무와 경유지에서 대응하는 본사업무. 강행군 속에 새벽까지 이어지는 업무. 어떻게는 짬을 내어 즐겨보는 동료들과의 달콤한 저녁.


그리고 참 공교롭게도 베를린, 밀라노 출장 모두 캐리어가 그날 한국에 도착하지 않았다. 왜 매번 내 캐리어만 누락되어 오는 것인지.. 해외 출장 싫어!라고 말하면서도 은근 단짠단짠 출장에 중독된 마음이 남아 캐리어만이라도 하루 더 있다 오게 만드는 건 아닐까 상상해 본다. 가기 싫지만 또 가고 싶은 해외출장.


이번 5월 말에도 런던 출장이 계획되어 있다. 물론 지금은 또 가기 싫다. 당장 내일부터 출장 자료를 만들어야 한다. 아아, 고통스러운 삶이여. 하지만 늘 그래 왔듯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심정이다. 극강의 업무 강도 해외출장. 그까짓 거 또 해내보기로 한다. 맞다이로 맞서겠다. 그러니 런던 출장 중에도 반쪽짜리 도시를 즐길 여유가 조금이나마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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