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판세를 가른 세게스타
어제 늦은 오후 아그리젠토를 다녀 온 것 말고는 사흘동안 진종일 베두라 리조트에서 골프와 휴식으로 시간을 보냈다. 오늘 아침 리조트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시칠리아의 와인 산지로 유명한 마르살라Marsala로 향했다. 마르살라에서 와이너리 한 군데를 들러 보았다. 자체 포도밭은 없고 주변 농가에서 포도를 선도입매 해서 와인을 만든다고 한다. 프랑스의 보르고뉴에도 이러한 와이너리가 많았던 것이 생각났다. 아무튼 다양한 포도 품종으로 생산하는 와인의 종류도 많았지만 딱히 기억에 남을 만큼 인상적인 와인은 없었다. 와이너리에서 와인을 곁들인 점심식사를 마치고 또 다른 고대 그리스 유적지인 세게스타Segesta로 출발했다.
길게 이어지는 황량한 산과 양떼들을 풀어 놓은 구릉을 지나자 마침내 세게스타가 보였다. 버스에서 내리자 상쾌한 시칠리아의 공기와 주변 시골의 은은한 향기가 우리를 맞이한다. 조금 위로 올라가니 구릉 건너편에 바르바로Barbaro 산을 배경으로 고대 그리스 신전이 우뚝 서 있다. 세게스타의 미완성 신전이었다. 기원전 5세기에 지어진 도리안 스타일의 이 신전은 가로, 세로 6개와 14개의 황금비율로 총 36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제스타에서 가장 상징적인 이 건축물은 완벽한 보존상태 뿐만 아니라 정확한 대칭구조와 훌륭한 건축 품질로 전 세계에서 최고의 그리스 유적으로 꼽힌다. 또한 세게스타에는 놀라운 반전이 숨어 있는데 지금까지 시칠리아에서 본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들과 비교하여 특이한 점이 몇 가지 있다.
첫째, 바닷가에 위치해 있지 않다. 앞에 설명했듯이 시칠리아에는 겔라 출신의 그리스 사람들이 기원전 7세기 이주해와 선주민들을 내륙으로 몰아 내고 해안을 따라 도시국가를 건설하였다. 그래서 지금까지 본 고대 그리스 유적은 모두 해안가에 있었는데 여기는 내륙의 산악지대다. 놀랍게도 이 도시를 건설한 사람들은 그리스인이 아니고 선주민인 엘리미안Elymians이다. 그래서일까, 그리스 폴리스의 특성을 어느 정도 갖고 있기는 하지만 다른 그리스 도시 국가와 같은 수준의 정치적 독립성과 자치권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들은 트로이 전쟁에서 패하자 기원전 12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시칠리아로 이주한 트로이 사람들의 후예라는 설이 있는데 명확한 증거는 없다고 한다.
둘째, 이 신전은 헌정된 신이 없는 ‘익명의 신전’이다. 다른 고대 그리스 신전들처럼 신을 모시는 내부 방이 없고 조각상도 없다. 이들이 고대 그리스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도리안 스타일의 신전을 지었지만 헌납한 신이 없는 것은 신을 믿지 않아서 일까? 아름다운 그리스 신전을 본 딴 모습으로 지었지만 신전이 아닌 다른 용도로 쓰려고 지었을까? 헌납한 신이 없다는 것때문에 다른 용도로 쓰기 위해 이 건축물을 지었다는 가설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를 입증할 명확한 증거나 뒷받침되는 사실이 없어 추측에 불과하다.
셋째, 이 신전은 미완성 신전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선주민인 엘리미안을 적으로 인식하였고 세게스타의 부상을 견제하기 위해 여러차례 침략하였다. 이 신전이 완공되지 못한 이유도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 중 하나인 셀리눈테Selinute와의 전쟁 때문이었다고 한다. 기원전 415년 셀리눈테의 침공으로 약탈당하자 세게스타는 아테나에 지원을 요청하고 아테나는 시칠리아 원정을 감행한다. 이에 셀리눈테는 시라쿠사의 지원을 요청하여 확전으로 치닫게 된다. 나중에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들까지 가세하면서 전세는 기울어 결국 아테나는 패배하게 된다. 기원전 411년 셀리눈테가 세게스타를 다시 침공하자 이번에는 카르타고에 도움을 청하게 된다. 카르타고의 개입으로 셀리눈테 역시 포위되어 약탈을 당하게 되는데 결과적으로 이 전쟁은 양쪽 다 큰 피해를 입히고 두 도시국가는 몰락하게 된다.
세게스타와 살리눈테간의 갈등으로 시작된 이 전쟁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전장을 그리스 본토에서 시칠리아로 옮겨오게 하는 역할을 했으며 10년 넘게 끌어온 이 전쟁의 결과를 갈랐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스파르타가 부상하는 신흥세력인 아테나를 스파르타가 저지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팽팽하게 유지되던 두 세력간의 균형은 아테네가 시칠리아에서 패배하자 치명적인 타격으로 이어져 결국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난다. 그러나 이 전쟁은 결과적으로 그리스의 황금시대를 종식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모든 폴리스들이 양쪽의 동맹국으로 갈라져 참전하고 전쟁이 오랫동안 지속되다 보니 전쟁의 승패와 관계없이 그리스 전체가 쇠락하게 된다.
전쟁은 끝났지만 많은 사람이 죽고 도시는 파괴된 데다 아테나의 민주정(시민이 주권을 가지는 정부 형태)과 스파르타의 과두정(소수에게 권력이 집중된 정부의 형태)에 대한 이념 갈등으로 내부 혼란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내부 분열로 그리스는 북쪽 마케도니아의 침략에 예전처럼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정복되고 만다. 그리스를 통일하고 페르시아를 정복하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던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의 꿈은 그의 아들인 알렉산드 대왕 의해 완성된다. 이후 찬란했던 문명을 꽃피웠던 그리스는 14세기 문예부흥운동(르네상스 Renaissance)이 일어나기 전까지 역사속에 다시 등장하지 못하고 잊히게 된다.
세게스타는 로마가 등장할 때까지 카르타고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는데 마케도니아에게 정복된 그리스 본토와는 다른 길을 걷게 된다. 트로이 전쟁 때부터 이어지는 고난의 역사를 가진 엘리미안의 도시 세게스타는 흥미로우면서도 미스테리한 곳이다. 그리스인이 아닌 사람들이 지은 그리스 신전, 2,500년 동안 완성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그리스 신전, 그렇지만 그리스 본토에 있는 신전들보다 더 완벽하게 보존된 그리스 신전,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판세를 바꾼 계기가 된 도시의 신전. 이 모든 것은 이곳을 찾게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을 제공해 준다.
신전을 둘러본 뒤 바르바로 산Mount Barbaro 정상으로 올라갔다. 걸어서 30분쯤 걸리는데 셔틀버스가 있다. 걸어 가자고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 2유로씩 주고 버스를 탔다.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길을 먼지를 날리며 오르니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려 정상까지 걸어 올라 가니 주변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아크로폴리스가 나온다. 산정에는 바람이 드세다. 드센 바람을 맞으며 정상에 건축된 것은 외적으로부터 방어가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바로 밑에는 로마 원형 극장이 있다. 약 4,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 극장은 아크로폴리스 북쪽 능선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까지 보아온 여느 그리스 극장처럼 객석에서 내려다보는 파노라믹한 주변 풍경이 압권이다.
원형 극장은 고대 그리스 건축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기원전 3, 4세기경 그리스식으로 지어졌는데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이후 로마제국 시대 초기 때 로마식으로 개조하면서 경치가 좋은 정면을 확대했다고 한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여기에도 그리스식 건축과 로마식 건축의 경계가 드러난다. 객석은 멀리 시칠리아 서쪽바다를 향해 있는데 석양이 질 무렵이면 그리스인은 이 풍경을 배경삼아 연극을 관람했을 것이다. 고대 석조 좌석에 잠시 앉아 잠시 쉬고 있으니 당시 공연의 메아리가 공중에 울려 퍼지는 것 같다. 극장 뒤로는 폴리스가 형성되어 있고 사원이 있었다고 하는데 폐허가 되어 설명이 없었다면 지나치기 쉽다. 사원은 후대 로마시대에 교회로 변신하고, 또 이후에는 무슬림이 들어와 모스크로 변신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판세를 바꾼 세게스타의 풍경과 유적에는 2,000년이 넘는 역사의 굴곡이 각인돼 있다.
구경을 마치고 내려 가기 위해 셔틀버스를 타는 곳에 가니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올라올 때는 붐비지 않았는데 모두 해질 때까지 구경하다 보니 내려갈 때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린 탓이다. 셔틀버스를 기다리면서 산 너머로 지는 해를 보니 주변의 풍경이 장관이다. 여기 고대 그리스 원형극장에 관람을 하러 온 당시의 관객들이 자연이 만들어 내는 조명효과에 넋을 잃어버릴 만 한 광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