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호텔은 팔레르모 항구에서 가까워 팔레르모만Bay of Palermo을 내려다보는 전망이 훌륭하다. 체크인을 마친 뒤 방으로 가기 전에 매니저가 직접 호텔에 대해 설명해 준다고 한다. 모든 객실은 디자인과 레이아웃이 각기 다르며, 동일한 곳은 한 곳도 없었다. 이 건물은 19세기에 지어졌으며, 원래는 영국의 제독 윌리엄 돈빌 경Sir William Domville이 소유했다고 한다. 이후 1899년에 시칠리아의 영향력 있는 플로리오Florio 가문이 이 건물을 사들였고, 이후 빌라 돔빌Villa Domville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원래 요양원으로 개조하려고 했으나 계획이 변경되어 최고급 호텔을 만들기로 결정하고 설계는 팔레르모의 유명한 건축가 에르네스토 바실레Ernesto Basile에게 맡겼다. 이 건물은 타오르미나의 티메오 호텔처럼 언덕 경사면에 조성된계단식 정원, 해안가의 연속된 방, 그리고 거대하고 요새 같은 빌라를 갖추고 있는데 1900년대 초에 완공, 개장되었다. 이 건물의 가장 주목할 만한 곳은 살롱바실레Salon Basile라고 한다. 벽면에 그려진 아름다운 프레스코화가 특징인데 그 화려함이 황홀하기 조차하다. 정원이 내려다 보이는 멋진 전망이 더해져 결혼식, 칵테일 파티 및 회의와 같은 행사에 많이 이용된다고 한다.
이 호텔이 개장될 당시는 식민지에서 유입된 부로 인해 유럽은 황금 시대를 구가하던 때였다. 정계, 재계, 연예계 등 그 시절의 거물들, 특히 왕실까지도 이곳을 즐겨 찾았다고 매니저는 자랑스럽게 말한다. 1907년에는 에드워드 7세 영국 국왕, 알렉산드라 여왕, 빅토리아 공주, 그리고 러시아의 마리아 페오도로브나 황후도 방문했다고 한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과 함께 영광스러운 날들은 사라졌고, 전쟁 중 빌라 이기에아는 병원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시칠리아 은행이 인수하여 재 개장했는데 다시 부자와 유력자들의 휴식처가 되었다. 레스토랑에서는 시칠리아식 특선 요리가 일품이라고 한다. 근대 건축 스타일에 현대적인 시설을 갖춘 이 호텔은 아름다운 경관과 운치 있는 분위기, 그리고 직원들의 친절함이 더해져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매니저의 장황한 설명을 들은 뒤 에야 방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지금까지 현대식인 베두라 리조트를 제외하면 시칠리아에서 우리가 묵은 숙소는 모두 부티크 호텔이었다. 유서 깊은 옛 건물을 개조한 것이 대부분이어서 일행이 묵은 각 방의 구조가 같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모두 방에 짐을 내리면 서로 다른 방을 보러 가곤했다. 우리 방에 박사장님 부부가 오셨는데 여자들끼리 두 방을 꼼꼼히 비교했다. 우리 방은 침대가 놓인 공간이 여유가 있는 반면 소파가 놓인 공간은 좁다. 두 사람이 내린 결론은 각 방이 모두 개성이 달라 어느 것이 좋은지 비교할 수 없단다.
시간이 늦어 샤워만 간단히 하고 레스토랑으로 내려가니 최사장님 부부가 먼저 와서 앉아 있다.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베란다 위의 야외 테이블이다. 곧바로 박사장님과 전사장님 부부도 내려와 모두 앉으니 정장을 차려 입은 웨이터가 다가와 음료 주문을 받는다. 메뉴는 해산물을 시키기로 하고 화이트와인 카리칸테를 시키기로 했다. 음식을 주문한 뒤 주위를 둘러보니 한껏 차려 입은 부부와 연인들이 대부분이다. 단체나 가족은 별로 없다. 이미 와인을 마시고 기분 좋게 취해 속삭이는 부부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가득하다. 또 사랑스러운 시선을 떼지 못하고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한 손을 꼭 잡고 와인을 마시는 연인도 있다. 이 호텔은 남자가 여자의 마음을 빼앗기 위한 최적의 장소인 것 같다. 팔레르모에서의 첫날 밤은 사랑이 넘치는 빌라 이기에아 레스토랑에서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우리 네 부부도 그 분위기 속으로 빨려 들어 갔다.
마피아와 맞선 두 검사
다음날 일어나 아침식사를 마치고 로비에 내려가니 가이드가 기다리고 있다. 오전 일정은 팔레르모의 가장 오래된 카포마켓Capo Market 투어다. 이 시장의 기원은 중세의 무슬림인 사라센이 통치했던 9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시칠리아 전통음식을 이곳 시장 좌판에서 맛보는 것이 필수 코스라고 한다. 아내와 재래 시장에 갈 때마다 시장 음식을 즐겨 먹는 나로서는 기대가 되었다.
시장에 가는 동안 길가의 건물 한 면 전체에 두 명의 사람 얼굴이 그려져 있어 가이드에게 누구인지 물어보았다. 1990년 전후 마피아의 대대적인 소탕을 지휘하던 두 검사 조반니 팔코네Giovanni Falcone와 파올로 보르셀리노Paolo Borsellino라고 한다. 당시 마피아와의 싸움에 앞장섰던 두 검사라고 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나도 오래전에 신문에서 얼핏 읽은 적이 있는 듯하다. 버스에서 잠시 내려 사진을 찍기로 했다. 이들은 수백명의 시칠리아 마피아를 기소하여 1986년 2월 10일부터 1992년 1월 30일까지 약 6년간 재판이 진행되었다. 그 재판의 규모가 엄청나서 막스Max 재판이라고 불리는데 오랜 재판 끝에 마피아 보스와 조직원 707명 중 476명이 유죄 판결을 받게 되고, 총 2,150년의 형량이 선고되었다고 한다.
그후 팔코네 검사는 팔레르모에서 일어난 차량 폭탄 테러로 경찰 경호원 5명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재판 결과에 대한 마피아의 보복이었다. 두 달 후 보르셀리노 검사도 뒤따라 폭탄 테러로 사망하게 된다. 이후 이탈리아 국민들은 마피아들의 잔혹한 행동에 큰 충격을 받았고, 이는 사법당국의 대대적인 조직원 검거 작전으로 이어졌다. 이들 두 검사의 헌신과 용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었으며 시민들이 그들을 기념하기 위해서 그렸다고 한다. 여기에 오기 전의 시칠리아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감이 부끄러웠다. 마피아 소탕 작전에는 철인과 같은 용기를 발휘했지만 온화한 미소를 가진 두 의인의 명복을 빌며 다시 버스에 탔다.
조반니 팔코네Giovanni Falcone 검사와 파올로 보르셀리노Paolo Borsellino 검사를 기념하는 벽화가 그려진 건물
카포마켓의 스트리트푸드
버스에서 내려 조금 걸으니 카포마켓이다. 이 시장은 팔레르모 시내에서 가까운 몬테디피에타Monte di Pieta 지역에 위치해 있는데 여기에서 판매하는 물건들은 다양하다. 생선, 육류, 야채를 비롯한 신선한 식재료와 수제 옷과 가방도 판매하고 있는데 분위기가 매우 활기차다. 손님과 가계주인 사이의 흥정을 지켜보니 재미있다. 큰 소리로 호객을 하는 어물전 아저씨는 눈부신 금발에 푸른 눈이다. 아그리젠토에서 만난 가이드처럼 노르만의 후예인가 보다. 전체적으로 우리나라의 전통시장과 비슷한 모습인데 다른 것이 있다면 다양한 허브 종류와 향신료다. 아무튼 요리에 필요한 재료는 모두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이 시장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스트리트 푸드를 맛볼 수 있다. 팔레르모의 전통적인 음식이 대부분인데 가판대가 즐비하다. 가이드에 따르면 이 곳에는 파넬레와 병아리콩 튀김을 곁들인 전통적인 팔레르미탄 샌드위치가 유명하며 이 외 다양한 진미를 맛볼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즐비한 가판대를 지나면서 한 군데 자리를 잡고 앉았다. 파넬레, 튀긴멸치, 홍합, 오징어 튀김 등을 시켜 가판대 옆에 놓인 긴 의자에 함께 앉아 먹었다. 우리나라의 시장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맛도 훌륭했다. 가이드는 시칠리아 전통 와인인 마르살라Marsala를 함께 맛보는 것을 추천했는데 오전부터 취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가벼운 맥주를 주문했다. 마르살라가 어떤 와인인지 궁금해서 조금만 맛을 보니 새콤달콤한데 괜찮다.
카포 시장Capo Market의 스트리트 푸드
옆자리에 30대 중반 쯤 되어 보이는 동양인 여자 혼자 음식을 먹고 있었는데 한국인 같지는 않다. 이탈리아의 외국인 입국 금지가 해지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어서 시칠리아에 온 이후 동양인을 거의 보지 못했다. 어디에서 왔는지 물어보니 대만에서 어제 왔다고 한다. 혼자서 여행을 자주 다니는데 지난 3년간 굉장히 답답했다고 한다. 팔레르모에서 타오르미나까지 보름간 여행할 계획이라고 한다. 나는 우리 일정은 팔레르모가 마지막 행선지라고 말해주었다.
'원래 우리 일정도 같은 방향이었는데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반대로 바뀌었어요.'
'로마나 디 카살레가 정말 놀랍죠?'
그녀는 우리와는 달리 시칠리아에 대해 많은 것을 미리 공부하고 온 것 같았다.
'네, 시칠리아는 그 곳이 아니더라도 정말 놀라운 곳이예요. 열흘 간의 일정이 너무 짧은 것 같아요.'
'저도 많은 기대가 되요.'
시칠리아 여행을 시작하는 그녀에게는 기대감이, 마지막 일정을 보내는 우리에게는 안도감이 교차한다. 이 안도감은 돌아갈 그리운 일상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방랑이라 하겠지.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여행의 즐거움을 시칠리아에서 맘껏 누리길 바란다는 덕담을 남기고 우리는 다음 행선지로 출발하기 위해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