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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ny C Dec 13. 2023

그리스도의 계시 14

14th, 하늘 상급 13

하늘 상급


그리스도의 인정 -1st


[요한계시록 3장 4~6절]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죄악에 물들지 않은 사람]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사람[신앙의 승리자]은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인데, 나는 그의 이름을 [절대로]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지 않을 것이며, 내 아버지 앞과 아버지의 천사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시인[인정]할 것이다."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징조' 2021


그리스도를 부인하라

살다 보면 '그리스도를 부인하라'는 외압, 시험, 유혹, 의심들이 많고 이를 통틀어 '핍박'이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독생자로서의 증거'를 보이라는 사탄의 세 시험을 받으셨는데, '그가 예언된 메시아임을 부인하라는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나 거짓된 악한 영의 요구는 모두 묵살하시고 오직 '기록된 진리의 말씀'으로 꾸짖어, 그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그러나, 악한 영의 시험은 광야에서 끝나지 않았고, 주의 모든 행보와 함께하며 갖은 방법들로 괴롭혔습니다. 

고향 나사렛 사람들을 선동했고, 주님의 모친과 형제들에게 인간적 감정과 판단을 일으켜 주께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들이 모세의 율법을 들이대며 주를 시험했으며, 큰 기적을 보이셨을 때는 유대 군중들의 탐욕을 부채질해서 마음을 상하게 했습니다. 주께서 십자가에 오르실 때가 이르렀을 때는, 주의 제자들을 흔들어 십자가를 지지 못하도록 말리게도 했으며, 주님의 마음에 사망에 대한 두려움을 심기까지 했습니다. 주께서 잡이실 때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며 다 도망쳤으므로, 그리될 것을 미리 아셨음에도 큰 외로움을 느끼셨을 겁니다.


악한 영이 광야에서 40일을 굶주린 주님의 허기를 시험거리로 사용한 것처럼, 하나님 독생자의 마음에 공포와 외로움을 심은 것처럼, 이 땅의 하늘 권세를 가진 그것은 주님의 제자들에게도 시험을 계속했습니다. 

부자 청년은 가진 재산을 버리지 못해 그리스도를 떠났고,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이 소중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했으며, 가룟 유다는 민족적 사명감과 재물 때문에 예수를 팔았습니다. 베드로 마저 주께서 지실 십자가의 길을 훼방했고, 주께서 잡히실 때는 다른 제자들과 같이 도망하기에 바빴습니다.

주께서 부활하신 후에는, 도마에게도 믿음을 시험했고, 여러 제자들을 낙담시켜 생업으로 돌아갈 마음을 품게 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성령이 임하실 때까지 예루살렘에 남아 있으라' 하셨습니다.


초대 교회 때에는, 로마 제국이 성도들을 잡아들이며 사도 야고보를 죽였고, '그리스도를 부인하면 살려준다는 협박'에 여러 성도들이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전도 여행에서는, 사도 바울과  바나바, 마가 사이에 다툼을 일으키기도 하고, 헬라 우상 숭배자들의 모함도 있었고, 거짓 은사를 추구하면서 타락해 가는 고린도 교회를 보면서 바울의 심장을 졸이게도 했습니다.

유대인의 '율법주의'나 니골라의 '율법폐기론' 같은 각종 이단들이 교회에서 싹을 틔웠고, 그것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면서 그에 속은 성도들은 큰 시험에 흔들렸습니다.

헬라 종교는, 그들의 이권을 위해서 사도들과 성도들을 탄압했고, 헬라 철학은 교묘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에 거짓 교리들을 심어, 성도들의 입으로 '진리가 아닌 허상'을 말하게 하고, '그리스도를 부인'하도록 집요하게 부추겼습니다.


3백여 년이 지나서는 로마 교회에 '권력과 재물'을 주어 썩게 했고, 타락한 교회 지도자들에게 '세속 권력자의 영광'까지 더해서, 교회는 그리스도 앞에서 화려한 오물통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를 주께서는 '회칠한 무덤'이라 표현하셨습니다.

그 교회는 거룩한 성경을 철창에 가두어 성도들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바닥에 이르도록 했고, 그에 이어서 초대교회에서부터 잘 가꾸어온 '이단사상들을 잘 섞어서 많고 다양한 거짓 해석들을' 유포했습니다. 

그 결과는 '말씀에 있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찾지 못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2000년이 넘도록 악하고 더러운 영은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의 권위와, 신앙의 교리와, 성도들의 믿음을 시험하면서, 성령께서 좌정하신 교회를 마치 '거짓된 영에게 사로잡힌 교회의 지도자들이 주인이라도 되는 듯 행세하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이름과 교회의 이름으로 벌어진 전쟁과 피의 역사가 온 2천 년을 잠식해 버렸고, 교회의 권세는 지상 왕의 권력과 때론 타협하고 때론 대립하면서 부와 권력을 유지해 왔습니다.


거짓말하는 악한 영의 계획대로 그렇게 되고서는,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부인하도록 강요하지 않았고, 믿음을 버리지 않아도 내버려 뒀고, 예배와 기도 생활을 꾸준히 해도 상관 없다는 듯 오히려 권장했습니다. 

그러나, 성도가 지상에서 누릴 복된 삶을 위해 '재물과 권력을 사랑'하게 했고, '세상의 성공과 자아 성취에 매진'하게 했으며, '인간 본연의 이성, 지성, 사상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분석하고 판단'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다름 아닌 교회 지도자의 목소리로 그것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바울의 '디모데 전서 6장'을 통해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 하셨습니다. 


교회의 일상 가운데서 가끔 이 말을 교우 몇 사람에게 해 봤습니다. 그들의 바뀐 눈빛은 아직 세상을 모르는 사회 초년생을 보는 듯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다시 보라'면서 요셉과 다니엘의 일화를 중심으로 아브라함과 다윗이 누린 풍요를 언급했고, 신앙으로 성공해서 세계적인 재벌이 된 이들을 언급했습니다. 

즉, 아브라함과 그의 일족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풍요와, 다윗과 그의 왕가가 누린 영광을 받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기뻐하는 자라는 증거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재물과 증거를 받기 위해 하루에 몇 시간씩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과, 선진들이 걸어간 좁은 길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게 감추어 버립니다.


또한, 요셉이 자신의 형들에게 버림을 받아 이집트에서 죄인이 되고 종이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이집트 권력의 2인자로 세우신 것과, 다윗이 초대왕 사울의 핍박을 견뎌내고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으로 세우심을 받은 것과, 다니엘이 바벨론의 강압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 권력의 정상에 오른 것을 묵상하며,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인내하며 자아성취를 이루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고독한 인내', "내 양을 치라"는 명에 따른 '구제와 양육'에는 관심 가지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 말들에 아무 대꾸도 못했지만, 주께서 들으시고 아파하실 것은 의심 없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으로 또한, 그와 같이 '하나님의 축복만을 추구하는 교회'에 대한 통찰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으며, 세상을 복되게 하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지킨다는 지상의 교회가 정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는 교회인지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교회의 이름으로 수많은 거짓말을 쏟아내며 민중을 속여왔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이름으로 벌어진 약탈과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민중의 피가 흘려졌는지?, 그 역사가 지금도 되풀이되고 있는데, 그런 교회가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는 거룩한 교회가 아니지 않으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 구원의 성취'에는 아무 사람의 노력이나 행위도 개입될 수 없었지만, '단지 믿는다는 선택만으로 구원을 받은 자는 주께서 먼저 행하신 그 사랑을 교회와 성도의 삶에서도 실천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정치 사회 외교적인 면에서도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실천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다 재물을 더 잘 섬기는 약한 성도들의 입에서 스스로를 판단하는 말들이 나오는 것을 보고, 많이 당황했었습니다. 내게도 그런 약한 모습이 분명 있을 텐데,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무척이나 무서웠습니다.


분명 틀린 말이 아니며, 필자 역시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서도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고 사랑을 실천하라는 권유가 많습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도, 남유다도, 로마 치하의 유대인도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 어느 하나도 하나님의 공의를 바로 세우고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어렵기만 한 것이 지상 교회의 현실입니다. 다시 말해, 통찰력을 발휘해 판단하기에 앞서, 나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판단에서 부인으로

그런데, 그에 앞서 '그런 주장을 누가 하고 있는지'도 무척 중요합니다. 

당연히 주장하는 자는 자기만의 정당성을 가지고 하는 것이겠지만, 그러나 본인의 그 주장이 '주님의 판단인지, 사람의 주장인지, 악한 영의 훼방인지를 분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주님의 판단 이외의 것들이 '회개할 것이 많은 자가 성령님의 거룩한 교회를 정죄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경우를 민수기 20장에서 찾을 수 있는데,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라는 모세의 호통이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전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거룩하게 세우신 이스라엘을 반역자로 낙인찍어버리는 믿음 없는 행동'으로 보셨고, 결국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채 광야에서 죽은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출애굽 1세대가 광야에서 죽어진 그 죽음에 함께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예표이기도 했습니다. 

즉, 교회를 판단함에 있어서 가장 먼저 잊지 말고 또 주의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그들 모두를 위해서 십자가의 제물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의 탈을 쓴 사탄의 회에 대해서 성경적이고 명확한 판단은 아주 절실합니다. 그러나, 그 판단하는 자가 성령께서 내주 하시는 성전 된 자가 아니거나, 그 판단받는 교회가 연약하지만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라면, 혹시 그 판단하는 자가 교회나 성도라 할지라도 결국에는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악한 영이 파놓은 함정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에 대한 통찰과 분별력을 가지는 데 있어서는, '주님의 교회를 향한 판단인지?, 참된 교회에 회개와 성찰이 있는지?성도가 스스로 반성하고 돌아보는 회개인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교회라는 탈을 쓴 사탄의 회의 거짓 속임수를 분별할 수 있고, 또는 세속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판단하는 실랄한 비평, 비난, 정죄에 대한 정직한 인정 또는 합당한 변호를 할 수 있고, 악한 영의 훼방에 대한 필요한 판단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근본적으로 교회에 대한 판단은 '오직 성부 하나님의 독생자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이신 성령님만 하십니다. 그분의 판단과 권유와 경고를 받은 교회는 '오직 성령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회개할 것을 찾아 바로잡는 성실한 믿음을 보이는 것이, 무엇이든지 판단하기에 앞서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판단은 통합으로 & 인정은 하나됨으로

아울러서, 각종 이단 사상에 중독된 거짓 교회나 인본주의 사상들도 똑같은 주장들을 합니다. 로마 가톨릭이나 각종 이단 교회들 또는, 교회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교회가 그런 주장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키는 바른 교회의 분열을 조장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 주장과 판단을 물려받은 우리 세대의 실태를 보면, 인류 역사상, 대부분의 전쟁 명분이 '종교차이'에 있고, 여전히 세계 각지에서 종교 분쟁과 전쟁들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에 '세계 종교를 모두 통합해야 한다는 터무니 없는 시도'가 지금 우리들 앞에 있습니다. 

그런 비현실적이고 극단적인 이상만을 추구하는 시도는, 19세기 헬레나 블라바츠키를 중심으로 설립된 신비주의적 밀교 '신지학[Theosophy]'에서 처음 주장된 것으로 압니다. 

그에 이어서, 그 주장의 주체가 된 것이 로마 가톨릭 중심의 WCC [World Coucil of Churches]라는 주장이 있고, 아니라는 주장들도 난립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가 있는 것은 분명하고, 그 목적은 기독교를 저격하는 것이며, '기독교의 유일신은 창조주가 아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신성과 사람의 인성을 겸하여 가진 구세주가 아니다. 교회의 주인은 성령이 아닌 사람이다.'라는 것 말고는 없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불교의 부처도 신이고 이슬람의 알라도 신이면서, 아후라 마즈다나 심지어 사탄까지 포함해서 세상의 모든 신은 그 신격을 동등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자연물이든 귀신이든 종교로 인정이 되면 '모두 동일한 신'인 것으로, 그 신격은 사람의 인정만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유일신 여호와 역시 그것들 중의 하나가 되며, 그것들은 모두 '크거나 작은 세속 일들의 명분과 동기를 제공하는 존재로써의 기능'만 가지고, '인간 능력만으로, 즉 철저한 통제로 지상에 온전한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것들을 섬기는 오직 몇몇 특권층만이 인류역사를 주도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것입니다.

즉, 계시록에서 언급된 세상 마지막 때의 모습입니다. 기독교는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고, 세계 평화를 위해서라면 하나님이 있든 없든, 죽었든 살았든 알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편, 이것이 무엇이 문제가 되는지 모르는 이가 많은데, 직설적으로 말해서 '모든 것을 통합한다는 사상'을 달리 표현하면, '모든 다양한 것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통합만이 인류 평화를 위한 유일한 가치체계라는 사상'은, 결국 공산주의, 파시즘, 나치즘 같은 전제주의 사상들의 뿌리이며, 그런 체제의 독재를 지속하기 위한 탄압과 암살과 학살을 마음대로 저지를 수 있는 사상적 명분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그런 시도가 성공한다면, 이전 세기에서 경험했던 피의 역사를 우리 세대 또는 우리 자녀 세대에서 또다시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는 사람의 능력만으로 세계평화를 이룩할 수 있는지?를 그들에게 심각하게 물어보게 되고, 그렇게 타락하는 역사 속에서 정당하게 강요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됨

또는, 철학이나 과학 같은 각종 인본주의 학문이 신학에 던지는 판단과 정죄도 있습니다.

철학의 형이상학적 고찰에 의하면, '세상은 이원론 또는, 다원론적 세계질서의 흐름이 있어서 유지되므로, 절대 이성의 유일신이란 존재는 있을 수 없다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한편으로는, 신플라톤주의, 절대 신 개념의 일자[the One]와의 신비적 합일을 주장하는 철학도 있는데, '인간의 각성으로 신비적 합일에 이른 도덕과 윤리는 완전한 선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상입니다. 

오래전 기독교회는 그 종교철학을 기독교리에 수용했는데, 그러나 그 관점으로 전쟁의 역사를 살피면 교회가 세상을 전쟁과 피로 물들였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때문에 교회는 신비적 합일에 이르지 못했고, 앞으로도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기독교회가 숭배하는 신은 '절대신일 수 없다'는 결론을 맺게 됩니다. 

그에 따르는 철학적 판단은, 신학이 아닌 철학만이 신비적 합일에 도달할 수 있고,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이성으로 절대신의 신비를 판단할 수 있다는 경향'이 철학에 있는 것입니다. 

과학분야 역시 고대 철학에서 기원하므로 크게 다르지 않은 견해를 가집니다.


결국, 기독 교회가 그 견해를 수용한 것도 문제가 되었지만, 그러나 비성경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벽을 쌓아버린다면, '그리스도의 복음은 누구를 위한 것이 되는지?', 그 방향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즉, '무분별하게 받아들일 수도 없고, 편협하게 단절할 수도 없는 세속의 견해들을, 교회는 어떻게 수렴할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일한 진리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진리로 품어야 할 것을 정죄하고 배척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보내신 곳이 '이스라엘의 대적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였다는 것'과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잊지 말고, '선한 이에게나 악한 자에게 차별 없이 해를 비추고 비를 내리시는 분이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되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이상의 실현은 불가능한 것으로 확실시되지만, 그 실현의 여부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증인 된 자의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에큐메니컬 운동과는 상반되는데, 그 차이는 '통합이냐 아니면 인정이냐'라는 것으로, '통합'은 '다양성을 배격-탄압하는 것'이고, '인정'은 '다양성의 인정과 존중이 있는 하나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교회는, 초대교회로부터 이어져온 순교자들의 신앙과 같이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지식과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다른 견해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모범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의 영이 지배하는 이단과 타락한 교회의 주장이야 그리스도께서 광야 시험을 말씀으로 이기셨던 것처럼 교회도 말씀의 진리를 지키면서 이겨낼 수 있고, 그 승리를 통해 주께 한걸음 더 나아가는 성장과 성숙을 기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낸 주님의 편지와 같은 성령님의 권유와 경고는, 교회와 성도가 반드시 귀 기울여 회개하고 돌이켜야 할 것입니다. 그런 반성과 성찰과 회개가 없는 교회는 결국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것이 명백하고 단순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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