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 이탈리아 여행의 첫번째 도착지는 로마였습니다.
기대하고 계획한 만큼 다 보지는 못했습니다. 2000년 이상의 시간이 고스란히 녹아져 있는 로마를 단 며칠만에 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지요. 로마는 고대부터 중세, 그리고 르네상스 및 근대에 이르기까지 도시 전체가 각 시대별 역사가 마치 잘 버무러진 가운데서도 2000년 이상의 시간으로 숙성이 된 느낌이었습니다. 저희도 그 시간을 두고두고 기억과 추억으로 우려가려고 합니다.
이번 포스팅은 우리 부부가 로마를 여행한 순서에 따라 기록하려고 합니다. 내용이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 로마 여행은 몇 번에 걸쳐서 나누어 게시하겠습니다. 참, 그리고, 바티칸 박물관과 보르게세 미술관은 별도로 정리하겠습니다.
자, 로마 여행 이제 시작하시죠!
로마 도착 다음날, 우리 부부는 시차 적응이 되지 않아 새벽부터 길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트레비 분수를 비롯한 주요 관광지들은 워낙 사람들이 많아 새벽에 가서 봐야 제대로 된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들어서이기도 했죠.
그런데, 새벽에 길을 나선 로마는 날씨가 제법 추웠습니다. 다시 호텔로 돌아와 단단히 무장을 하고 나섰습니다. 한국 날씨를 생각하고 봄/여름 옷을 많이 가져왔는데, 한번도 입지를 못하고, 오히려 혹시나 해서 가져온 파카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구글 맵을 켜고 찾아나선 트레비 분수로 가는 길에는 이른 새벽부터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새벽 길 추운 날씨에 출근 길의 로마 시민들은 두꺼운 외투에 몸을 움추리며 빠르게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한편, 저희처럼 구글맵을 보면서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호기심에 젖어 두리번 거리는 관광객들도 보였습니다.
구글 맵을 들고 골목길을 돌아돌아 찾아 온 첫 감동은 트레비 분수였습니다.
새벽 빛이 아직도 선한 트레비 분수에는 벌써부터 관광객들이 모여 있습니다. 한 20년 전에 로마에 왔을 때는 트레비 분수가 공사중이여서 보지 못했는데, 가까이서 본 트레비 분수는 정말 아름다왔습니다. 트레비 분수의 배경이 되는 팔라조 폴리 궁전을 포함해서 규모는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웅장하고 커 보였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균형과 조화, 그리고 세심한 디테일이 놀라웠습니다.
※트레비 분수의 조각상에 대하여는 각 문헌/사이트마다 다르게 설명하고 있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정중앙에 서 있는 조각상을 넵튠(포세이돈)이라고 설명되어 있는 사이트도 있으나, 뽀미아빠는 리서치 한 결과 오케아노스로 판단했습니다. 하기 정보에 대한 정확성 여부는 이웃님께서 직접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트레비 분수는 당초 우르반 8세 교황이 당시 유명한 조각가인 베르니니에게 새로운 분수의 설계를 요청했다가 교황이 세상을 떠나면서 중단된 것을, 1730년에 클레멘스 12세가 공모전을 통해서 건축가 니콜라 살비(Nicola Salvi) 의 디자인 안이 채택되면서 1732년에 착공되었다. 그러나, 니콜라 살비가 처음부터 이 공모전에서 우승했던 것은 아니고, 피렌체 출신 건축가인 알렉산드로 갈릴레이 (Alexssandro Galilei)가 우승했으나 로마 시민들이 로마 출신 건축가가 설계를 맡아야 한다는 탄원에 니콜라 살비의 설계안이 최종 채택된 것이다. 그러나, 니콜라 살비는 트레비 분수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으면서 건축가 주세페 파니니(Giuseppe Pannini)가 뒤를 이어 1762년 완공했다.
트레비 분수는 그동안 세 차례에 걸쳐 보수,복원을 거쳤는데, 2013년에 트레비 분수의 복구를 위하여 패션회사 Fendi로부터 220만 유로로 지원받았다. 2014년에 착공한 복구공사는 2015년 11월에 완료하였고, 복구 공사를 지원한 Fendi는 2016년, 트레비 분수를 배경으로 창립 90주년 패션쇼를 개최한 바 있다.
하늘의 신 우라노스와 대지의 신 가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12명의 아이들 중 장남으로 태어난 대양의 신 오케아노스(Oceanus)가 트레비 분수 정 중앙에 우뚝하게 자리하고 있다. 오케아노스 오른쪽에는 항아리 물을 흘려 보내는 풍요의 여신이, 왼쪽에는 잔을 들고 있는 건강의 신이 오케아노스를 보좌하고 있다. 당초 니콜라 살비의 계획은 트레비 분수 수로를 발견한 아그리파와 물을 찾는 로마 병사들에게 수원으로 안내한 처녀 트리비아 조각상을 만들려 했던 것이었는데, 니콜라 살비를 이어서 트레비 분수를 완공한 주세페 파니니가 현재의 조각상으로 바꾼 것이라고 한다. 오케아노스를 조각한 피에트로 브라치 (Pietro Bracci)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티탄 신족 (the Titan) 을 묘사하는 전형적인 특징과 다르게 조각함으로써 흔히 넵튠(포세이돈)과 혼동을 하는 경우가 있다고.
아래쪽으로는 바다의 신인 트리톤 (Triton, 그리스 로마신화에서 소라를 불어 파도를 불러내고 잠재우는 반인반수)이 말을 제압하면서 소라를 불고 있다.
트레비 분수의 배경 건물이 되고 있는 팔라조 폴리 궁전은 남면부 파사드를 트레비 분수와 연결시키기 위하여 트레비 분수 건축 이후 18세기에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축되었다.
다음 목적지인 스페인 광장으로 가는 길에 만난 건 이탈리아 대통령 관저인 퀴리날레 궁전입니다.
처음 이 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 곳이 그 유명한 퀴리날레 궁전인지 몰랐었습니다. 화려한 트레비 분수를 본 후에 마주한 퀴리날레 궁전은 다소 규격화되고 사무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찾아보니, 현재 이탈리아 대통령의 관저로 이용되고 있는 퀴리날레 궁전과 광장이었던 거죠.
당초 퀴리날레 궁전은 작은 빌라를 15세기에 재건축해서, 그 이후 지속적으로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리고 건물의 기능에 따라 확장하고 보완하고 개선을 해온 건물입니다. 그리고, 궁전 앞에 우뚝 선 오벨리스크는 이집트에서 건너와 고대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성묘 앞에 서 있던 것을 1700년도에 퀴리날레 광장으로 옮겨온 것입니다. 고대와 중세, 그리고 르네상스가 이렇게 잘 어울릴 수 있을까요? 조상 잘 만나서 호강하고 있다기 보다는, 시간이 흘러도 지속될 수 있는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관리하고 다시 창조하는 이탈리아 로마가 Eternal City라고 불리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퀴리날레 궁전은 대통령 집무실 등을 제외하고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어 있다고 합니다.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아주 많은 곳은 아니라서 예약까지는 안 해도 되고 티켓은 현장 구매가 가능합니다. 저희는 궁전 방문은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고, 내부는 보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주변은 약간 어둡습니다.
현재 이탈리아 대통령의 관저로 이용되고 있는 퀴리날레 궁전은 제 22대 교황 그레고리오 13세(Gregor XIII, 1502~1585)가 사비를 들여 건축가 Ottaviano Mascarino에게 요청, 기존의 작은 빌라를 재건축한 건물이다. 그레고리오 13세 서거 이후, 식스투스 5세 (Sixtus V, 1585-90)는 이탈리아 건축가 도메니코 폰타나(Domenico Fontana, 1543~1607)에게 지시하여 궁전의 정면 파사드를 포함하여 해당 건물과 정원을 확장 재 건축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식스투스 5세 사후에 완성 되었다.
이후 퀴리날레 궁전은 교황 거주지나 교황령 관리가 일하는 곳으로 쓰였으며, 1823, 1829, 1831, 1846년에는 퀴리날레 궁전에서 차기 교황을 선출하는 추기경들의 모임, 콘클라베(conclave)가 열린 바 있다. 1871년 이탈리아 통일 왕국이 피렌체에서 로마로 수도를 옮기면서 퀴리날레 궁전은 이후 이탈리아 국왕들의 거처로 쓰였고, 1946년 군주제 폐지 이후에는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고 있다.
퀴리날레 궁전은 관저, 대예배당, 18세기에 조성한 정원 등 여러 공간이 있으며, 대예배당은 스위스 출신 카를로 마데르노(Carlo Maderno, 1556~1629)가 디자인을 맡았다. 궁전 입구 앞에는 있는 오벨리스크(obelisk)는 당초 아우구스투스 성묘(Mausoleum of Augustus) 입구에 서 있던 두 개의 오벨리스크 중의 하나로 1786년에 교황 피오 6세 때 퀴리날레 광장으로 이전된 것이다.
로마의 7개 구릉(Seven Hills of Rome) 가운데 가장 높은 퀴리날레 구릉(Quirinal Hill)에 자리 잡았다. 퀴리날레라는 이름은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 퀴리누스(Quirinus)에서 유래되었다.
(출처 : https://palazzo.quirinale.it/storia/storia_en.htm, https://ancientromelive.org/)
퀴리날레 궁전을 지나서 스페인 광장까지 걸어왔습니다. 이제 어둠이 거의 걷히고 날이 밝았지만, 아직 이른 시간이기에 관광객이 많지는 않네요. 로마의 휴일에서 유명한 장면 중의 하나였던 곳이라 결혼을 앞둔 신랑 신부가 스페인 광장을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찍습니다. 봄과 여름에는 이 계단이 꽃으로 가득하다고 하는데, 4월 중순이 다 되도록 바람이 부는 추운 날씨가 계속되면, 화사한 꽃 볼일은 없을 것 같아 아쉬웠습니다.
성당을 바라보고 스페인 계단 오른편에 영국의 유명한 작가이자 시인인 키이츠와 셸리 박물관 (Keats-Shelley Momorial House)가 있었네요. 당일에는 스쳐 지나갔던 건물인데, 로마에서는 건물 하나라도 모두 박물관이고 기념관이니 그냥 지나칠 수 없겠습니다.
스페인 계단 왼쪽에 있는 건물 1층에는 1893년에 오픈한 배빙턴 티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1950-60년대에는 엘리자베스 테일러, 리차드 버튼, 오드리 헵번, 페데리코 펠리니 등 유명인사가 드나들었던 영국식 찻집이라고 합니다. 이른 아침에 아직 문이 열리지 않아 그냥 지나쳤네요.
로마 3대 카페라고 하는 카페 그레코도 이 주변에 있는 데, 역시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관계로 다음을 기약하였습니다.
17세기에 바티칸 주재의 스페인 대사관이 위치해 있어 스페인 광장이라고 불린다. 스페인 계단을 올라다가 보면, 삼위일체 성당 (Trinita dei Monti)이라는 작은 고딕 양식의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이 성당 옆에 유적지로 보이는 큰 건물이 바로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이 소유한 메디치 빌라이다. 지금은 프랑스 아카데미가 사용하고 있다.
언덕 윗동네를 차지하고 있던 프랑스인들이 스페인이 차지하고 있는 아랫동네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계단을 만들고 중간에 태양왕 루이 14세의 기마상을 설치하려고 했으나, 로마인들이 못마땅해 하면서 계단은 위와 아래의 두 지역을 연결하는 정도로 정리되었다.
스페인 광장 한 가운데에는 바로크 시대의 천재 조각가였던 베르니니와 그의 아버지가 만든 조각배 <바르카치아 (Barcaccia)> 분수가 있다. 바르카치아는 '물이 새는 쓸모 없는 오래된 배'라는 뜻으로 배가 반쯤 물에 잠긴 채 물이 새는 모습을 하고 있다.
※ 참고문헌 : 김상근 교수, 《나의 로망, 로마》
스페인 광장을 거쳐 나보나 광장으로 이동했습니다. 호텔에서 이곳까지 오는 내내 우리 부부는 고대로마와 중세, 그리고 르네상스를 걸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걷는 거리 거리가 모두 우리의 로망, 로마였습니다. 아직 이른 시간이여서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가게들이 많았고, 거리는 많이 붐비지 않았습니다.
나보나 광장은 원래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만든 경기장 터 위에 세워졌다. 기원후 80년 착공된 이 긴 타원형의 경기장이 지금의 나보나 광장의 지하에 묻혀 있는 것을 보면 약 2000년의 세월 동안 로마의 지표면이 많이 상승했다는 사실이다.
나보나 광장은 16세기부터 로마 시민들을 위한 시장으로 활용되었다. 원래 로마인들은 캄피돌리오 광장에서 물건을 사고팔았는데,미켈란젤로가 그 광장을 새롭게 단장하면서 나보나 광장이 이를 대체하게 된 것이다.
나보나 광장을 가문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도리아 팜필리 가문은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를 배출한 로마의 명문가이다. 팜필리 가문의 저택은 지금도 나보나 광장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현재는 브라질 대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나보나 광장의 최대 명물은 거대한 오벨리스크 주변에 세워져 있는 베르니니의 '4대 강의 분수'이다. 인노켄티우스 10세 교황은 공모를 통해 나보나 광장을 장식할 조각가를 찾고 있었는데, 교황의 조카 사위였던 니콜로 로도비시가 베르니니를 설득하여 분수 조각의 모형을 만들어놓게 했다. 우연히 베르니니의 모형을 본 교황은 작품의 예술성에 크게 감동받고, 즉각 제작을 의뢰하게 된다. 베르니니의 분수 조각은 1651년에 완성되어 일반에게 전시되었다.
베르니니가 바로크의 역동적인 자세로 의인화하여 조각한 4대 강은 아시아의 갠지스강, 라틴아메리카의 플라타강, 아프리카의 나일강, 유럽의 다뉴브강이다. 이 강들은 교황의 영적인 권위가 미치는 세계를 상징한다. 갠지스강은 항해가 가능하다고 해서 노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조각되었고, 나일강은 수원지를 알지 못한다는 의미로 천으로 눈을 가리고 있으며, 플라타강은 은화동전 위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리고 다뉴브강은 팜필리 가문의 상징인 올리브 가지를 물고 있는 비둘기를 경배하는 것처럼 손을 뻗은 자세를 취한 남성으로 조각되어 있다.
4대 강의 분수 한가운데에는 이집트 아스완에서 가져온 화강암으로 만든 오벨리스크가 우뚝 솟아있다. 이 거대한 오벨리스크의 재료는 이집트산이지만 오미티아누스 시대에 만든 '짝퉁' 오벨리스크이고, 원래는 이시스 신전과 세라피스 신전에 전시되어 있던 것이다. 베르니니는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와 형 티투스 황제를 신격화하고 자신의 치적을 기록으로 남긴 이집트 신전의 장식물을 나보나 광장으로 옮겨서 4대 강의 조각을 완성했다.
나보나 광장까지 걸어서 오다 보니, 춥기도 하고 아침을 먹지 못하고 나왔다는 게 생각이 났습니다. 어디서 뭔가를 먹고 싶은데, 아직 8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라서 문 연 가게가 거의 없네요.. 더군다나 유명 관광지 주위는 값만 비싸고 맛은 없다는 얘기를 들어서인지, 선뜻 들어가지지도 않습니다. 문 연 가게를 찾아 골목길을 다녔지만, 마땅치 않았어요.. 그러다 포기하고 호텔로 돌아가야 하나 망설이는 차에, 저는 작고 예쁜 커피집을 발견했습니다.
카푸치노 두 잔과 크로와상 2개를 시켰습니다. 오우~~너무 맛있습니다. 이탈리아 커피가 이런 거구나 싶었어요. 우리나라에서도 흔하게 보이던 Lavazza 원두를 사용한다고 적혀 있었는데, 서울에서는 이런 맛이 아니였거든요. 정말 진한 된장 국물을 들이마시듯 먹었습니다. 얼마나 구수하고 고소하던지~~
이제 따뜻한 커피와 달콤한 크로와상으로 추위와 배고픔을 채웠으니, 다시 진도를 빼기로 했습니다. 한참을 골목길을 돌아 걸어들어다보니, 또 하나의 사각형 광장이 나오면서 눈에 익은 큰~ 건물이 나왔습니다. 저도 모르게 아~! 라는 감탄사가 바로 나오더군요.
그런데, 떡 벌어진 늠름한 위용을 보이는 판테온은 광장입구에서는 기대했던 것 만큼 커보이지는 않았고, 다소 작은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생각보다 아담한데...? 그러다 판테온 입구쪽으로 다가서니.. 건물이 커지기 시작하는 겁니다......판테온 입구 바로 앞에 서 보니, 정~말 거대하더군요.. 멀리서 보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규모였습니다... 아래 사진을 자세히 보시면, 오벨리스크에 서 있는 사람들의 크기와 판테온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크기가 두 건물 사이의 거리와 비교하여 차이가 더 크게 나 보이실겁니다. 그러구 나서 자세히 보니, 판테온이 자리한 곳과 오벨리스크가 자리한 곳 사이에 생각보다 높은 경사가 있었어요. 하지만 바닥은 경사진 것으로 보여지지 않습니다. 원래부터 두 곳 사이에 경사가 지도록 만들어진 것인지, 아니면 오벨리스크 있는 장소가 지난 2000년 동안 바닥이 더 높아졌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재미있는 발견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00여 년 전에 건축되었지만, 여전히 그 위용을 뽐내면서 고대 로마 건축의 백미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판테온은 위대한 건축물의 표상으로 세계 여러 건축물에 영감을 준 것으로 유명하지요.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의 돔을 만든 필리포 부르넬레스키가 로마에서 판테온의 돔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어서 쿠폴라를 완성했다고 하는데요. 저희 부부도 판테온 내부를 들어다 보고 싶었지만, 한국에서 예매를 하려고 했더니, 이미 3개월치 예약이 차서 예매를 못하고 왔습니다. 9시가 되어가니 벌써 판테온에 입장하려는 사람들로 줄이 길어지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판테온 내부는 보지 못하지만, 판테온 주변을 돌아보았습니다.
판테온은 원래 기원전 27년부터 25년 사이에 율리우스 가문의 일곱 개 행성의 신을 모시기 위해 아그리파가 처음 신전을 건축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판테온의 정면 파사드에 "세 번째로 집정관을 지낸 루키우스의 아들 마르쿠스 아그리파가 세웠다"라는 라틴어 문장이 남아 있다. 아그리파는 자비를 들여 시내에 많은 건물을 건축했는데, 판테온도 그때 만들어졌다. 원래 베누스와 마르스를 포함하여 모든 신을 모신 신전이었기 때문에 이름이 판테온이 되었다고 한다.
로마의 역사가 카시우스 디오의 기록에 따르면 판테온은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신격화하기 위한 건물로 지어졌지만, 황제가 이를 사양하면서 대신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동상이 모셔지게 되었다.
아그리파가 건축한 판테온은 여러 차례 화재가 발생해서 유실과 재건축을 반복하다가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인 126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건축되었다. 판테온의 입구에는 거대한 이집트산 화강암 기둥 16개가 위용을 드러내며 기둥의 숲을 이루고 있다.
고대 로마 제국의 건축물 중에서 가장 보존 상태를 양호한 판테온은 로마의 생일이 되는 4월 21일, 정확하게 정오가 되면 거대한 돔 한가운데 있는 오쿨루스를 통해 태양빛이 사선으로 내려와 판테온의 출입구와 일치하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로마 황제들은 매년 4월 21일 정오에 판테온 입구에 서서 로마의 탄생을 축하하고, 자신의 정치적 권위를 우주의 조화와 일치시키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609년, 교황 보나파시오 4세는 판테온을 산타 마리아 아드 마르티레스(Santa Maria ad Martyres) 성당으로 개축하였고, 이 덕분에 상당수의 고대 로마의 건물들이 중세 시대에 겪은 파괴와 약탈 등을 겪지 않을 수 있었다.
판테온에는 37살의 젊은 나이에 열병으로 사망한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라파엘로의 무덤이 있는데, 본인이 판테온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라파엘로 뿐만 아니라, 바로크 시대의 화가 안니발레 카라치, 건축가 발다사레 페루치, 이탈리아를 통일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장남 움베르토 1세 등의 무덤이 있다.
판테온 앞 광장 분수 위에 우뚝 선 오벨리스크는 고대 이집트 제19왕조의 파라오인 람세스 2세 때 만들어진 것으로 헬리오폴리스에 있던 것을 로마로 이전하여 이시스 세라피스 신전에 갖다 두었다가 지금의 위치로 다시 옮겨졌다.
건축가 필리포 부르넬레스키가 피렌체의 두오모, 즉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돔을 만들 때 판테온의 돔 공법을 참고했기 때문에 판테온은 르네상스 건축의 모델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두오모 성당의 돔 뿐만 아니라, 전면의 삼각형 지붕에서 후면의 원형 돔으로 이어지는 구조는 성 베드로 대성당, 파리의 팡테옹,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판테온을 보고, 다시 골목길로 들어갑니다. 앗.. 길을 잃은 거 같아요.
로마여행 #2 에서 만날께요!!!
참고도서
김상근(2022), 《나의 로망, 로마》, 시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