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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한 Jul 08. 2023

【이탈리아 - 로마 여행 #2】

앗... 의도는 했지만, 의도치 않게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로마에서는 길을 잃어버리듯이 이곳저곳, 이 골목 저골목을 그냥 막~ 돌아다녀 보고 싶었습니다. 로마 전체가 역사요, 유적지이니, 길을 잃어버렸다 해도 길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겠죠. 로마에 왔다고 해서, 꼭 트레비 분수를, 꼭 콜로세움을, 꼭 판테온을 봐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2000년의 역사와 흔적을 보고 싶었던 만큼, 로마 골목골목이 우리 부부가 보고싶어했던 것이니까요.  

새벽부터 4-5시간을 걸어서 돌아다니다 보니, 겨우 오전 10시 반인데, 벌써 5개의 유적지를 보았습니다. 이제 조금 지치기도 했고 호텔로 돌아가 점심을 먹자는 생각에 판테온에서 다시 돌아가는 길에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로마에 온지 하루도 안되는데, 벌써 방향을 잡았다고 자만하고 구글맵을 켜지 않고 다닌 탓이었지요. 하여튼 방향만 잡고 골목을 다니다 보니 길을 잃었습니다.  

어딘가 싶어 구글 맵을 다시 켜고, 주위를 둘러보니, 독특한 모습의 오벨리스크와 성당을 발견했습니다....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 


산타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이였습니다. 그리고 성당 앞 중앙에는 작고 귀여운 코끼리가 등에 오벨리스크를 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쩐지 코끼리와 오벨리스크의 재질이 각각 다른 듯 합니다. 얼핏 위 아래가 따로 노는 듯 하면서도 잘 어울립니다.  성당 역시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크 양식이 아닌 고딕양식이라지요.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에 접어들면서 과거 고딕양식이었던 것을 바로크 양식으로 대부분 개축했다는 데, 이 미네르바 성당은 고딕양식 그대로였습니다.  





    이시스(Isis)는 이집트에서 신봉되는 부활의 신으로 참혹하게 죽임을 당했던 남편 오시리스를 부활시키고, 아들 호루스를 보호한 자비로운 어머니 신이기도 하다. 이집트의 통치자 파라오들은 호루스의 후손들이라 믿어졌기에, 이시스는 모든 파라오들의 어머니인 셈이다. 따라서 이시스의 여신은 통치권의 수호자로 존귀하게 여겨졌다.   

    로마인들 역시 동일한 이유로 이시스를 숭배했다. 다른 나라의 종교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입장을 유지했던 로마인들은 그리스도교가 국교로 공인되기 전까지 이집트 종교에 열광했고, 로마 시내 한복판에 이시스 신전을 지었다. 신전을 장식하기 위해서 로마 황제들은 이집트 원정에 나설때 마다 이집트에서 오벨리스크를 가져 왔다.  로마 황제들은 통치권을 수호해 주는 이집트 여신의 가호가 필요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제1차 삼두정치의 주역이었던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50년에 이시스 신전과 세라피스 신전의 터 위에 로마의 여신 미네르바를 위한 신전을 세웠다. 그리스에서 전쟁의 여신이었던 아테나는 로마로 건너와 미네르바가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로 승인되면서 성모 마리아가 미네르바를 대체하게 되었고, 13세기 도미니코 수도회가 미네르바 신전 지역 전체를 성당과 수도원으로 개조하면서 '미네르바 신전 위에 세워진 성모 마리아 성당'이라 불렀다.   

    17세기 바로크 시대 교황이었던 알렉산데르 7세는 로마의 이시스-미네르바 신전 터에서 발견된 작은 오벨리스크를 모티브로 당시 최고 조각가였던 베르니니에게 조각 작품을 의뢰하였다. 베르니니는 이집트 이교도들의 상징인 오벨리스크를 코끼리 등 위에 올려놓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조각을 디자인 했고, 이를 바탕으로 1667년 베르니니의 제자인 에르콜레 페라타가 조각했다.    

    이집트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는 태양의 광선을 상징한다. 오벨리스크는 이집트의 태양신 라(Ra)가 세상을 비추는 모습이기 때문에 끝이 뾰족한 긴 햇살처럼 표현되었다. 태양의 빛을 등에 지고 있는 코끼리는 이 세상, 즉 풍요로운 대지를 상징한다. 태양이 발산하는 빛과 온기는 생명의 기운이다. 태양 빛을 받고 생명의 기운을 얻은 코끼리가 물을 대지에 공급하면, 겨우내 얼어 있던 땅이 녹고 새로운 생명이 싹튼다. 새로운 생명의 재탄생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이루는 부활 신앙과 연결되었다. 교황 알렉산데르 7세는 이러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인 부활을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와 연결시켰다.   

※ 참고도서 : 김상근(2022), 《나의 로망, 로마》, 시공사


호텔로 다시 발길을 돌리다가, 


어느 샌드위치 집 앞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맛집이구나!. 구글 검색을 해 보니,피렌체에서 유명한 파니니 집으로 이 곳은 로마 분점이었습니다. 어차피 점심을 먹으려 했던 참이라, 우리 부부도 줄을 섰지요. 어떻게 주문할 지 몰라, 주인장 추천 메뉴를 주문하고 토마토와 모짜렐라 치즈를 추가 요청했습니다.  


오~! 맛있었습니다~ 한국 파니니 처럼 야채가 많이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독특한 빵과 터키고기의 식감이 좋았습니다. 먹고 나니 호텔로 돌아갈 이유가 없어졌어요. 다시 길을 잃어 보기로 했습니다, 이번엔 의도적으로. 

얼마 못 가 바로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이 보였습니다. 그 유명한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화가 전시되어 있다는 미술관이죠. 정~말 보고 싶었지만, 이 미술관마저 들어간다면, 로마를 다 못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역시 다음을 기약했습니다. 



앞으로 웅장한 건물을 하나 보이네요~ 걷다보니, 어느덧 조국의 제단에까지 와 버렸네요~


베네치아 광장(Piazza Venezia),

조국의 제단(Altare della Patria) 


로마 중심부에 있는 베네치아 광장은 1871년 이탈리아 통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조성되었는데, 로마 시내에서 테르미니 역과 함께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는 장소라고 하죠. 또한, 이탈리아를 통일한 이탈리아 초대 황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웅장한 기념관과 청동 기념상인 조국의 제단이 베네치아 광장 전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 사민들은 이 조국의 제단 건물을 '웨딩케익' 또는 '타자기'라는 별명으로 부르면서 폄하하고 있다고 합니다. 로마인들은 오히려 포로 로마노를 굉장히 좋아하고 자랑스러워한다지요. 그런데, 로마와 어울리지 않고 크기만 큰 조국의 제단이 로마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포로 로마노를 가리고 있다니 싫어할 밖에요. 오히려 관광객들이 좋아한답니다. 



조국의 제단은 캄피돌리오 언덕 초입에 위치하고 있어서 조국의 제단을 오른쪽으로 끼고 언덕을 올라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포로 로마노가, 왼쪽으로는 콜로세움이 보입니다. 


캄피돌리오 광장, 포로 로마노




위에서 바라본 포로 로마노는 대리석과 무너진 건물 더미가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는 모습입니다. 고대 로마의 건축 잔해가 그 역사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저희는 포로 로마노와 콜로세움, 그리고 팔라티노 언덕 유적지를 같이 볼 수 있는 입장권을 구매 했는데, 로마에 머무르는 동안 갈 수 있는 시간도 없고 날짜 예약도 되지 않아서, 이탈리아 여행 마지막날 오전에 가보는 것으로 예약 해 두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 로마 호텔이 강제적으로 취소되면서 공항 근처 힐튼호텔로 숙박지를 옮기면서 결국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ㅜㅠ.  세 곳의 유적지를 둘러보는 데만 3-4시간이 소요되는 일정이라서 여행 초반에 넣지를 못했는데, 결국 못보고 말았네요.  그래도 긍정적인 건 다시 로마로 올 이유가 생겼다는 것이죠 ~! 포로 로마노 팔라티노 언덕에 대한 공부는 다음을 기약하고 빅버스에서 들었던 내용 정도로 간단하게 소개를 하겠습니다. 


    포로 로마노는 원래 늪지대였다. 팔라티노 언덕에 모였던 풍부한 물이 아래로 흘러들었기 때문에 로마의 악명 높은 네로 황제는 이곳에 인공 호수를 조성하기도 했다. 고대 로마의 개척자들은 포로 로마노의 지하에 관개시설을 파고 들어가, 그 지역에 고여 있던 물을 인근 테베레 강으로 흘려보냈다. 포로 로마노는 여러 차례 대규모 화재가 휩쓸고 지나간 곳이다. 현재 포로 로마노의 건물들도 화마의 파괴력 때문에 불타 무너지고 재건축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형성되었다.   

    팔라티노 언덕은 '왕궁의언덕'으로 로마의 황제들이 왕궁을 지었고, 그래서 팰리스란 단어의 기원이 되는 지역이다.   


포로 로마노를 지나 천천히 올라가니,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 보입니다. 콜로세움이었습니다 ! 

콜로세움 

어느새 걷다가 걷다가 보니, 콜로세움까지 오고 말았네요~ 콜로세움을 직접 들어가보지는 못하지만, 그 자체로도 위엄과 웅장함이 느껴집니다. 콜로세움은 낮에 뿐만 아니라 밤에도 아름답다고 하지요. 내일 저녁에 야경투어가 있으니 그 때 또 다시 와 봐야 겠습니다. 


    콜로세움은 고대 로마 제국 시대에 세워진 원형 경기장이다.   

    원래 콜로세움이 위치한 곳은 주거지역이었다. 하지만 서기 64년 로마의 대화재가 일어나자 네로 황제는 현재 콜로세움이 서있는 자리, 즉 팔라티노 언덕과 에스퀼리노 언덕 사이에 거대한 황금 궁전(도무스 아우레아)과 인공 호수, 정원들을 지었다. 기존 수로들이 이 정원에 엄청난 양의 물을 공급하기 위해 거대하게 개축되었고, 궁전과 정원들은 모두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또한 궁전의 옆에 자신의 모습을 본딴 거대한 청동 거상을 지었다  

    72년 네로 황제가 축출되고 즉위한 플라비안 황조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네로의 궁전을 헐어버린 후, 그 부지에 거대한 원형 경기장을 짓기로 하고 8년 뒤 아들인 티투스 황제가 콜로세움을 완공했다. 석회암, 응회암, 콘크리트 등으로 지어졌고, 5만 명 이상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다.  콜로세움의 원래 이름은 플라비우스 원형 경기장인데, 콜로세움이라는 이름은 근처에 있었던 네로 황제의 거대 동상인 콜로서스(巨像:colossus)를 부르는 과정에서 콜로세움이라고 불러지게 되었다.  이 조각상은 후대의 황제들에 의해 태양신 헬리오스의 동상을 개조되었다가 중세 시대에도 그 예술성을 인정받아 계속 보존되기도 했다. 그러나, 로마의 쇠퇴가 진행되면서 로마 도시 전체가 하나의 채석장으로 변하자 사람들은 청동을 녹여 사용하기 위해 동상을 무너뜨려 버렸다.   

    1749년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콜로세움이 초기 기독교인들이 박해받았던 상징적인 장소였음을 주장, 이 곳을 성지로 지정했다. 그는 이 곳을 채석장으로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고 순례길을 만들어 콜로세움 전역을 성역화하고자 했다.   

    콜로세움은 수 세기 동안 계속 개축되어왔고, 로마 제국의 전성기에는 5만 명에서 8만 명의 관중들을 수용할 수 있었다. 콜로세움에서는 주로 검투사들의 결투가 이루어졌으며, 모의 해전, 동물 사냥, 신화의 재연 등 다양한 행사들이 펼쳐졌다.   

    콜로세움은 로마 건축의 기적이었다. 로마 건축 기술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아치형 구조를 도입하여 엄청난 건물의 하중을 분산시켰고, 지금도 그 튼튼한 접착력을 자랑하는 시멘트 기술을 적용하여 2000년의 긴 역사를 견뎌내는 위대한 건축물을 탄생시켰다. 콜로세움의 높이는 약 50미터이고, 긴 타원형으로 된 경기장의 가장 긴 쪽은 쿠려 188미터에 이른다. 경기장 천장에는 여름의 뜨거운 태양열을 막아주는 차양인 벨라리움이 설치되었다.   

    외벽은 층층이 쌓여있는 3개의 기둥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기둥의 열들은 층마다 그 양식이 다른데, 도리스 양식, 이오니아 양식, 코린트 양식 등 다양한 양식의 기둥들을 모두 사용하여 지었다. 2층과 3층의 아치에는 원래 신화 등장인물의 조각상들이 세워져 있어 그 화려함을 더했다.  

    콜로세움은 거대한 규모였지만, 유사시 관중들을 빠르게 대피시킬 수 있는 기능 또한 갖고 있었다. 로마의 건축가들은 관중들의 빠른 유입과 퇴장을 위한 효과적인 방법들을 고안해 냈다. 콜로세움에는 약 80개의 출입구가 있고, 이 중 76개는 일반 군중들이 사용했다. 각 출입구는 고유한 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북쪽의 정문은 황제와 귀족들을 위한 것이었고 나머지 동, 남, 서쪽에 있는 문은 로마의 엘리트층이 주로 사용하였다. 4개의 주요 문은 타일과 황금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고 지금까지도 그 파편을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은 외벽 자체가 많이 무너지며 현재는 32개의 문만이 남아 있다.  

    콜로세움은 최대 8만 7천명에 달하는 인원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좌석들은 로마 사회의 계급에 따라 엄격히 구분되었는데,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경기장과 가까운 하부의 좌석을 쓸 수 있었고, 계급이 낮을 수록 경기가 자세히 보이지 않는 위쪽의 좌석을 분배받았다. 특히 황제와 베스타 사제들에게 가장 전망이 좋은 북쪽과 남쪽의 자리가 헌정되었고 그 바로 옆에 원로원 의원들을 위한 널찍한 연단들이 줄지어 있었다. 현재 콜로세움에는 5세기 경 원로원 의원들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의원들의 자리가 어디인지 미리 알려주기 위해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1층은 도리아식,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코린트식으로 지어졌다. 도리아는 남성, 이오니아는 여성으로 주로 표현된다.  

    경기장에는 많은 양의 기계 구조물들이 있었다. 엘리베이터와 도르래는 동물들을 곧바로 경기장 내부에 풀어놓을 수 있게 했고, 심지어는 나무와 조형물들까지도 들었다 내렸다하며 풍경들도 바꿀 수 있었다. 고대 기록에 따르면 어떤 기계는 근처 수로와도 연결되어 있어 곧바로 경기장 내부에 물을 가득 채워넣을 수 있게 했다고도 한다. 다만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모의 해전과 물을 사용한 경기를 제한하며 없어졌다고 한다.  

    검투사들은 보통 노예나 전쟁 포로들 중에서 운동 실력이 출중하고 용맹하게 잘 싸우는 이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서로 결투를 벌이거나 다양한 종류의 동물을 사냥해 보여 로마 관중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은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으나, 검투사가 되면 이득도 있었다. 다른 노예들보다 생활환경이 훨씬 나은 군대식 학교에서 훈련을 받을 수 있었고, 승리를 거둔 검투사들은 영웅 대접을 받고, 대중들 사이에 셀럽으로 부상하기도 했다.   

    경기장에서는 종종 실제 관목과 숲들도 옮겨져 전시되었다. 이와 같이 만들어진 세트장은 신화의 이야기나 영웅적인 이야기들을 소개할 때 주로 사용되었는데, 때때로 죄인이 짐승들에게 산채로 으깨지거나 불에 타는 것과 같은 잔인한 행사들의 배경이 되어주었다.  

    콜로세움에는 약 5만 명이 앉아서 검투사들의 경기나 해전을 관람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이렇게 많은 관객이 퇴장하는 데 1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로마 시민들은 총 76개의 출입구를 통해 각자 배정받은 좌석으로 신속하게 입장할 수 있었고, 또 행사가 끝나면 지정된 출입구를 통해 신속하게 빠져나갈 수 있었다. 초기에는 네로 황제의 인공호수에서 수자원을 끌어와 악티움 해전 등의 해상 전투 장면을 재현해 로마 시민들의 갈채를 받았고, 티투스 황제의 동생 도미티아누스 황제 이후부터는 원형 경기장 지하에 여러 개의 방을 만들어 검투사들의 경기에 맹수를 투입할 수 있는 장치를 설치해 보는 재미를 더했다.   

    플라비아누스 왕조는 새로운 왕조를 창건하는 위업을 달성했지만 정통성 시비에 취발리곤 했다. 그래서 플라비아누스 왕조의 황제들은 대대적인 토목 사업을 일으키고, 로마 곳곳에 자기 가문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한 많은 건물을 건축한다. 로마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황제의 자리에 오른 베스피아누스가 제일 먼저 조치를 취한 행동이 바로 콜로세움의 건축이었다. 로마 시민들은 원형 경기장에서 피를 튀기며 싸우는 격투사들의 구경거리에 환호했다.    

※ 위키피디아 참고


콜로세움 근처에 마침 Visiting center 가 있네요. 빅버스가 돌아다니는 듯 하니, 표를 구매해야겠습니다. 내일은 바티칸 투어와 야경투어, 그리고 모레는 보르게세 미술관 방문 예정이라서, 빅버스는 오늘 밖에 시간이 없겠습니다. Daily 티켓으로 끊어 빅버스 투어를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사전에 공부하고 돌아다닌 다 해도, 잘 모르는 것이 사실인데, 빅버스 투어를 통해서 영어로 흘러나오는 설명에 또 한번 배웁니다. 

조금 타고가다 보니, 한 낮인데도 찬바람이 불어  생각보다 춥습니다. 오픈 좌석에는 오래는 못 탈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멀리서 독특한 모양의 성이 하나 보입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영묘로 유명한 산탄젤로 성입니다. 여기서 내려야 겠습니다~

산탄젤로 성(Castel San't Angelo)



산탄젤로 성, 즉 '천사의 성'은 로마 시내를 이어주는 산탄젤로 다리를 통해 들어갑니다. 테베레 강을 가로지르는 산탄젤로 다리 역시 너무 아름답습니다 ~. 산탄젤로 성은 원래 로마 5현제 시대의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만든 황실의 영묘였다지요.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건축의 황제로도 불리는 데, 직접 건물을 설계하고 건축하는 것을 즐겨, 로마 제국 전역에 위대한 건축물을 많이 만들었다고 하는데요, 대표적으로 지난 번 포스팅에서 소개드린 판테온도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하드리아누스 동상


    산탄젤로성은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영묘로, 로마 제국의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자신과 가족을 위해 세운 무덤이었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에는 로마 교황청의 성곽 겸 요새로 사용되었고 현재는 군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의 평면은 사각형으로 둘러싸인 원형인데 사각형의 각 모서리에는 개별적으로 설계된 망루가 있다. 성의 정면에는 역시 고대 로마 시대에 세워진 산탄젤로 다리가 있어 로마 시내에서 산탄젤로성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키고 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테베레강 건너편에 있던 아우구스투스 영묘의 매장 공간이 모두 채워지자, 새롭게 황실 전용 영묘 건설에 착수한다. 테베레강 건너편을 선택했는데, 당시 테베레 강 건너편은 로마 시민들이 외곽지역으로 생각을 했기 때문에, 로마 시민들의 반감을 무마하려고 이곳을 택한 것이라는 얘기가 있다. 산탄젤로 성은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죽은 후 138년에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가 완공을 하였다. 그 이후 카라칼라 황제 시대까지 묘지로 쓰였다.                     원래는 수많은 조각품과 석상들로 장식되어 있었으나 401년에 군사 요새로 개조되면서 유실되는가 하면,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재료로도 사용되었다.              

    산탄젤로라는 이름은 590년 그레고리오 대교황이 당시 창궐했던 흑사병이 물러나기를 기원하는 참회의 기도를 올리다 대천사 미카엘이 이 성 상공에서 칼을 칼집에 넣는 환시를 보았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1536년 라파엘로 다 몬테루포는 이 건물 꼭대기에 대천사 미카엘의 대리석상을 세웠다. 대천사의 손에는 당시 로마에 창궐하던 전염병이 퇴치되었음을 선언하는 의미로 칼이 쥐어져 있다. 대천사상 옆에는 사형을 처할 때 울리던 자비의 종이 매달려 있다.                   현재 대천사상은 플랑드르의 조각사 페터 안톤 폰 베르샤펠크가 18세기에 구리로 제작한 것이다.             

    데메트리오의 설계로 123년에 산탄젤로성과 도심을 이어주는 다리가 건설되었다. 엘리오 하드리아누스 영묘로 안내하는 다리라로 해서 엘리오 다리(Ponte Elio)라 하였으나, 1600년부터 그레고리오 대교황의 환시에 나타난 천사이름을 따 산탄젤로 다리라고 불린다. 교황 보니파시오 8세 당시 (1300년경) 대대적인 보수가 이루어졌고, 1535년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성베드로와 성 바오로 석상을 세웠으며, 1699년에는 교황 클레멘스 9세가 베르니니에게 요청하여 천사의 조각상들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교황 니콜라오 3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과 산탄젤로 성을 연결하는 요새화된 비밀통로를 만들었고, 신성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가 로마를 침공했을 때 당시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이 비밀통로를 통해 산탄젤로성까지 도피했다고 한다.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워낙 건물을 튼튼하게 지었고, 건물의 안과 밖에 해자가 있어 어떤 외부의 공격도 막아낼 수 있었기 때문에 교황은 이곳을 도피처로 삼았다.                  산탄젤로 성의 철통 같은 구조 때문에 르네상스 시대 교황들은 그 안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기도 했다. 피렌체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 레오 10세는 산탄젤로 성채 안에 작은 성당을 만들었고, 그 뒤를 이었던 교황 바오로 3세는 아예 교황의 숙소를 그곳으로 옮기기도 했다.                     또한, 로마 교황청의 교도소로도 사용되었다. 이곳에 갇힌 가장 유명한 죄수는 이단 혐의를 뒤집어쓰고 사형을 당했던 조르다노 브루노이다. 그는 산탄젤로 감옥에 6년간 갇혀 있다가 지동설을 포함한 이단적인 견해를 펼쳤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었다.             

    현재는 이탈리아 국립 군사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각종 무기가 진열되어 있다.  


산탄젤로 다리를 건너 로마 시내 쪽으로 가면 비교적 작은 건물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다는데, 이 지역을 '산탄젤로 구역'이라 불린다고 합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피렌체 출신 예술가들이 거주했던 곳으로 유명하고, 특별히 미켈란젤로의 공방이 있던 곳으로 더 유명하다고 하네요. 저희는 가보지 못했습니다만..


산탄젤로 성안은 아름다운 공원으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한가롭에 산책삼아 거닐면서 강변에 늘어선 기념품 상점에서 구경도 하고 기념품도 구입했죠. 


산탄젤로 성을 돌아나와 다리를 건너서 다시 골목길로 들어섰습니다. 빅버스를 타기 위해 가는 길에 또 한번 길게 늘어선 줄을 발견했어요. 젤라또 맛집! 



로마 3대 젤라또 맛집은 아니였지만, 쫀득쫀득한 식감이 정~말 맛있었습니다 ~! 오늘부터 드디어 1일 1젤라또 시작하게 되었어요. 

이렇게 로마 여행 1일차를 마무리하고 호텔로 돌아왔습니다. 새벽부터 열일 했던 하루였습니다!






내일은 바티칸 박물관 투어를 위하여 오전 6:50분까지 바티칸으로 가야 합니다. 바티칸 박물관은 한 2번 정도 방문했었던 듯 한데, 가이드 설명이 없으면 의미가 없기 때문에, 한국인 투어에 조인하여 보려고 합니다. 

다음 포스팅도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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