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히 자료를 요약 정리하는 편집은 넘사벽, 관점 뚜렷한 글은 살아남을것
ChatGPT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를 풀이한 것과 사람이 풀이한 것의 차이가 조금씩 명확해진다. AI는 확실히 기술적인 풀이를 한다. 하지만 사람은 관점이 확실하다. 확실한 관점에서 용어나 문구를 활용한다. '풀이'를 넘어서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로 삼는다.
<챗GPT와 글쓰기> 김철수 저, 163P
인터넷의 등장으로 신문 구독자 수가 급감하던 시절. 그래도 '종이신문'은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런 근거를 대기도 했다.
"화장실에 갈 때도 TV를 들고 갈 수는 없잖아."
물론 스마트폰이 발명되기 이전 얘기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수많은 전통 산업과 관련 직업이 쪼그라들거나 자취를 감췄다. 이제 세간의 관심은 챗GPT 같은 생성형 AI의 등장으로 또 얼마나 많은 산업과 일자리가 사라질 것인가에 쏠리고 있다. 특히 챗GPT는 제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인간을 대체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됐던 '글쓰기' 영역에서마저 발군의 실력을 보여주면서 글쓰기를 업으로 삼고 있거나 삼고자 하는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했다. 정말로 AI가 사람의 글쓰기를 대체하게 되는 것일까?
개인적으로 챗GPT를 사용해 보면 새로운 정보를 찾거나 막막한 주제에 대해 대략적인 개요를 작성하는 데에 있어서는 사람의 능력을 한참 뛰어넘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순식간에 저런 답을 내놓을 수 있는지 경이롭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내가 잘 아는 분야에 대해 파고들어 물어보면 대답이 피상적이란 느낌을 받게 된다. 한편으로 안심이 되기도 한다. 물론, AI가 더 많은 데이터를 학습하면 지금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을 거란 불안을 떨칠 순 없다. 궁금했다. 과연 전문가들은 AI 글쓰기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고 있을까.
챗GPT가 일반인들의 대화에 등장하기 시작한 건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았지만 이미 시중엔 서명에 '챗GPT'가 들어간 책들이 넘쳐나고 있다. 대부분 올해 나온 책들이어서 과연 얼마나 준비해서 썼을까 싶은 의구심이 드는 게 사실이다. 챗GPT 열풍에 편승해 급조한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접한 <챗GPT와 글쓰기>란 책은 저자인 김철수 작가의 이력이 이채로워 눈길이 갔다. 저자는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아직 AI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제목을 떠올리던 2000년대 초 벤처기업에서 인공지능 대화 서비스를 기획하는 업무를 하면서 처음 AI와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챗봇과 AI기술이 글쓰기에 '혁명'을 일으킬 것으로 전망했고 계속해서 연구하고 관련 서비스를 기획해 왔다. 글쓰기(국문학) 전공자가 AI를 공부한 이례적인 이력이다.
책에선 챗GPT를 업무용 이메일 작성하기에 활용하는 방법처럼 실무적인 팁도 소개한다. 하지만 저자가 정작 하고 싶은 얘기는 후반부에 담겨있다. 방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순식간에 글을 완성하는 챗GPT가 활약하는 시대에 빈 컴퓨터 화면을 앞에 놓고 한숨만 푹푹 쉬는 인간(필자를 포함...)이 어떻게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담은 것이다.
자판에 글자를 옮긴다고 해서 다 같은 글쓰기가 아니다. 저자는 글쓰기의 종류를 '저-술-편-집'의 4가지로 구분해 설명한다. 일기나 수필처럼 글쓴이가 직접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쓴 저(著), 용어 분석이나 해설 같은 술(述), 가이드문서처럼 자료를 편집해 질서를 부여한 편(編), 마지막으로 '00 꿀팁 3가지' 같은 제목을 단 블로그 글쓰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러 사람들의 견해나 흩어진 자료를 정리한 집(輯)이 그것이다.
'저술편집'의 4가지 글쓰기 가운데 단순히 용어를 설명하고 자료를 요약, 정리하는 '편집' 분야에선 인간이 효율성 측면에서 AI와 경쟁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김철수 작가는 "AI도 저(著)를 쓸 수 있지만 자신만의 경험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AI글쓰기의 한계라 할 수 있다"며 "사람은 얼마든지 다양한 경험을 하고 풀이해서 쓰고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으므로 사람이 ‘저술’하는 것을 AI가 따라오기는 당분간 어려울 것 같다"고 주장한다.
핵심은 관점(觀點)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방대한 지식은 누구나 접근하고 공유할 수 있지만 개인이 저마다 살아오며 경험한 삶의 흔적은 오롯이 개인의 것이다. 나만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관점은 내가 쓴 글을 차별화하고 이렇게 쓴 글은 공개될 때까지 AI가 접근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으로 남는다. 글이 공개되면 AI는 이런 글마저 자신의 데이터베이스로 소화하겠지만 이런 식이라면 AI는 '패스트 팔로워'는 되더라도 결코 리더는 될 수 없다.
언젠가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처럼 자신이 인간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안드로이드(인간형 로봇)가 거리를 활보하는 날이 온다면 비로소 인간의 글쓰기는 비로소 수명을 다할까. 사실, 그것도 모르겠다. 알파고가 이세돌에게 승리한 뒤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바둑을 두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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