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슬기로운 박사 생활이 될 뻔했다. 왜냐하면 대학원에 입학했을 때 박사로 입학했기 때문이다. 대학원에 갈 당시만 해도 석사는 큰 장점이 없다고 생각했다.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취준을 하면서 들은 바로는, 학사와 석사의 차이는 크지 않고 박사는 확실히 다르다고 했다. 연봉이나 승진 같은 면에서. 그렇기에 이왕 대학원을 가기로 결심한 거 박사까지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갑작스레 태양전지를 하다 보니 많은 문제가 있었다. 일단 랩실에서 하던 실험이 아니라서 내가 직접 논문을 찾고 실험 방법을 정립해 나가는, 그야말로 엄청난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일이었다. 실험 자체도 이제 막 배웠고 특히, 태양전지는 처음 접하는 나에게 매우 힘든 시기였다. 그러나 더 힘든 것은 교수님의 재촉이었다. 처음 하다 보니 실패만 하고 눈에 띄는 진전이 없었다. 교수님은 금방 될 줄 알았는데 더디게 진행되자 짜증이 나보였다. 그리고 10월 초에 사건이 터졌다.
내가 어떤 조건으로 태양전지를 만들겠다고 메일을 보낸 후 실험을 하다가 수업을 들으러 갔다. 근데 수업 중에 교수님한테 전화가 왔다. 수업 중이라 전화를 받지 않고 쉬는 시간에 다시 통화를 했다. 근데 불같이 화를 냈다. 화를 낸 이유는 내 멋대로 실험 조건을 만들었고 논리적이지 않다는 거였다. 지금 생각해도 이것 때문에 화가 난 게 이해가 안 된다. 통화를 하면서 계속 죄송하다고는 했지만 뭐가 문제인지는 이해가 안 됐다. 나름 선배한테 물어본 방법이지만, 선배도 잘 모르기 때문에 그저 그렇게 하라고 했고 논리적으로도 문제가 없어 보였는데 그냥 화만 냈다. 아마 기분 나쁜 일이 있었는데 내가 메일을 보내니까 화를 낸 거 같다. 사실 대학원생들은 실험도 많이 하지만 교수님들의 감정 쓰레기통 역할도 하는 거 같다. 그래서 노예라고 불리는 거 같다. 단순히 실험을 많이 하고 일만 많이 해서가 아니라, 교수님의 기분도 맞춰주고 때로는 감정을 받아주는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10분 정도 욕만 듣고 다시 수업에 들어왔다. 수업 내용은 당연히 안 들어오고 분노만 차올랐다. 너무 억울해서였다. 수업이 끝나고 랩실 선배한테 가니 이미 교수님과 통화했고 오해가 있었던 거 같다면서 그대로 실험진행하면 된다고 했다. 허무했다. 결국 화를 통해 바뀐 것은 없었고 교수님은 이것에 대해 아무 연락도 없었다. 이때 빨리 탈출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렇게 너무 억울해서 분노만 차오를 일이 많이 일어날 거 같았다. 실제로 이후에도 이런 일은 빈번하게 일어났다.
대학원이라는 시스템이 싫은 건지, 내가 다니고 있는 랩실의 교수님이 싫은 건지 구분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확실한 건 지금 이건 아니라는 것이었다. 코로나 시국에 지금 대학원을 나가면 취업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1년만 버텨서 석사로 졸업하기로 결심했다.
결심은 했지만, 순간적인 감정에 의한 선택일 수도 있기 때문에 한 달 정도 생각할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내 생각에 확신을 가졌고 2월 달에 말씀드려 석사 전환을 했다. 그리고 내가 가장 잘한 선택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물론 버티고 버텨서 박사로 졸업했으면 더 좋은 회사에서 더 좋은 환경으로 근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석사라는 타이틀로 원하는 회사에 왔고 커리어적으로도 만족한다. 만약에 석사라는 학위에 벽을 느껴서 박사 학위를 열망하게 된다면, 그때 다시 도전해 볼 것이다. 어떤 일이든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어야 지치지 않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