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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상 May 26. 2024

슬기로운 석사 생활_1

석사 진학의 이유

도피성 진학이었다. 대학교 4학년 여름방학, 급하게 취업 시장에 들어갔다. 애초에 취업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 스펙이 없었다. 그 흔한 영어 성적도 없었고 학점도 3.5로 스펙이 되지 못했다. 그 상황에서 취업 준비를 하다 보니 벽을 느꼈다. 운이 좋게 완성차 회사의 r&d직무 면접을 보게 됐는데 PT발표가 있었다. 아무 스펙이 없는 상황에서 나 자신을 대놓고 어필하는 PT발표는 탈락 선고와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학교 수업을 위주로 어떻게든 만들어 갔지만, 지금 봐도 부끄러운 수준의 발표였다. 더 부끄러운 것은 다른 면접자들의 수준이었다. 직무가 r&d이다 보니 석사생들이 많았는데, 석사생들의 PT발표는 매우 화려했다. 말할 게 너무 많지만 시간 관계상 간략하게 말하는 느낌이었다. 면접이 끝나고 집 가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많은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예상대로 면접은 망했다’라는 생각과 ‘석사는 다르다’라는 생각뿐. 그날부터 석사 진학에 대해 생각해 봤다. 어쩌면 그날에 이미 석사 진학을 결심했을 수도 있다. 아무 스펙이 없는 나에게 석사 진학은 선택이 아닌 운명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죽어도 가기 싫었던 대학원에 대해 알아보게 되었다.


급한 만큼 험난한 석자 지원

면접이 끝나고 11월 말에 대학원에 지원하려다 보니 이미 대부분 마감되어 있었다. 다음 해 2학기에 진학하게 되면 6개월이라는 시간이 빈다. 물론 그 사이에 취업 준비를 하면서 취업이 되면 취업을 하고, 안되면 대학원에 진학하는 방법이 있었다. 실제로 많은 학생들이 사용하는 방법으로, 대학원을 보험으로 정해놓고 취준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나의 생각은 달랐다. 아무 스펙이 없었기 때문에 6개월을 더 한다고 해서 취업이 될 거 같지 않았다. 오히려 자격증이나 공모전 같은 스펙을 쌓는데만 6개월 이상이 걸릴 거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6개월이라는 빈 시간 없이 석사에 진학하고 싶었다.

학점이 높지 않아 자대 대학원만 생각했기 때문에, 대학교 행정팀에 무작정 찾아가서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이 없냐고 물어봤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절차를 완전히 무시한 교수의 재량으로 인한 추가 합격 같은 막연한 기대를 품고 갔었는데 뜻밖의 정보를 들었다. 12월 중순까지 추가 접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 말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 켜진 손전등 같았다. 평소라면 보잘것없는 빛이지만, 막막한 현재 상황에서는 모든 걸 보여줄 수 있는 빛이었다. 그날 집에 돌아와서 우리 학과 교수님들 랩실 사이트를 들어가 보았다. 대학교를 다니면서 그저 강의하는 사람으로만 인식했기 때문에 무슨 연구를 하는지 전혀 몰랐다. 사실, 대학원 진학에 있어서 랩실의 논문 실적, 분위기 등이 중요하지만 그 당시에는 급하게 진학하느라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그저 다음 학기에 무사히 진학만 가능하면 된다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랩실 사이트들을 보다가 문득 화장품 연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용에 관심 있는 편이 아니라서 스킨, 로션만 발랐지만 그래도 친숙한 화장품에 흥미가 생겼다. 찾아보니 우리 학과에 화장품 연구를 하시는 교수님이 2분 계셨다. 한 분은 성격이 좋기로 유명하고 한 분은 괴짜라고 유명했다. 화장품 연구도 분야가 다르기 때문에 각 랩실에서 하는 연구 분야를 보고 결정했어야 했지만, 그 당시에는 다 똑같은 줄 알았다. 그래서 그냥 성격이 좋은 교수님한테 메일을 보내서 면담 날짜를 잡았다. 그렇게 모든 게 순조롭게 흘러가는 줄 알았다.

‘티오가 없다’ 

면담에서 이미 2명의 티오가 꽉 차서 다음 학기에 지원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6개월의 시간을 비우고 싶지 않았다. 이미 더운물, 찬물 가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돌아오자마자 괴짜라고 소문난 교수님한테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역시 순조롭게 면담 날짜를 잡았지만,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다행히 교수님은 자리가 있다고 하셨다. 재밌는 점은 교수님이 면담에서 우리 랩실이 어떤 연구하는지 아냐고 물어보셨는데, 그저 화장품 연구라고만 대답했다. 정말 아무 준비가 안된 대답인데 받아주신 게 신기할 따름이다. 사실 비인기 랩실은 사람이 없는 경우가 많다. 특히 자대생은 웬만하면 비인기 랩실은 안 가려고 하기 때문에 자대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받아주신 거 같다. 그렇게 사전 컨택에 성공하고 대학원 추가 모집에 지원했다.


결론

추가 모집답게 면접자는 3명밖에 없었다. 면접관으로 교수님 4명이 오셨는데 면접자가 더 적었던 것이다. 자대생이면 면접 때 ‘뭐 먹었냐’, ‘취미가 뭐냐’ 이런 일상적인 질문을 한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면접은 힘들었다. 열역학과 유체역학의 이론에 대해 물어보고 성적표를 보면서 특이사항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아무 준비도 안 했다가 난감한 질문들에 곤욕을 치렀지만 이미 사전 컨택을 했기 때문에 불안하지는 않았다. 면접이 끝나고 합격 발표도 나지 않았지만, 교수님은 랩실 출근 전에 공부할 논문들은 주면서 미션을 주셨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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