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바리움>
글을 쓰게 만드는 요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좋거나, 다른 하나는 나쁘거나다. 그리고 이 영화는 후자다. 어떻게 보면 후자가 더 강력하다고 볼 수 있겠다. 시간과 체력을 쪼개서 기껏 봤는데 둘 다를 낭비해 버렸으니 말이다.
함께 살 곳을 찾던 ‘톰’과 ‘젬마’. 중개인으로부터 ‘욘더’라는 독특한 마을의 9호 집을 소개받는다. 똑같은 모양의 주택들이 즐비한 곳에서 알 수 없는 기묘함에 사로잡힌 순간, 중개인은 사라져 버린다. 어떤 방향으로 향해도 집 앞에 다다르는 이곳에서 우리의 선택은 없다, 오직 살아갈 뿐!
왓챠피디아 <비바리움> 설명문
첫 장면에 뻐꾸기 새끼가 나온다. 뻐꾸기는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고, 뻐꾸기 새끼는 본래 자식인 새끼들을 둥지 밖으로 밀어내고 자신보다 더 작은 어미에게 먹이를 얻어먹는다. 목구멍에 먹이를 넣어 주는 작은 어미새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뻐꾸기 새끼에게 잡아먹히는 듯하다.
자, 영화는 이걸로 끝났다. 이 영화의 전체는 이 장면에 대한 알레고리다. 여기서 뒤로 가기를 누르면 된다.
아니다. 영화는 이걸로 끝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알레고리조차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못 만들었는지 궁금하다면 계속 보면 된다.
사실 저 뻐꾸기 장면과 이어지는 부분에 주인공 젬마가 등장한다. 어린 학생이 떨어져 죽은 새끼 새를 보며 불쌍하다고 이야기하자 그것도 자연의 법칙이며 어쩔 수 없다는 말을 하는데, 사실 이 대사가 영화의 큰 복선이다.
바로 <이 영화의 내용은 뭣도 없고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내가 분명히 앞에 '설명할 수 없는 비극'이라고 얘기해놨다>는 감독의 보험으로서의 복선이다.
왓챠피디아 제공 설명처럼, 여주인공 젬마와 남주인공 톰은 불쾌한 골짜기를 유발하는, 어딘가 로봇처럼 어색한 중개인 마틴으로부터 '욘더'라는 마을의 마을의 9호 집을 제공받는다. 그리고 마틴은 갑자기 사라진다. 아무리 애를 써도 마을에서 나갈 수 없자 패닉을 일으키는 두 사람 앞에 아기가 택배 상자에 배달되어 오는데, 아이를 다 키우면 이곳에서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선택지도 없는 마당에 뭐 어쩔 것인가. 둘은 아이를 키운다. 아이는 몇 주만에 일곱 살 정도로 자란다.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고 녹음기처럼 사람의 말을 똑같이 따라한다. 원하는 대로 자신을 돌봐 주지 않으면 귀가 찢어질 정도로 소리를 질러 댄다. 톰과 엠마의 정사 장면도 눈도 깜박하지 않고 지켜본다. 보급받는 음식을 먹어 봤자 맛도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다. 죽을 맛이다.
그러던 와중 톰은 아무리 훼손해도 복구되는 잔디밭이 담뱃불에 타는 모습을 보고 탈출을 위한 땅파기에 열중한다. 그것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믿는 톰은 엠마와의 교류를 거부하고 땅을 파는 데만 집중한다. 톰의 빈자리에 아이가 틈입한다. 알 수 없는 존재지만 엠마는 '모성애'를 발휘하듯 아이와의 관계를 형성한다.
알 수 없는 기호로 가득한 텔레비전을 밤새 보던 아이는 엠마에게 동일한 기호로 가득한 책을 한 권 준다. 그림이 섞여 있지만, 대충 알 수 있다. '인간' 남녀에 대한 의문과 실험이 목적이다. 아이는 외계인이 제공한 실험체고, 엠마와 톰도 실험체다. 엠마는 좌절한다.
사실 이 부분에서 뭔가 다른 해결 방안이 제시될 줄 알았다. 굳이 인간 남녀를 데리고 와서 '부모' 역할을 맡긴다는 건 아이에게 인간의 특성을 학습시킨다는 것 아닌가? 아이를 역겨워하고 폭력을 가하는 톰과 어느 정도 관계를 형성하고 대화를 시도하고, 교육시키려는 엠마와의 관계에서 이 지옥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다. 그냥 아이는 외계인의 하수인이다. 절대 인간성을 갖출 수 없다. 몇 컷 이후 아이가 성인으로 자라나길래, 이번에는 외계인이 만든 인조인간인 아이와 인간 여성인 엠마가 이어질 줄 알았다. 왜냐하면 뻐꾸기란 본래 둥지를 차지해야 할 존재(톰)을 밀어내니까. 게다가 둘의 정사 장면을 그렇게 뚫어지게 바라보았는데, 이건 복선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그런데, 아니다. 그냥 아이는 외계인의 하수인이다. 엠마와 톰은 집으로 돌아갈 수 없고, 톰은 땅을 파다 쇠약해져 죽어버린다. 극한에 몰린 엠마는 외계인의 하수인을 공격한다. 하수인은 기괴한 소리를 내며 네 발로 뛰어서 '바닥을 들춰' 도망친다. 쫓아가는 엠마는 자신뿐 아니라 수많은 커플들이 수많은 외계인의 하수인을 키우고, 똑같이 아이는 둘의 정사 장면을 바라보고 똑같이 남자는 죽고 여자는 아이를 키우면서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현실을 맞닥뜨린 엠마는 죽음을 맞이하는데, 외계인의 하수인은 엠마를 엄마라고 부르며 '원래 엄마의 역할은 아들을 길러내고 죽는 것'이라고 말한다. 키우면 내보내주겠다는 약속은 어찌되었는가? 죽으면 나갈 수 있으니 맞는 말 아니냐는 개소리를 해댄다. 자란 아이는 늙은 중개인 마틴을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다른 커플이 등장한다. 영화는 끝이다.
<진짜 나쁜 소녀>에서도 그랬는데, 못 만든 작품은 몰입을 깬다. 그리고 이 작품에 들어간 시간과 돈과 배우들의 체력을 계산하게 만든다. 결론은 '이게 다 외계인의 술책이고, 외계인은 짱 쎄고 짱 똑똑하고 어쨌든 짱이기 때문에 인간은 어쩔 수 없음ㅋㅋㅋ'이라는 것이다. 신이 죽어버렸기 때문에 외계인이 만능 치트키이고 21세기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되어 버린 것이다.
라틴어 ‘Deus ex machina’는 ‘신의 기계적 출현’을 의미한다.
이것은 극의 사건 진행 과정에서 도저히 해결될 수 없을 정도로 뒤틀어지고 비꼬인 문제가 파국(catastrophe) 직전 무대의 꼭대기에서 기계 장치를 타고 무대 바닥에 내려온 신의 대명(大命)에 의해 해결되는 기법이다.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주로 이런 연출기법을 썼는데,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Medeia)』 또는 『이피게니에(Iphigenie)』이다. 그 이후에도 이 기법은 17세기 바로크와 19세기 비엔나의 민중극에서 널리 애용되었다.
그리스 희곡에서 신은 등장한다. 그런데 신이 등장한다고, 신이 전지전능하다고 모든 게 그것으로만 끝나지는 않는다. 신의 명령(신탁)이 절대적이라는 것만으로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메데이아는 자신을 배신한 이아손에게 복수하고 용을 타고 떠나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다. 그 안에는 이아손의 야망과 메데이아의 사랑과 배신과, 제 손으로 낳은 자식을 죽이는 분노가 존재한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신탁의 주인공인 오이디푸스는 신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친부모인 줄 알던 양부모를 떠나는 결단과 고뇌, 결국 자신의 두 눈을 찌르고 황야를 헤매는 고통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선서한다.
<악마의 시>의 저자로 유명한 작가 살만 루슈디는 1996년 바드 칼리지 졸업 축사에서 자유와 불복종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며 그리스 신화를 가져온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오만은 신은 거역하는 죄이며 운명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우리는 그 이면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이다.
앞으로 (졸업 후) 몇 년 안에, 여러분은 크고 작은 신, 기업 신, 무형의 신 등 모든 종류의 신들과 맞서게 될 것입니다. 모두 숭배와 순종을 요구할 것입니다. 돈과 권력, 관습의 무수한 신들이 말이죠. 당신의 생각과 삶을 통제하려 할 것입니다. 그것들을 무시하세요. 그것이 내 조언입니다.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코를 찡그리세요. 신화가 말해주듯, 신을 거스르는 것이야말로 인간다움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입니다.
살만 루슈디, 1996년 바드 칼리지 졸업 축사
그런데 <비바리움>에는 무엇이 존재하는가? 실컷 던져둔 떡밥들만 둥둥 떠다닌다. 마틴은 왜 톰과 엠마에게 자식은 있느냐고 물어본 것인가? 샴페인과 딸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뻐꾸기 장면의 알레고리는 어디로 갔는가? 엠마와 하수인(마틴 대체품)의 관계는? 톰과 엠마(와 다른 커플들의) 정사 장면은 왜 있는가? 왜 하수인들은 그것을 지켜보는가? 수많은 커플들이 존재하는데 왜 항상 양육하는 존재는 여성이고 남성은 죽어버리는가? 어머니의 역할을 아들을 위해 희생한다는 과하게 노골적인 메시지는 왜 있는가? 산아제한을 영화의 메시지로 삼은 것인가? 그래서 결국 이 많은 돈과 시간과 체력을 낭비한 결과가 이것인가?
전능한 기계장치 위의 신을 데려오는 것은 좋다. 그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한 클래식한 서사 기법이니까. 그러나, 그렇다면 잘 사용해야 하는 법이다. 생산성 있고 깊이 있는 질문이 아니라 실패한 복선 회수와 무의미한 떡밥만을 던져 놓은 이후 자신의 모자람을 감추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하지 말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