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레인 스캐리, <고통받는 몸>
지금은 교회에 다니지 않지만, 모태? 신앙? 보다 분명하게는 아버지의 명령으로, 더 진실되게는 할아버지의 희망으로 어렸을 적부터 대학교에 진학하기 전까지 교회를 다녔다. 어렸을 적에는 부모님 말씀 잘 듣는 착한 아이였기 때문에 매주 교회에 나가는 것이 별 불만이 없었다.
게다가 교회에서 다루는 성경은 내게 성스러운 이야기라기보다는 재미있는 이야기에 가까웠기 때문에 성경 읽는 것도 흥미로웠다. (생각해 보라. 첫 부분인 창세기에서 나오는 세계의 시작과 낙원이야기, 선악과 같은 판타지적 요소가 얼마나 재미있는가. 게다가 마지막 부분인 요한계시록에는 세계 멸망 이야기도 나온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 중에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사실 창세기부터 "우리"라는 복수형 주어를 남발하는 신의 발언은 너무나 납득하기 어려웠다. 우리라니? 하나님은 오직 한 분 뿐이 아닌가? 십계명에서도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지 않는가? 궁금한 것이 생길 때마다 전도사님을 붙잡고 물어보았지만 뭐, 적절한 대답은 찾기 어려웠다. 얕은 지식으로 잘못 번역된 것이 아닐까 하고 친척 언니의 영어 성경도 찾아보았지만 거기에서도 'we'라고 번역되어 있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세기 3:22
이에 대한 궁금증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불신자가 읽는 성경> 페이지 작성자는 '신을 복수형으로 칭하는 문제'에 대해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구약을 왕좌의 게임처럼 읽고 있음' 이라는 부제를 지닌 이 페이지, 아주 재미있다. 삼위일체설, 장엄복수형설 등등 여러 가설과 번역본, 히브리어까지 찾아본 후 결론은 '그냥 복수형'이 맞다라는 것이다. 모세오경까지 작성하셨던데, 이후 이야기들도 다시 연재해주셨으면 좋겠다.
어쨌든, 의혹은 이어졌다. 신은 한 분인데 왜 '우리'라고 하나요? 왜 생리를 하면 불결하다고 생각하나요? 왜 욥을 괴롭히나요? 신자를 두고 악마와 내기를 해도 되나요? 사랑하는 자식들을 다 죽이고 더 예쁘고 잘생긴 자식들을 더 주어 봤자 그게 의미가 있나요? (엄마가 기독교를 못 믿겠다는 증요한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어떻게 '더 좋은' 자식이란 게 있느냐는 말이다. 엄마는 기독교의 신은 분명 남자일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런 질문이 반복되고, 답은 나오지 않으면서 교회 가는 날은 일주일에 한 번 재미있는 이야기 읽는 시간이 되었다. 찬송가는 따라 부르고, 나머지 시간에는 성경만 줄창 읽는 것이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포기했다.
이해되지 않는 여러 이야기 중 하나는 카인과 아벨 이야기였다. 창세기 4장, 꽤 초반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최초의 살인자 카인, 동생을 죽인 카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이야기는 십 년이 넘도록 이해가 가지 않는, 정말 골치 아픈 이야기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니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의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이르시되 내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네게 효력을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가인이 여호와께 이르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세기 4:1~15
Palma il Giovane - Cain and Abel (1576) / 신이 카인의 제물을 받지 않아 카인의 제물(곡식)은 불타지 않고 아주 멀쩡하다.
최초의 살인자 카인은 아벨을 죽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똑같이 제물을 바쳤는데 신이 동생 아벨의 것만 받고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이것이다. 왜 받지 않았는가? 모른다. 선을 행하라고 꾸짖긴 하는데 그래서 어떤 부분이 문제라서 안 받았는지는 이야기를 안 해준다. 물론 이것에 대해서도 교회 전도사님께 물었고, 이에 대한 책을 찾아 읽었지만 수확은 없었다. 다들 성경에 나와 있지 않은 부분을 창작해서 설명해준 것이다. 아벨은 가장 좋은 새끼를 드렸는데 카인은 좋지 않은 걸 드렸다는 둥…그런데 그런 구체적인 문제가 있었으면 성경에 나와야 하지 않을까? 붓다와 예수의 좌충우돌 일본 생활기를 다룬 만화 <세인트☆영멘>에서는 이 문제를 신이 고기 편식이 심해서 카인의 제물(곡식)을 안 받았다는 식으로 풀어버렸다.
그러니까 카인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속이 뒤집어졌겠느냔 말이다. 정성? 양을 기르는 게 유달리 힘든가? 농사도 일 년을 꼬박 짓지 않는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대놓고 거부당한 카인을 질투에 눈이 멀어 동생 아벨을 돌로 쳐죽인다. 그런데 이후 이야기가 더 이해할 수가 없다. 무려 '최초의 살인자'이자 '혈육'을 죽인 자인데 벌이라곤 농사를 못 짓게 하는 것과 다른 사람들이 죽일까 봐 보호 표지까지 준다는 것이다.
이후 카인은 어떻게 되는가? 에덴 동쪽 놋 땅으로 가서 아내를 얻어(아담과 하와와 카인과 아벨만 있는 세상 아니었나? 이것도 물어본 기억이 나는데 별다른 대답은 못 들었다.) 성도 쌓고 아들도 갖고 그 자손들은 가축 치는 자의 조상과 수금과 퉁소를 잡는 자의 조상과 구리와 쇠로 도구를 만드는 자의 조상이 된다. 그러니까 카인은 그냥 독립해서 잘 먹고 잘 살고 자신이 죽인 동생의 직분(가축 치는)까지 가져간다. 목축과 예술과 야장의 조상이 된 것이다. 이게 벌인가?
위에서 언급했던 <불신자가 읽는 성경>의 작성자는 이에 대해서 부족민들의 전쟁 이야기가 신화처럼 변형된 이야기가 아닐까 추측한다. 목축하는 부족이 농사짓던 부족과 다툼이 일어나면서 전쟁이 일어나고 결국 그 곳에서 살 수 없게 되어 거주 구역을 떠난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무언가 모자란다. 왜 하나님은 살인자에게 (게다가 이 땐 신자가 넷뿐이었다) 과분한 복을 주었는가? 돌쇠는 일이라도 잘 하니 쌀밥을 먹지, 카인은 대체 뭘 잘 했길래?
이에 대한 답은 <고통받는 몸>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 글에서 다루는 내용은 부분적이므로, 전체 내용을 읽는 것을 권한다. 일레인 스캐리는 고문과 전쟁이 일어나는 이유와 교집합을 탐구하며, 이는 몸의 실재성과 연결된다. 이데올로기나 종교 같은 형이상학적인 것은 실재성이 없다. 그러나 몸은? 특히 몸의 고통은? 그것은 몸을 가진 인간이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실재성을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무정형의 권력과 이데올로기에 실재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고문과 전쟁, 즉 몸의 훼손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고통의 강렬한 생생함이나 논박할 수 없는 실재성reality, 또는 고통이 지니는 ‘확실성’ 등 몸으로 느낀 고통의 특성들이 몸에서 분리‧전유되어 다른 무엇, 즉 그 자체로는 이러한 속성들을 결여한 무엇, 그 자체로는 생생하지 않거나 실제가 아니거나 확실하지 않은 무엇의 속성으로서 제시될 수도 있다. 이 책의 논의 전반에서는 이런 과정을 ‘유추 입증analogical cerification’ 또는 ‘유추 실증analogical substantiation’이라고 부를 것이다. (…) 사회 안에 [핵심 관념, 이데올로기, 문화적 구축물에 대한] 믿음의 위기가 나타나는 특정 순간에는 인간 몸이 지니는 순수한 물질적 사실성을 빌려서 그 문화적 구축물에 ‘실제성’과 ‘확실성’의 아우라를 부여한다.
일레인 스캐리, <고통받는 몸>, 22-23쪽.
그렇다면 이것을 종교의 입장에서,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에 적용해볼 수 있을 것이다. 유대교, 기독교의 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는 형상을 갖추지 않으며 인간이 자신의 형상을 빚는 것을 금지한다. 그것은 우상이다. 그러나 인간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기 어려워한다. 게다가 그것이 자기 자신보다 훨씬 더 위대하며 전지전능하다고 한다면 더욱 그렇다. 길을 가다가 낯선 이로부터 '기가 참 맑으시네요', '조상님이 허기지다고 하시네요'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의 얼굴은 불신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일그러지지 않는가? 도르미든 4대 종교든, 형이상학적인 믿음이라는 차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어느 경우이든 만들어진 것이 언어적 또는 물리적 연장을 동반하지 않는 단지 개념이거나 이미지이거나 신념일 때 이 만들어진 것은 상상하기나 믿기 행위를 하고 있는 체화된 이의 정신 안에서만 실제성은 지닌다(이 만들어진 것이 조금이라도 실제성을 지닌다고 할 때). 그것을 믿는 사람의 몸 경계 바깥에 있는 사람에게는 실제성을 갖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만들어진 것을 상상하고 있는 사람에게조차 지각의 내용물에 비하면 상상된 그것이 ‘덜한 실제성’을 갖는다는 점이다.
일레인 스캐리, <고통받는 몸>, 242-243쪽.
그리고 다시 한번,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카인은 누구인가? 카인은 죄를 지은 자다. 어떤 죄를 지었는가? 그는 사람을 죽였다. 그는 자신의 동생을 죽였다. 왜 죽였는가? 질투로 인해 죽였다. 무엇을 질투하였는가? 신의 사랑을 질투하였다.
즉 카인은 동생을 죽임으로써, 신의 탄생(등장) 초기(창세기)에, 누구보다 신의 존재를 강력하게 증명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아벨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제물이 되었고, 카인은 제물을 바치는 사제가 되었다. 그러니 카인에게 보호의 표지와 더불어 목축과 예술과 야장의 조상이 되게 해 준 것은 그에 대한 마땅한 결과인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동생을 죽였는데 신이 기뻐할 리 없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이 신은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증거로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한다.
어렸을 적부터 풀리지 않던 의혹 하나가 해소되어 개운하다. "자신에게 죄를 짓고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삼사대에 걸쳐 벌하는", "질투하는 하나님"(출애굽기 20:5, 34:14, 신명기 4:24, 5:9, 6:15)이자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않는"(여호수아 24:19) 하나님께서 왜 최초의 살인을 감싸셨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말이다. 하나님은 이전에도 그러셨듯 여전하시었다.
※ 이 글에서 다룬 일레인 스캐리의 이야기는 부분적인 것으로, 전체 내용을 읽어보는 것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