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난란 Nov 08. 2024

로맨스 영화가 아니라 직업 윤리 교육 영화

영화 <헤어질 결심>


 <헤어질 결심>을 드디어 보게 되었다. 아마 나 혼자라면 안 봤을 테다. 원체 로맨스물을 잘 안 보는 터라. 사랑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스토리에 공감이 잘 안 가기도 하고,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 '얘들아 제발 속 시원히 대화를 하고 뽀뽀나 해라'는 생각만 나서, 해피엔딩이 아니면 싫어서(디즈니 만세), 뭐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안 보지만 어머니가 탕웨이를 좋아하시기 때문에 보게 되었다. 주변에서 평도 좋았고 상도 받았으니 훌륭한 로맨스물이려니 하고 봤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건 로맨스물이 아니라 교육물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해준(박해일 분)이라는 형사의 찌질함과 한계와 잘못된 행동을 보고 타산지석의 차원에서 깨달을 수 있는 (직업) 윤리에 대한 영화 말이다. 


 남주인공 해준은 최연소 경감에, 능력 있는 아내에, 똑똑한 아들까지 둔 '부족할 것 없는' 인물이다. 여주인공 서래(탕웨이 분)는 해준이 담당한 기도수 실족사 사건의 관계자로 제시되는데, 문제는 거진 첫 만남에서부터 해준이 서래에게 불건전한 욕망을 느낀다는 것이다. 죽은 남편의 시체 앞에서 만났을 때 서래가 '마침내'라는 문어적 단어를 쓰는 부분에서부터 그런 것일까? 


 남편이 죽었는데도 아무렇지 않은 모습이 수상쩍다는 수완(고경표 분)의 합리적인 의심에 "우리 마누라도 안 놀랄 것 같은데?"라며 가만히 있는 아내 정안(이정현 분)까지 끄집어내서 과하게 편을 들어 주더니 죽은 서래의 남편이 서래의 몸에 새긴 문신을 본 날 밤에는 정안과의 잠자리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서래를 떠올리다가 자신이 맡은 사건에 대해 피해자와 피의자를 바꿔 말한다. 젊은 아내가 죽고 늙은 남편이 남은 사건이라고.


 그날 이후부터 잠복근무라는 이름으로 서래를 감시하는데, 수완이 서래가 수상쩍다고 말하자 "슬픔이 파도처럼 덮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서서히 물드는 사람도 있는 거야."라고 말한다. 수완은 "시집 내면 알려주세요 한 권 사드릴게"라고 답한다. 이때 박찬욱 감독이 <은교>를 보고 박해일을 섭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늙고 고고한 시인 이적요(박해일 분)가 어린 은교(김고은 분)에 대해 품는 그릇된 욕망이 우수한 경찰 해준이 피의자 서래에 대해 품는 그릇된 욕망이라는 알레고리와 묘하게 연결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이적요를 숭배하는 제자 서지우(김무열) 사이의 각축이 <은교>에 나왔다면 <헤어질 결심>에서도 선배 해준을 동경해 근무지까지 따라온 수완이 서래를 원망하고 술에 취해 집에 찾아가는 폭력적인 행위를 하는 것 또한 같은 궤로 작용하는 듯했다. 모범이 되는 훌륭한 경찰인 해준이 피의자로 의심되는 서래에게 비싼 초밥을 사 주는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을 하고 있었으니까. (잠복근무하는 수완에게 경비 처리 때문에 싸게 먹으라고 핀잔했다.) 게다가 해준은 "초밥은 아무 초밥이나 먹기 싫다"는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는데 말이다. 다 먹고 나니 서래에게 칫솔에 치약까지 짜 준다. 얼씨구. 서지우가 은교 때문에 이적요가 망가진다고 생각한 것처럼, 수완은 서래 때문에 해준이 망가진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철저하고 멋진 형사였던 해준은 CCTV에 찍힌 서래의 모습을 근거로 범인이 아니라고 결론짓는다. 물론 수완은 납득하지 못한다. 남자였으면, 한국인이었으면 분명 잠복하자고 했을 거라고. 서래가 피의자가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해준은 서래를 계속해서 스토킹한다. 아이스크림으로 저녁을 때우는 것, 식후 흡연과 불편한 자세를 염려하는 내용을 스마트워치에 차곡차곡 녹음한다. 이후 서래가 자신의 엄마를 죽였다는 중국 정부 자료를 가지고 와도 꿈쩍않던 해준은 집으로 오라는 서래의 말에 수염을 깎고 옷까지 차려입은 채 한달음에 달려간다. 자신을 위해 도라지 말랭이를 찾아 헤매는 아내를 두고. 


 기도수의 유서가 나타나면서 사건은 자살로 종결되고, 수완은 그에게 실망한다. 해준은 이제 거리낄 것이 없다. 서래를 자신의 개인 사무실에 초대해서 음식을 해 준다. 책상 위에는 중국어를 공부한 흔적이 있다. 질곡동 살인사건의 용의자인 홍산오(박정민)을 설득하면서는 서래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고래고래 고백하기도 한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하다. 자, 무려 최연소 경감을 딴 해준은 경찰로서의 직업윤리를 완전히 작살내고 있다. 경찰윤리헌장에는 자율적이고 적극적인 봉사자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정신과 윤리적인 행동지표를 제시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며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는 경찰관으로서 지켜야 할 행동지침의 내용과 경찰관의 덕목을 규정하고 있는 규범성, 연대성, 성실성, 근면성, 공정성, 청렴성, 합리성, 사명감을 담고 있다. 마지막엔 서래의 범죄 행위를 덮어주기까지 한다. 


 물론 사랑 때문에 자신의 직위나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조차 저버리는 불같은 사랑은 그 자체로 미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해준이 불처럼 타오르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안정적인 삶을 벗어날 모험을 감수하지 않는다. 아내에게 거짓말을 하고, 둘밖에 모르는 증거는 바다에 던지라고 하고, 지친 아내가 이 주임과 석류즙(여성 호르몬), 자라(남성 호르문)를 가지고 떠나자 손가락을 꺾으며, 서래의 두 번째 남편이 두 사람의 관계를 인터넷에 폭로하겠다고 하자 서래를 찾아다니며 사랑한다고 말한 적 없다고 부정한다.


 그렇죠, 사랑한다고 말한 적은 없죠. 다만 우리는 달이 아름답다고 하거나 달이 떴다고 전화를 하면서 사랑을 대신하지 않습니까… 당신의 붕괴도 마찬가지고요…


 서래가 자신에게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해준은 정말 몰랐을까? 알았어도 잘못이고 몰랐어도 잘못이다. 수많은 사건을 맡은 베테랑 경찰 해준은 피해자의 심리에 대해서 알았어야 했다. 그릇된 욕망으로 피해자에게 접근해서는 안 됐다. 서래는 너무 취약한 상황에 처해 있었으니까. 한국인/남성/경찰(경감)인 해준과 중국인/여성/(실질적) 불법체류자 상태인 서래의 관계가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 아닌가?


 정신과 의사와 환자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의사가 환자와의 관계를 치료사와 내담자 관계를 넘어 사적 관계를 갖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는 것 또한 직업윤리이다.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을 털어놓고 상담을 진행하는 정신과 진료의 특성상 환자는 정신과 의사를 이상적인 사람으로 느끼는 '전이감정'을 가지게 되고, 의사는 이를 적절히 해석하여 환자가 정상 생활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줘야지, 그것을 이용해서 취약한 상태의 환자를 자신의 욕망 충족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미국 23개 주에서는 환자가 성관계에 동의해도 상담사를 처벌한다.


 서래가 첫 번째 남편 기도수와 결혼한 이유는 열흘 동안 바다 위에서 떠도느라 죽음 직전까지 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눈물을 흘려 주었기 때문이다. 외조부가 독립유공자임을 증명하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당장 중국으로 쫓겨나 어머니의 죽인 죄로 처벌받을 상황을 면해주었기 때문에 결혼생활 동안 몸에 낙인을 찍어도, 폭력을 행사해도 서래는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암벽 등반, 고급 위스키, 비싼 시계, 클래식 등 고급 취미를 즐기는 남편과 매일 할머니들을 간병하러 나가야 하는 서래. 서래는 아픈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간호사가 되었고, 한국에서 네 산을 찾으라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어머니를 죽였다. 기도수 덕분에 중국으로 돌아가도 되지 않아도 되었지만 한국이나 중국이나 서래의 상황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누군가를 보살피면서도 삶보다 죽음에 더 가까운 삶. 중국인이자 실질적 불법체류자이자(언제든지 남편이 중국으로 보낼 것이라고 윽박질렀으므로) 여성인 자신의 상황에 관심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래가 기도수를 죽였다는 전말을 알고 난 해준이 서래에게 왜 경찰을 안 믿느냐며, 왜 그렇게 사느냐며 꾸중하는 말은 얼마나 공허한가. 이미 온 몸이 멍투성이가 된 것을 발견한 병원에서는 서래를 보호했는가? 에이스라며 서래를 칭찬하던 회사에서는 서래의 상황에 대해 물어보았는가? 서래를 보살펴줄, 아니, '살펴'주지 않아도 되니 최소한, '보아줄' 사람조차 없었다. 그러므로 불안, 외로움, 고통 속에서 해준의 스토킹은 서래에게는 반쪽짜리 '보살핌'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서래는 해준의 스토킹에 대해 이렇게 회상한다.



그가 날 훔쳐본 밤들도 생각나. 믿음직스러운 남자가 잠 안 자고 지켜주는 기분이 들었지.


 이 장면에서 이마를 팍팍 쳤다. 자신을 훔쳐보면서 아이스크림으로 끼니를 때우면 안 된다, 밥 먹고 담배 피우면 안 된다, 이런 말이 서래에게는 관심과 보살핌이라고 느껴진 것이다. 그렇지만 서래도 안다. 결코 해준이 자신을 선택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한국에 빼앗긴 자신의 산, 호미산에 오르면서 서래는 해준에게 고백한다.



나는 왜 그런 남자들하고 결혼할까요?
해준 씨 같은 바람직한 남자들은 나랑 결혼해 주지 않으니까. 
얼굴 보고 한 마디라도 하려면 살인 사건이라도 일어나야 하죠.



 해준은 이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자신이 계속 생각나지 않았느냐는 말에 갑자기 형사와 피의자의 관계라고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한 발짝 떨어져 거리를 둬 버린다. 서래가 한 말을 인정한 것이다. 해준의 말에 눈물 가득한 눈으로 서래는 '피의자'를 받아들인다. "나 그거 좋아요. 편하게 대해주세요, 평소처럼. 피의자로." 두 사람의 관계는 경찰과 피의자라는 틀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그 안에서 고백을 하든 데이트를 하든 음식을 만들어 주든, 결코 그 밖의 관계로 나가지 않을 거라는 암묵적 룰을 받아들인 것이다.



난 해준 씨의 미결 사전이 되고 싶어서 이포에 갔나 봐요.



서래는 해준이 좋다고 했다. 품위가 있어서 좋다고 했다. 전말을 알고 난 뒤 해준은 품위란 자부심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그것이 당신 때문에 부숴졌다고, 자신은 붕괴되었다고 말했다. 스스로 자부심을 외면했던 것은 생각지도 않고서. 그래도 서래는 해준이 좋았다. 좋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상처를 보고, 찍고, 비싼 밥을 사주고, 칭찬해 주었으니까. 아무도 자신을 '보아' 주지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거기까지다. 해준은 안전한 삶 안에서, 경찰과 피의자라는 관계 안에서 서래를 보겠노라고 선언했다. 그렇다면 서래에게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해준이 자신을 '보았으면' 하는 바람은, 벽에 미결 사건을 붙여 놓는 해준에게, 미결 사전이 되어서 자신을 영원히 '보아' 주었으면 하는 형태로밖에 달성되지 못한다.



서래 씨 남편도 철썩이 엄마도 다 나 때문에 죽은 거죠?


 그렇다. 서래는 해준의 진상을 폭로하겠다는 두 번째 남편을 죽이기 위해 채권자인 철썩이 엄마를 죽여야만 했다. 해준이 품위 있는, 자부심 있는 경찰이 되기를 바랐으니까. '미결 사건'인 서래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경찰'인 해준이 존재해야 하니까. 그가 경찰로 존재하기 위해서 두 사람은 죽어야 했고, 서래는 바닷속에 스스로를 감추고 영원히 사라진다. 경찰 해준의 영원한 미결 사건이 되기 위해서. 



 이 파국은 개인 해준의 비겁함과 용기 부족에서, 경찰 해준의 직업 윤리 부재에서 비롯되었다. 서래를 찾으려 경찰 인원을 부르라는 해준의 고함은 뒤늦고 공허하다. 피해자로서의 서래도, 한 사람으로서의 서래도 제대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이 영화를 로맨스 영화라고 하기가 저어하다. 애초에 동등한 두 사람일 수가 없었으니까. 그러므로 <헤어질 결심>은 자신을 품위를 뒷받침해줄 자부심. 최소한 그것을 지키는 것이 자기 자신과 타인에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케 하는 영화였다.



작가의 이전글 하나님은 왜 동생을 죽인 카인에게 보호의 표지를 주셨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