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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란 Nov 10. 2024

끝내 이기적인 짐승 한 명

드라마 <더 웨일>

 <더 웨일>을 처음 보았을 때, 원작 희곡이 있어서인지 이야기 구조도 탄탄하고,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묘하게 불쾌하고 찝찝했다. 다른 사람들의 평을 보자 그 찝찝함은 더욱 심해졌다. 영화를 한 번 더 봤다. 그리고 찝찝함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바로 주인공이었다. 주인공의 태도가 너무 자기중심적이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나이도 먹을 만큼 먹고 결혼도 해 봤고 아이도 가져 봤던- 사람이 자기밖에 모르지? 이 영화를 구원 서사로 읽는 이도 있었는데, 글쎄,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거대한 타산지석'으로 읽어야 하지 않은가 싶다.


 주인공인 찰리는 272kg의 몸으로 인해 정상적인 생활은커녕 숨 쉬는 것도 힘든 상태로, 월요일에 간호사 친구 리즈로부터 병원에 가지 않으면 일주일 안에 죽을 것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그 말을 들은 찰리는 9년 전에 자신이 두고 떠난 딸 엘리에게 연락한다. 


 찰리는 자신이 가르치던 남제자와 눈이 맞아 아내 메리와 이혼하였으나, 독실한 새생명교회 신자였던 남제자 앨런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목사인 아버지에게 파문당한 이후 거식증으로 사망한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찰리는 폭식을 반복하면서 죽음 앞까지 다다르게 된 것이다.


  정학에 졸업도 불투명한 엘리를 위해 에세이를 대신 써 주고 엘리 앞으로 모아 놓은 12만 달러도 주겠다는 찰리의 말에 엘리는 찰리의 집에 드나들게 된다. 친구들과 싸우고 선생님의 물건에 흠집을 내고 세상이 다 싫은 엘리의 태도는 단순 사춘기나 방황으로 규정하기에는 모호한 부분이 있다. 찰리뿐 아니라 메리의 사진을 SNS에 올리며 모욕적인 말을 업로드하고, 무례한 말과 행동으로 타인의 반응을 이끌어내고, 그것으로 쾌감을 얻는 모습은 어딘가 비틀렸다는 것을 보여준다.


 당신이 역겹다고 말하는 엘리의 말에 찰리는 자신의 몸이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엘리는 그것 때문이 아니라고 말한다. 제자와 바람이 나서 아내와 자식을 버렸기 때문에 역겹다는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나 찰리는 자신이 뚱뚱해서 혐오당하는 것이라고 지레짐작한다. 당신이 우리를 버렸다고 비난하는 엘리에게 찰리가 하는 말이라곤 '시간이 오래 지났으니 좀 풀어 보자'는 것이다. 머리꼭지가 돌아 버릴 발언이다. 


 이후 엘리가 당신은 (이혼했어도) 내 인생이 있어줄 수 있었다는 말에 갑자기 슬픈 표정을 짓더니 '누가 나를 자기 인생에 끼워 주고 싶겠느냐'며 피억압자 행세를 한다. 여덟 살짜리 자식과 성인, 게다가 아버지인 자신의 관계라는 측면에서는 생각지도 않는다. 나는 이렇게 뚱뚱하니까, 나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나인데 어떡해? 찰리는 자기연민이라는 소파에 영원히 파묻혀 있고 싶을 뿐이다.


 엘리는 기억한다. 메리가 잠시 집을 떠났을 때 앨런을 데려와서 '엄마와 자신에게는 해 주지 않던' 질 좋은 스테이크를 대접하고, 자신을 재워 놓고서 자신들끼리 속삭였던 말을 모조리 다 말이다. 그렇게 눈물 나는 사랑을 하던 찰리는 앨런이 죽고 자신도 죽을 지경이 되자 다급하게 삶의 의미를 찾아나선다. 죽기 직전에 고해성사를 들어달라고 애걸복걸하는 범죄자를 보는 것만 같다.


 엘리는 메리의 수면제를 찰리에게 먹여 재운다. 메리와 리즈가 함께 찰리의 집으로 오게 되면서 다행히 죽지는 않지만 산소줄을 차면서도, 안 죽었으니 된 거 아니냐며 툴툴대다가 빨리 죽어버리라는 엘리의 말에도 찰리는 괜찮은 듯 넘긴다. 홀로 엘리를 키우며 고통받은 메리는 찰리에게 '저 앤 사악하다'고 고백한다. 토해내듯 말하는 메리에게 찰리는 그렇지 않다고, 저 애는 놀라운 애이며, 자신에 대한 비난글도 '이 글보다 못 쓰는 글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느냐'며 엘리를 치켜세운다. 메리는 머리꼭지가 돌 것 같다. 그러면서 찰리는 메리에게 엘리를 포기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왜?


 '내 인생에서 잘 한 게 하나라도 있단 걸 알아야겠어서'. 결국 자기합리화다. 첫째, 그렇게 엘리가 염려되면 진작 신경을 썼어야 했다. 둘째, 신경을 못 썼다면 지금부터라도 쓰면 된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찰리는 병원에 갈 수 있고 병원에 가면 죽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병원을 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니, 그 돈은 엘리를 위해 모은 돈이라서이다. 와우! 정말 놀랍다. 뒷바라지에 의료 점검에 정신적 지지까지 해 주는 리즈에게도 비밀로 하고, 가난한 척을 해 가면서 동정을 실컷 사서 연명해놓고는 엘리에게 '널 위한 돈이니까 난 이걸 안 쓰고 죽을 거야'라고 하는 꼴이라니.


 찰리는 그냥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책임질 용기도 없고, 인정한 용기도 없는 비겁자이다. 자신에게 새생명교회를 전파하려는 토마스가 앨런이 자신과의 삶을 선택해서, 동성애자로 살기를 선택해서 아버지에게 파문당하고 거식증으로 죽었다는 말을 하자 엄청나게 상처를 받았으면서 그 상처를 똑같이 엘리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 돈을 쓰지 않을 거고, 그래서 죽을 거야. 지금까지 네 인생에 있어 주지 않았지만 앞으로 있어주기에는 겁나. 참으로 편리한 태도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병원에 가는 것을 거부하던 찰리는 결국 죽음 직전까지 와서야 솔직하게 미안했다고 털어놓으며 애지중지하던 엘리의 에세이에 힘입어 엘리에게 한 걸음씩 다가간다. 엘리 앞에 선 후 엘리와 메리와 함께 했던 바닷가를 주마등처럼 희게 떠올리며 영화는 끝난다.


 이게 구원인가?


 마지막에 이르러 나는 앨런이 가장 불쌍해졌다. 아내와 자식을 버리면서까지 선택했던 진정한 사랑 아닌가? 앨런도 찰리를 사랑하는 것을 선택하면서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 그러나 찰리가 마지막에 떠올리는 것은 결국 자신이 버린 메리와 엘리와의 추억이다. 앨런을 잃은 슬픔으로 폭식을 시작했으나, 그것은 관성적 삶이 되었고, 겁이 나 삶을 그만두었으며, 그조차 남의 탓으로 돌렸으며, 구원으로 선택한 것은 자신이 버린 이들이다. 앨런은 그렇게 두 번 버려진다.


 <더 웨일>은 끝내 이기적인 짐승에 대한 이야기다. 그의 삶은 오로지 자기 자신으로만 점철되어 있었다. 그가 선택한 삶도, 그가 선택한 구원도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었을 뿐이다. 황지우가 시 <뼈아픈 후회>에서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모두 폐허"라고 말한 까닭은 어디에 있는가?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그 고열의/에고가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에 있다. 찰리의 삶은 폐허다. 그 폐허는 자기 자신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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