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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란 Nov 13. 2024

현실이라는 거짓말

마크 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

 내가 정말 싫어하는 말이 있는데, "현실적으로 굴어라", "이게 현실이야"라는 말이다.


 이 때 쓰이는 '현실'은 눈 앞에 펼쳐진 시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때그때 충실히 살라는 말이 아니라 "시끄러우니 입 좀 다물어라"는 뜻으로 쓰인다. 물론 "넌 아직 어려서~", "잘 몰라서~"가 괄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말해 무엇하랴.


 이 상황은, 문제는 불공평하다. 말이 안 된다. 옳지 않다.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불평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어른답게' 받아들이라는 것인데, 이 때의 '어른답게'라는 말도 직간접적으로 자신이 만들어 놓은 현재를 책임진다는 뜻이 아니라 조용히 입 닫고 시키는 대로 하는 노예가 되라는 뜻으로 쓰인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대해 분통을 터뜨리거나 욕을 하는 것은 '감정적'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오직 침묵의 이성만이 우월하다는 그들의 생각.


 그렇게 이성, 합리성 부르짖는 그들은 정작 이성적으로도 합리적으로도 굴지 않는다. 가치라는 것은 애초에 감정에서 비롯되었다는 명제는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문제 발생-해결이라는 간단한 도식을 형성하지도, 인과관계 하나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않)하면서 그저 이대로 조용히 넘어갔으면 좋겠다는 비겁자들이 오용하는 단어가 이성이고 합리성이다. 옳다/옳지 않다라는 판단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그들이 그렇게 사랑해 마지않는 '현실'은 우리가 살아가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이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용어에서 알 수 있듯, 오직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만이 '현실'이라고 믿게 하는, 자연화된 이데올로기 말이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는 프레드릭 제임슨과 슬라보예 지젝의 구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 슬로건은 내가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표현으로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존립 가능한 정치, 경체 체계일뿐 아니라 이제는 그에 대해 일관된 대안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널리 퍼져 있는 감각이 그것이다.

마크 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 11-12쪽.


 신자유주의적 비즈니스 모델이 삶의 방식으로 녹아들면서 (마크 피셔는 이를 '비즈니스 존재론'이라고 말한다) 삶의 모든 지점은 비즈니스의 차원으로 읽힐 수밖에 없게 되었다. 끊임없이 확장할 수 있다는 자본의 믿음처럼 인간 또한 끊임없이 발전하고 개선되어야만 한다는 태도,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율을 뽑아내기 위해서 마땅히 이루어져야 하는 구조조정과 아웃소싱, 잠드는 순간까지 타인과 나를 비교해야만 하는 무한 경쟁. 나무를 태우면 숯이 되는 것은 마땅하지만 인간은 번아웃으로 나가떨어지는 순간 즉각 폐기처분되거나 실패자 취급을 받는다. 신자유주의가 점점 더 확장되면서 정신 건강을 호소하는 사람들의 수도 정비례하여 증가하지만 그것은 노오오오력이 부족하거나 정신력이 부족한 개인의 문제로 떠넘겨진다. 


 이런 식의 문제를 제기하면 그들은 이야기한다. "그렇게 불만이면 북한에 가라", "그러면 자본주의보다 나은 게 있느냐?". 살기 힘들면 죽으면 그만이라는 것인지, 말도 꺼내지 말라는 것인지. 자본주의만이 현실이라는 환상 속에서 자본주의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무지개 끝을 따라가겠다는 애(새끼)의 말도 안 되는 헛소리로 취급된다. 그 안에 사는 자신의 삶 또한 고달프지 않은 것도 아니면서, 고작 하는 것이라곤 입 닥치라는 말로 가냘픈 권위를 세우는 것뿐이다. 나는 현실적이야. 나는 어른이야. 나는 애처럼 징징거리지 않아. 그것은 어른이 아니라 노예에 가깝다.


 그들의 폭력은 상상력의 빈곤에서 기인한다. 간디는 폭력적인 사람은 게으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힘들게 노력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주먹이나 총으로 간단히 해결하려는 태도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폭력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게으른데다 쓸모없기까지 하다.


간디는 폭력을 거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상대편을 친구로 바꿀 수 있는 창의적인 방법을 찾아야 한다. 대부분의 폭력은 부도덕한 충동이 아닌 상상력의 부족에서 비롯된다. 폭력적인 사람은 게으른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힘들게 노력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주먹을 날리거나 총에 손을 뻗는다. 너무나도 빤한 반응이다.

에릭 와이너,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290쪽.


 그러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상력이다. 현재 없는 것을 상상하고 꿈꾸는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왜 나에게 주어진 것만이 '현실'인가? 양극화, 자살과 우울, 정신병, 환경 오염으로 구멍이 숭숭 난 '현실'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고 체념하는 것은 무책임한 태도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과도 같은, 일상이 느와르 영화 같은 이 세계가 약육강식이라는 고릿적 개념과 아직도 구질구질하게 붙어 있다는 생각은 21세기에는 좀 바꾸어도 되지 않을까? 인간이 우주로 날아가는 이 시대에, '현실'적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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