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기숙 Aug 17. 2024

무화과꽃과 여름 이야기


  

여름날 아침은 분주하다. 

커다란 주전자에 보리차 끓여서 찬물 담긴 대야에 식혀야 하고, 매일 단백질 보충용으로 달걀도 서너 개 삶아 놓는다. 부엌이 찜통이 되는 저녁보다는 그래도 좀 나은 아침 시간을 이용한다. 


더 더워지기 전에 텃밭에 나가 고추, 가지, 깻잎, 호박을 한 소쿠리 담아낸다. 게으른 농부네 텃밭엔 어느 게 먹을 것인지 모를 만큼 풀이 무성하다. 누가 볼까 부끄러운 텃밭이지만 그래도 괜찮다. 잘 찾으면 먹을만한 것이 있다.


고구마를 심는 목적은 고구마에만 있지 않다. 고구마 줄기를 뚝뚝 끊어 김치를 담근다. 한여름에만 맛볼 수 있는 이 김치는 어릴 적 추억이 깃든 특별한 음식이다. 멀리 있는 아들 내외에게 보내며 김치 이상의 맛을 기억해 주길 기대한다.     



텃밭 가장자리엔 참 기특하고 고마운 나무 한 그루가 당당히 버티고 있다. 

바로 무화과나무다. 무화과는 ‘꽃이 없는 열매’라는 뜻인데 정말로 꽃이 없는 걸까.


무화과는 꽃받침과 꽃자루가 열매처럼 부풀어 오른 것으로 길쭉한 주머니처럼 굵어진 주머니 속으로 수많은 꽃이 들어가 버려서 꽃은 보이지 않는다. 꽃이 피는 걸 보지 못했는데 열매가 익기 때문에 무화과라고 부른다.


이 나무는 약을 치지 않아도, 무관심해도 해마다 맛난 열매를 대롱대롱 달아낸다. 

성경에 나오는 만나처럼 날마다 하루 먹을 것만 익어간다. 오늘은 제법 많은 양을 수확했다. 누구에게 나눔을 할까, 행복한 고민을 하게 하는 나무이다. 물론 젤 달고 맛난 것은 새들이 먼저 시식한다.  


   

우리도 새들처럼 먼저 시식했던 기억이 피어난다.

뜨거운 여름이면 엄마는 멸치 육수를 끓이고 면을 삶아 찬물에 헹군다. 

“아, 아, 한 입만!”

엄마는 찬물에서 건져낸 면발을 딸들 입에 몇 가닥씩 넣어 주셨다. 우리는 제비 새끼들처럼 입을 쫙쫙 벌리고 먼저 먹겠다며 고개를 들이밀었다. 부엌 창 너머 사선을 그으며 내리쬐는 쨍한 햇살과 엄마의 손맛은 여름날 잊지 못할 한 장면이 되었다.


오늘 점심으로 국수 면발을 삶았지만 달라는 제비 새끼는 없다. 손가락으로 휘리릭 감아서 내 입에 넣어 본다. 그때 그 맛이 아니다. 


     

맛있게 익어가는 무화과처럼 마당에 널어놓은 빨래도 익어간다. 

첫 아이는 한여름에 태어났다. 밤새 잠을 자지 않던 울보 아이로 아침이면 기저귀가 한 바구니였다. 세탁한 빨래를 들고 옥상에 올라가 빨랫줄에 나란히 널면 하얀 기저귀가 바람결에 행복한 춤을 추었다. 

밤새운 육아도 뙤약볕에 펄럭이는 하얀 기저귀를 보며 고단함을 잊게 했다. 지금도 이상하게 빨래 너는 일을 좋아한다.

오늘도 햇살을 품은 까슬까슬한 빨래에서 추억 한 자락이 묻어 나온다.



잠시 바람이 멈췄다. 

하늘이 고요하고 후덥지근하게 웅크리더니 이내 시원하게 쏟아진다. 소나기다! 소낙비는 습하고 더운 바람을 깨웠다. 한여름 소나기를 볼 때마다 그녀가 생각난다. 

“친구야, 너는 한줄기 소나기 같은 친구다.”

내게 이렇게 말해 준 그녀가 이 나이 되고 나니 더욱 그립다.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 오랜 내 친구가 있다.

소나기가 금세 지나갈세라 재빠르게 동영상으로 남긴다. 

“참, 좋다!” 내 마음속 소리도 함께 남긴다.     



여름 텃밭 무화과나무는 내 유년의 국수 맛을 깨워주고, 첫 아이 기저귀 빨래하던 추억과 기분 좋은 소나기를 만나게 했다. 참으로 풍요로운 여름날이다.

작가의 이전글 꽃길로 가는 꿀벌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