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사랑의 바람이 불어온다)
친정엄마가 몇 달 동안 기침을 하신다.
병원에 모시고 가서 CT까지 찍었으나 별 이상이 없다는 소견이었다. 그러나 일주일 후 갑자기 호흡곤란을 호소하면서 결국 급성 폐렴으로 입원하게 되었다. 입원하는 날 엄마는 이런 말을 하셨다.
“여기서 천국을 가거나 집으로 가겠지.”
참 맞는 말을 시원하게도 하신다. 병실을 배정받아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큰딸인 나에게 곧 당부했다.
“어디 어디에 돈이 있는데 너 가 보면 웃을 거다. 그리고 병원비 하게 돈을 통장에 넣어 주라.”
집에 가서 확인했더니 엄마 말처럼 웃음이 나왔다. 오만 원권 지폐를 백만 원 단위로 묶어서 마지막 한 장을 야무지게 두른 돈뭉치가 제법 있다. 본인 통장에서 현금을 찾아 조금씩 모아놓은 것이다. 그 돈뭉치를 본 순간 쓰임새가 예측되었다.
“엄마, 돈을 왜 이리 모아 놓았어요?”
“응, 그걸로 김치냉장고 하나 새것으로 사고…,” 라며 말끝이 흐리다.
“작은 김치냉장고 몇 개는 살 돈인데?”라는 말에 답을 못하신다.
큰딸인 내 위로 오빠가 한 명 있고 아래로 여동생 둘이다. 여든다섯 엄마의 지독한 아들 사랑을 알기에 바로 그림이 그려졌다. 엄마 마음을 존중하는 것이 자식의 도리지만 참 씁쓸했다. 아들이 굳이 달라고 하지 않아도 주고 싶은 게 엄마 마음이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제는 자신을 위해 돈을 쓸 줄도 알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 변변한 과일 하나 선뜻 본인 손으로 못 사 먹고 평생 그렇게 알뜰살뜰 사는 것을 누가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무심코 ‘죽어야 끝날 일이다’라는 넋두리가 나왔다.
엄마는 보름간 병원 생활을 마치고 감사하게도 천국이 아닌 집으로 퇴원했다. 막내 여동생이 퇴원을 도왔고 나는 드실 반찬 몇 가지를 만들고 과일을 사서 남편과 찾아뵈었다.
친정엄마의 돈뭉치를 보며 20년 전 일이지만 돌아가신 시어머니 생각이 났다. 평소 자식을 따뜻이 대해 주지 않고 늘 차갑고 냉정하신 어머니셨다. 그런 어머님이 마냥 어렵기만 했다.
남편이 경제적 자유를 누리겠다고 안정된 공무원직을 던지고 도배장식업을 시작하면서 힘든 시기를 지날 때였다. 아이들 교육비와 가게 운영이 어려워 마이너스통장 잔고가 늘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부모에 대한 도리는 해야 하기에 내색하지 않고 어머니 생활비를 매달 보냈다. 어느 날 어머님에게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얘, 예 솔 어미냐?”
“네, 어머니, 무슨 일이세요?”
평소 전화를 잘하지 않는 어머니여서 우리 부부는 화들짝 놀랐다.
“아무 소리 하지 말고 둘이 좀 오너라.” 하시고 전화를 끊었다.
당시 어머니는 부산 기장군 작은 아파트에 살았고, 산청에서 바로 출발해도 두 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다. 기장으로 가는 두 시간 동안 우리 부부는 온갖 소설을 써댔다. 지난 추석에 잘못한 것이 있을까. 어머님 건강에 이상 신호가 온 것일까. 목소리는 괜찮은 듯했는데….
궁금증만 가득 안고 아파트에 도착했다. 어머니는 얕은 미소로 우리 부부를 맞이해 주며 거실 바닥에 앉으라 하신다.
“어머니, 무슨 일이세요?”
“갑자기 오라는 전화받고 놀랐지?”
어머니는 일어서서 장롱 깊숙이 간직했던 돈뭉치를 꺼내 놓았다. 모두 만 원권으로 마지막 한 장을 돈다발에 둘러서 백만 원씩임을 표시하고 있다. 그렇게 다섯 개 오백만 원이었다.
“너희들 빚 있지?” 하시며 돈다발을 거실 바닥에 툭 놓았다. 우리는 눈이 휘둥그레졌고 말문이 막혔다. 잠시 후 난 진한 눈물이 앞을 가린다.
“어머니, 이 돈 받을 수 없어요.”
정말 말이 안 되는 돈이었다. 혼자 지내시던 어머니는 그 흔한 세탁기도 들여놓지 않고 손세탁으로 평생을 살며 물 한 방울도 아끼셨다. 항상 쪽 머리를 올려 예쁜 두건을 두르고 지내고 미용실 한 번 가는 것도 사치였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그 돈의 가치는 가늠하기 힘든 큰 사랑이었다. 그날 우리는 어머니의 하늘 같은 마음을 받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올해 이순(耳順)을 지나고 있는 나 역시 자식들이 늘 궁금하다.
올여름은 지독히도 무더웠다. 지루한 더위는 조석으로 불어대는 바람에도 안간힘을 다해 버티고 있다. 그러나 스치는 바람 내음엔 분명히 가을이 있다.
내리사랑의 바람도 불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