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몬드봉봉 Oct 21. 2023

길에서 만난 사람들



"...언니, 정말요?"


"그렇다니까."




   

까미노가 좋았던 이유를 말해보라면 끝도 없을 것이다. 반드시 그 중 하나를 꼽아야 한다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나도 모르는 새 그들에게 스며들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느끼고, 배우고 있었다는 것이다.


길 위에서 마음을 나눈 사람들 중,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했던 말 한 마디가 잊히지 않는다. 나를 자극했던, 지극히도 강렬했던 한 문장이었다.


"돌아보니까 1, 2년 정말 별 거 아니더라."  


"...언니, 정말요?"


미국 간호사 언니와 치의학전문대학원 졸업을 앞둔 언니였다. 편의상 두 번째 언니는 '썬'이라고 하겠다. 썬 언니는 여러 차례의 진로 고민 끝에 지금의 진로를 결정했다고 한다. 비록 후회는 없지만 조금 더 일찍 진로를 찾았었더라면 많이 돌아가지 않아도 됐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했다.


썬 언니와는 단둘이 같이 저녁을 먹기도, 하루종일 나란히 걷기도 했었다. 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느끼며, 다짐했다.


"언니, 고마워요. 저도 열심히 고민해봐야겠어요."




지금도 간간이 안부를 묻고 지내는 세원이와 에스더 언니, 두 사람과 걸었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놀랍게도, 세원이는 나와 무려 MBTI까지 일치하는 동갑내기 친구였다.


하루는 세원이와 걷고 싶었다. 매일 새벽 4시 반이면 출발하는, 아주 범상치 않은 친구였다. 세원이와 걸으려면 내가 세원이의 페이스에 맞춰 하루를 시작해야만 했다. 숙소가 달랐던 우리는 meeting-point를 정했고, 나는 깜깜한 새벽 4시에 부랴부랴 일어나 우리의 집결 장소로 향했다.


역시 대단한 친구였다. 이미 도착해 있었다. 새벽 4시 반, 전날 슈퍼에서 사둔 케밥을 사이좋게 나눠 먹으며 새벽을 깨웠다.


세원이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실은 이집트 여행을 꿈꾸다가 부모님의 완강한 반대로, 보다 안전한(?) 순례길에 오르게 된 것이랬다. 세원이는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만큼 진로에 대해 진지한 자세를 갖고 있는 친구였다. 현재 공부하고 싶은 이 분야가 자신의 적성에 맞을지는 경험해봐야 아는 것이라며, 타대학 일반 학과를 포기하고 조기취업형 계약학과로 입학을 한 친구였다.


세원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동안 나는 '초등교사'라는 직업의 안정성이 보장된 곳에서 나를 편히 가두고 있었구나. 정작 나의 적성과 나의 가능성을 시험해 볼 용기는 내지 못한 채 나를 가두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실무'를 경험해봄으로써 우리의 적성을 확인할 수 있는 건데 말이지. 고작 십대에 결정한 학과로 나의 미래를 단정 지으려고 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어쩌면, 가르치는 일이 내 적성에 맞지 않을 수도 있는 건데 말이지.


나의 가능성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그리하여 내가 현재 속한 이 곳은 내게 맞지 않다고 판단했다. 단 한 가지 직업만을 목표로 삼는 이곳은, 나의 자아실현 욕구를 충족시키기 어려울 것이라 판단했다.   


"그렇겠다. 실무로 적성을 확인해야 한다는 게 정말 맞는 말인 것 같아. 고마워."





에스더 언니는 정말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었다. 썬 언니가 하루가 멀다하고 '에스더가 제일 범상치 않은 것 같다'는 말에 세원이와 나는 목이 떨어져라 맞다맞다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맞아요, 진짜 맞아요."


본인은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에스더 언니는 누구와 견줄 수 없을 만큼 강한 사람이었다. 썬 언니는 까미노 초반부터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더랬다.


"이러다가 에스더 혼자 피스테라(Fisterra)까지 걸어가는 거 아냐?"


"저요? 저 진짜 모르겠어요. 저는 언제 그만둘지 몰라요."


가만 돌아보면, 썬 언니의 그 한 마디는 예언이었다




나는 에스더 언니와 까미노 시작 전부터 인연이 있었다. 인연이 계속되면 필연이 된다는데, 에스더 언니는 나의 처음과 마지막을 모두 함께한 사람이었다. 생장부터 세상의 끝, 피스테라(Fisterra)까지.



파리에서 시작된 인연



에스더 언니를 기차 안에서 처음 만났다. 프랑스길(Camino Francés)을 계획하는 사람들은 보통 파리로 들어와 기차를 타고 파리에서 바욘(Bayonne)으로, 그리고 바욘을 거쳐 까미노 시작 지점인 생장(Saint-Jean-Pied-de-Port)으로 이동하게 된다.


에스더 언니는 파리에서 바욘으로 향하던 기차 안에서 처음 만났다. 무려 바로 옆좌석이었음에도, 야간열차에서 자느라 바빴던 우리는 바욘 도착 10분 전에 처음으로 말문을 트게 된다. 빨간 머리 동양인, 아무리 봐도 한국인으로 보였단 말이지. 예쁜 언니에게 내가 먼저 말을 걸어보았다.



"Hi, are you heading for the camino?"


"Yes, and you?"


"Yup, me either. Where are you from?"


"I'm from South Korea."


"아,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ㅎㅎ"


그렇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에스더 언니도 나처럼 파리에서 여행을 하다 까미노를 시작하려던 것이랬다.


"어느 숙소 묵으셨어요? 저는 00 한인 민박이요."


"...저돈데요...?"


알고보니 같은 숙소, 다른 건물이었다. 놀라웠다. 이 운명 같은 만남에 언니가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언니는 어떻게 까미노를 걷게 되신 거예요?"


"저도 제가 지금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어요. 비행기표도 3주 전에 충동적으로 끊은 거예요. 심지어 한국 돌아가는 비행기표는 끊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까미노도 언제 포기하고 돌아갈지 몰라요."


그때는 그냥 '그렇구나' 했었다

언니조차 몰랐던 것 같다

언니조차 언니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몰랐던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에스더 언니는 우리 네 명 중 가장 먼저 산티아고를 완주했으며,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피스테라(Fisterra)까지 100km를 더 걸었다.


썬 언니는 학교 실습 일정으로

7월 말에 귀국을 하게 된다


세원이는 리스본을 여행하고 싶어

일정을 앞당겨 산티아고에 도착한다


에스더 언니는 결국 산티아고,

그리고 무려 피스테라까지 걸어간다


나는, 나만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각자만의 페이스를 찾아 걷게 되었다. 길 위에서의 만남 이전에도 그러했듯, 언제나처럼 우리는 다시 각자만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게 까미노구나,

삶이구나 싶었다


고로 길은 참 아름답구나 싶었다







나의 처음과 마지막을 함께한 에스더 언니와



이전 05화 돈은 없지만 46일 간 유럽 여행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