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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cilia Choi Nov 17. 2023

통나뭇가지를 향한 질주

용감하게 그리고 친절하게  - 아론 코플란드 발레모음곡 "빌리 더 키드"

요즘엔 케이블 방송도 있고, 넷플릭스 같은 OTT서비스도 잘 되어 있어서, 지나간 영화를 보는데 사람들이 별로 감흥을 느끼지 않는 편이지만, 90년대 당시만 해도 영화를 본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일이었다. 비디오가 보급되면서 한결 나아졌지만 그 전에는 영화관을 가거나 티비에서 방영되기만을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공중파 방송이 다였던 시대라, 꼬박꼬박 인기드라마를 챙겨보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종이 신문의 뒷쪽엔 티비 프로그램이 큰 지면을 차지하고 있었고, 당일 인기있는 드라마라던지 특별한 프로그램에 대한 내용이 조그맣하게 요약되어 있곤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현관문을 열면 차가운 공기가 코 속 깊이 느껴지고 늘 신문이 문 앞에 놓여있었다. 나의 신문 타임은 늘 학교를 갖다 온 후 였다. 부모님께서 이미 다 읽으신 신문 뒷면을 펴면 만화나 드라마라던지 매우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가끔 매일보는 만화가 결방되곤 했는데, 그럴 때면 툴툴대면서 속상해했던 기억이 난다.  


가끔 스타워즈라던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명화를 하는 날이면 두근거리며 어서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토요명화, 주말의명화라는 이름을 들으면 지금도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배경음악이 귀에 울린다.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눈을 반짝이며 광고가 어서 지나가기를 기다리곤 했는데, 인기영화일수록 어찌나 광고가 긴지 어린 마음에 조급해 하던 기억이 난다. 코쟁이 아저씨와 예쁜 아가씨들이 한국말을 어쩌면 저렇게 잘 하는지 -당시에는 성우라는 직업을 몰랐다-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의 세상이 아닌 어딘가 다른 세상에서 역경을 헤쳐나가고 결국 악당을 무찌르고 영웅이 되는 주인공의 이야기도 좋았고, 고양이상을 한 콧대 높은 아가씨가 세상을 겪으며 멋진 남성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도 좋았다. 밤 늦은 시간이었지만 졸린 줄도 모르고 티비에 빠져들었던 기억이 난다. 비단 나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그 시대를 겪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추억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런 나에게도 미리 포기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게 하는 영화장르가 몇몇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서부영화였다. 신문에서는 미남이라 찬양했지만 나에게는 그저 꾀죄죄한 아저씨였던 클린트 이스트우드나 그 비슷하게 생긴 역시 꾀죄죄한 아저씨들이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사막을 이리저리 헤매다가 조그만 피스톨을 누가 더 먼저 뽑나로 생사를 결정하는 스토리는  매우 지루했다. 다른 프로그램을 보고 싶어도 아버지의 확고한 취향에 따라 서부영화를 하는 날의 채널은 보나마나 고정이었다,


어째서 아버지세대가 "서부영화"장르에 열광하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나름 짐작하기에는 아버지세대가 자랄 때 마초적인 "사나이 스토리"가 크게 유행을 하지 않았나 싶다. 지금도 헐리우드에서 잊을만하면 유명배우들이 카우보이 장르를 찍는 것을 보면 그들 세대의 어떤 향수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도대체 카우보이의 어떤 점이 사나이의 마음에 뜨거운 불을 지폈을까?


거친 황야에서 펼쳐지는 무법천지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복수나 정의를 위해 권선징악을 실현하는 외로운 한 남자의 이야기는 매우 미국적인 장르이다. 같은 시대에 유럽 어디선가 말을 타며, 원주민을 쫓고, 총싸움을 하며 복수를 했다하면 당장 미개인 취급을 받았을 터인 상당한 기묘한 이야기이지만, 미국으로 무대를 옯겨가면 "그땐 그럴 수 있어"하며 용인이 되곤 한다. 카우보이, 총잡이, 보안관, 인디언까지 미국문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단어 아닌가. 더욱이 지금은 멸종(?)되어버려 경험을 하고 싶어도 경험할 수 없는 정말로 독특한, 나로서는 도저히 깊이 알 수 없는 신기한 세계이다.     

   

법보다 총이 먼저인 그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보나마나 영화와는 달리 정의따윈 없는 약육강식의 세계였을 것이다. 거칠고, 주먹이 먼저 나가고, 말을 타거나 싸우다 뼈 한 두 대쯤은 부러져도 "별일 아니야, 살아있으니 됐어"라고 넘어가는 그런 세계 아니었을까?


당연히 모래먼지가 듬뿍 묻어나는 이 거친 문화를 화폭에 담은 화가들도 존재한다. 지금까지 유럽 중심의 미술사에서 찾아 보기 힘든 이 대단히 미국적인 독특한 소재는 그들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했음이 틀림없다. 뛰어난 묘사로 생동있게 표현한 작품들을 보면, 사진보다 더 현장감을 느낄 수 있다. 마치 서부 카우보이들의 거친 숨결 날 것 그대로를 느낄 수 있다고나 할까?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얌전한 포즈를 지으며  미소짓는 꽃같은 아가씨들이나 그들 옆에서 여신을 숭배하듯 에스코트하는 잘 다듬은 외모의 말쑥한 신사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문명화된 인간이 원시시대로 떨어져, 다시 거친 환경 속에서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개척자들의 모습들이 대부분이다.


프레데릭 레밍턴 (1861-1909)은 한평생 거친 서부 소재만을 화폭에 담았다. 소를 모는 카우보이, 인디언의 추격전, 광야의 캠핑 등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미국 역사의 장면들이 그의 작품이다. 어떤 작품에서는 거친 사나이들의 사냥장면이 역동적으로 펼쳐지는가 하면, 쓸쓸한 광야에서 홀로 서 있는 인디언을 그린 그림에서는 처량함마저 느껴지기도 한다. 대부분의 작품이 1889년에 그려진 "통나뭇가지를 향한 질주 (a dash for the timber)"처럼 영화의 한 장면처럼 하나의 긴 스토리를 담고 있다. 섬세하면서도 사실적인 묘사 덕분에  바람소리, 고함소리, 말발굽소리 그리고 총소리의 소음 사이로 등장 인물들의 대화소리조차 들리는 듯 한 착각마저 들기도 한다.  


그림을 보며 저 멀리 따라오는 추격대를 피해 도망가는 한 무리의 카우보이들을 보고 있으면 많은 의문이 든다. 숨을 곳 없는 넓은 황야에서 그들은 도대체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추격대가 따라오는 것일까? 누가 선이고 악일까? 무리 중 총을 맞은 듯한 이의 앞으로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총을 쏘느라 정신없는 와중에 무리 앞에 통나무가지를 과연 무사히 뛰어넘을 수 있을까?   


인디언으로 추정되는 추적대를 피해 달아나는 이들의 운명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이미 한 명은 총을 맞아 말에서 곧 떨어질수도 있다. 간신히 옆의 동료가 그의 고삐를 잡아채는 듯 하지만 말이다. 저 멀리 왼쪽의 인물이 동료들의 앞에 놓인 큰 나무가지를 발견하지만 총을 쏘느라 정신없는 그들에게 경고할 타이밍을 놓친 것 같다. 이미 숫적으로 열세인 그들은 이 모든 난관을 뚫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시끄러운 총소리 사이로 거칠게 숨을 쉬는 말의 숨결이 느껴지는, 생생함을 넘어 절박함마저 느껴지는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긴장을 하며 주먹을 불끈 쥐게 된다. 악역인지 선역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들이 꼭 살아남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이렇게 보는 이를 홀리게 만들 정도로 화가의 솜씨가 뛰어나다는 소리다.


당연히 레밍턴의 미술작품만큼, 흥미진진한 서부의 한 장면을 묘사한 음악작품도 존재한다. 흔히 인디언이 나오고 총을 빵야빵야 쏘는 개척시대의 미국문화를 연상시키는 음악작품이라면, 이미 소개한 적이 있는 드보르작의 현악 사중주 "아메리칸"를 떠올리겠지만, 가장 미국적인 작곡가라 해도 손색이 없는 아론 코플랜드의 발레 모음곡 "빌리 더 키드"는 더욱 구체적이다.


요즘엔 디즈니처럼 영화음악도 클래식 공연장에서 흔하게 연주되는 세상이지만 십년, 이십년전만 하더라도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인형이 최고의 크리스마스 음악 레퍼토리이던 시절이라 존 윌리엄스의 영화음악을 연주하는 것도 드문 일이었다. 그런데 생경한 나름 현대음악작곡가에 속하던 아론 코플란드의 곡에 제목이 "빌리 더 키드"란다."카우보이인가? 뭐하는 사람이야?"하며 이름부터 범상치 않다 했더니 "빌리 더 키드"는 실제로 존재한 카우보이가 아니라 범죄자라는데서 고개가 갸우뚱거렸다. 위키도 없던 시절이라 지휘자 선생님의 설명에 이런 저런 썰을 이어 붙이니, 21명이나 죽인 전설적인 범죄자인데, 그를 소재로 한 소설이 있고, 작곡도 하다니, "미국인들 취향이 참 독특하군"이라며 동방예의지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역시 코쟁이 오랑캐는 어쩔 수 없구만"이라고 생각했었다.

 빌리 더 키드,  탈옥에 성공해 전설이 되었지만 곧 사살당한다

들어보지도 못 한 생경한 음악을 이해시키고자 지휘자 선생님은 많은 노력을 하셨는데, 묘하게 그의 모습이 서부영화를 재밌게 시청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보이는 것은 나의 착각이었을까? 광활한 초원에서 시작되어, 개척마을에서 펼쳐지는 신나는 댄스, 그리고 야밤의 카드게임, 이어지는 총싸움, 그리고 빌리의 죽음과 함께 다시 광활한 초원으로 끝나는 한 서부 개척시대 악당의 삶이 차례로 펼쳐지는데, 음악 내내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이 총싸움 장면에서 최고조에 이를 때에는 정말로 황야 한 가운데서 총을 들고 서 있는 결투의 주인공이 된 것같기도 하다. 어쨌든 최고의 악당도 죽음을 피하지 못 했지만, 서부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진다.


별 탈 없이 연주회도 끝났고, 결투장면에선 신나게 연주했던 기억이 나지만, 무언가 특별한 기억은 없다. 누군가가 묻는다면 "조금 특이한 곡을 연주했었어"라고 답할 정도랄까. 음악을 통해 다른 문화를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은 늘 재밌는 일이지만, 아빠의 "총잡이" 영화처럼 그다지 마음에는 안 와닿는 스토리였다고나 할까? 그래서 지금 생각해보면 열정적으로 설명해주시건 지휘자 선생님에게는 조금 아쉬었던 연주가 아니었을까 싶다. 자신의 애정에 비해, 학생들은 서부 카우보이 문화에 대해 심드렁했으니 말이다. 그에게 동양의 어린 여자가 대부분인 오케스트라에서 "빌리 더 키드"의 분위기를 살리는 것은 또 하나의 모험이 아니었을까?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예술작품을 바라보는 것에 관점이 변하는 것을 느낀다는 것은 재밌는 일이기도 하면서 씁쓸한 일이기도 하다. 이제 나는 지휘자 선생님의 심정을 이해하지만, 다시는 생경한 음악을 연주하며 입을 삐쭉거리던 어린 소녀의 풋풋한 감정을 느끼지 못 한다. 세상일은 더 이상 신기하고 재밌는 새로운 일로 가득차지 않은 그저그런 일상의 반복이 되었지만, 문제가 생기면 당황하지 않고 능숙하게 해결할 줄 아는 여유가 생겼다. 마치 모든 것이 새로워 실수를 반복하던 어린 견습 카우보이에서, 낡은 가죽모자를 쓰고 사막에서 능숙하게 불을 피우고 추위나 도적떼들 따위는 대수로워하지 않는 중년의 카우보이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삶이 쉬워진 것은 아니다. 매일 투덜거리며 소를 몰고 나가는 카우보이나, 악당을 잡으러 다니는 보안관들이 그렇듯 나 역시 매일의 삶이 그렇다. 시간과 장소가 변했어도 치열하게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도 어쩌면  서부극의 한 장면과 별반 다를게 없지 않을까?


그래서 가끔은 일상의 짜증을 조금은 느긋하게 흘려 보내고자 한다. 잠시 악당을 찾던 것을 멈추고 총을 주머니 어딘가에 넣어둔 채 한가롭게 펍에 앉아 술을 마시던 카우보이들처럼 말이다. 그리고 다음의 말을 늘 되새긴다: "네가 만나는 모두가 네가 전혀 알지 못 하는 싸움을 치루는 중이다. 친절해라. 언제나 (Everyone you meet is fighting a battle you know nothig about. Be kind. Alw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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