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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cilia Choi Mar 17. 2024

고통의 예수

언제나 기댈 수 있는 곳 - 그레고리안 성가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지만 아직까지도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몇가지 있다. 그 중 한가지가 바로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다. 종종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다: "어째서?"


굳이 코로나까지는 아니더라도 최근 몇 년간 힘든 일이 많았다. 모난 돌이 깎이는 과정이라 생각하며 참고 또 참았다. 그런데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내 잘못이 아니다. 당장 자기 가족과 자신의 궁색함을 변명하는 횡령범의 뻔뻔함에 화도 안 난다. 거짓말, 거짓말...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이다. 역겹지만 일을 해결해야하기에 우선 감정을 억누른다. 


역겨운 인간을 한창 대하고 나면 정신적인 공허함이 찾아오며 삶이 조금씩 망가진다. 죄를 지은 건 내가 아닌데 왜 고통받는 건 나인가? 횡령범과 그 가족들은 돈만 메꿔넣으면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 그것도 최소로 축소하고, 있는 한도에서 배상하겠단다...- 내 정신적 피해보상은 어떻게 받지?


그가 그간 나에게 뻔뻔하게 자랑하던 것을 생각한다. 부인과 아들이 차렸다는, 계절에 따라 변하는 가로수가 훤히 보이는 뷰가 좋은 카페를 자랑하고, 이어서 자기 딸이 사줬다는 자동차를 자랑하며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 이 일 안해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요, 아저씨? 돈은 왜 횡령하셨어요? 그것도 억대로...카페가 잘 안되셨나요? 


본인은 카페와 횡령금은 무관하며, 모두 생활비로 썼다고 하는데...그 돈을 생활비로 썼다면 백화점 VVIP 등급이다. 네들은 써보기라도 했지...난 써보지도 못 했다...억울해야 하고 속상해야 하는 건 나인데 뭐가 그리 억울한지 모르겠다...희안하다.


오늘도 나는 자기 전에 그레고리안 성가를 틀어놓는다. 그 횡령범이나 그 횡령범 또는 나를 원망할 지 모르는 그 가족들이나, 그리고 내가 겪고 있는 모든 고통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사탄아, 물러가라~훠이! 기댈 곳은 종교뿐이라...우선 나의 죄에 대해 용서를 빌고 이어서 그 나쁜 것들에게 벌이 내려지기를 빌고 또 빈다. 아직 용서와 관용은 나에게 먼 이야기다. 


가시면류관을 쓰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내가 밴댕이 속을 가진 길 잃은 양이겠지만, 솔직히 길이고 집이고 뭐고 이 광야를 더 돌아다녀야 내 속이 풀릴 것 같다. 거의 대부분이 문맹이던 시절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을 더욱 강조하기 위하여 화가들은 그의 겪은 고통을 강조하여 그렸다. 


나 역시 지금 예수님의 그림을 보면서 생각한다. 내가 겪은 고통이 과연 그가 겪은 고통에 비할 만 한가? 인간들의 작태를 보면 그의 희생이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그가 치른 희생을 생각하면 그 횡령범을 용서해야 하는 것인가? 


아직도 답을 모르겠지만 기도를 하면서 위안을 얻는다. 횡령범과 그 가족이 신나게 써버린 사라진 돈을 돌아오지 않지만 말이다. 아직도 세상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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