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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는 지금 Dec 08. 2023

처음 만난 이스라엘.

때는 4년여전. 2019년 10월이었다. 이제 두 돌을 향해가는 첫째를 데리고 이스라엘로 가겠다고 발표했을때 어느정도 예상은 했지만 양가 부모님과 형제들의 반대는 거셌다. 


하루가 멀다하고 전화상으로 왜 우리가 여기를 가는지 설명해야 했고 왜 하필 위험한 ( 여전히 뉴스나 언론으로 나타나는 이스라엘의 이미지는 중동의 갈등지역이며 그저 많이 먼 나라였다.) 


그 나라에 그것도 아직 어리디 어린 아기를 데리고 가려느냐고 한사코 말리는 가족들의 설득을 묵묵히 듣는 것으로 통화는 끝났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울판(히브리어 코스) 등록과 비자 준비는 차근히 진행되었다. 


청계천에 위치한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를 들렀던 때가 나에게는 이스라엘과의 첫 만남이었다.


나에게 비자 인터뷰는 늘 긴장된 기억으로 남아있다. 15여년도 전 전 미국 학생비자를 받으러 미대사관에 갔던 날. 나는 대사관 앞에 긴 줄로 이어진 행렬에 놀랐고 대사관 안의 삼엄한 경비와 딱딱한 분위기에 두번 놀랬다. 물론 비자는 문제없이 잘 발급되었지만 지금도 그 미국인 영사앞에서 "나는 반드시 학업 후 한국으로 돌아올것이다"를 설명하다가 떠듬 되었던 기억이 남아있다.


그랬기에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서도 괜시리 긴장되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대사관 안으로 들어섰다. 소지품 점검 등 기본적인 절차가 짧게 끝나고 드디어 영사를 만나는 시간. 우리 세 가족은 다들 약간 경직된 채로 면접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를 맞아준 사람은 환하게 한국말로 "안녕하세요!"라며  맞아준 여자 영사분이었고 우리 아들에게 초콜릿 과자를 내밀며 미소 지어주는 모습에 처음보다 훨씬 편안하게 인터뷰를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이스라엘은 환한 미소로 나에게 처음 인사를 건네주었다.


열 시간여의 비행. 중간에 경유 한번. 씻지도 못하고 꼬질꼬질하게 도착한 벤구리온 공항 밖은 차분히 가을비가 내리는 밤이었다.  몸도 마음도 지친 나에게 입국 심사는 또 하나의 긴장코스였다. 그때 내 머리 위로 큰 노티스 보드가 보였고 선명한 글자로 " Welcome to Israel" 라고 적혀있었다. 그 의례적인 인삿말이 나에게는 나만을 위한 환영식같았다. 그렇게 긴장된 마음을 또 한번 쓸어내리며 이스라엘, 그 땅위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시작된 예루살렘 생활. 

눈을 뜨면 시간에 맞춰서 모스크에서 기도소리가 울려퍼졌고 (아랍인 동네 근처였음) 그 소리를 들으며 높은 지대를 찾아 올라가면 예루살렘의 상징과도 같은 서쪽 벽 (통곡의 벽) 과 황금 사원의 돔이 번쩍이는 예루살렘 전경이 펼쳐졌다.


숙소 가까운 곳에 위치한 히브리대에 들어갈때면 언제나 스크리닝을 통과하고 여권을 제시해야 했는데 "샬롬"하고 인사하면 우리 어린 아들을 바라보며 환하게 "샬롬"해주던 경비 아저씨를 늘 만날 수 있었다. 

히브리대에서 만난 유대인, 아랍인 여학생들은 우리 첫째가 BTS의 누구누구를 닮았다며 웃어주었고 예루살렘 성벽 근처에서 만난 유대인 고등학교 여학생은 BTS의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춰주기도 했다. 한 여학생은 진지하게 " 왜 그 좋은 한국을 놔두고 여기 왔느냐고" 물어보길래 대답해주었다.


 " 우리 가족은 이스라엘을 참 좋아해요."


신학생으로 처음부터 이스라엘에서의 생활을 주욱 염두해 두고 있었던 남편과는 달리 나는 이스라엘에 꼭 가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처음 경험한 이스라엘은 분명 나에게 익숙한 영미권 문화와는 사뭇 달랐다. 그곳은 또다른 세상이었다. 낯설고 투박하고 무뚝뚝해보이는 그 세상안에 숨겨진 보석들을 발견하고 싶었다. 거리나 마트에서 만나는 이스라엘 여성들은 수줍어보이기도 했고 굉장히 강해보이기도 했다.


거리에는 총을 들고 있는 이스라엘 군인들과 경찰들은 언제나 만날 수 있었다. 유대인 정통 종교인들은 우리와 같은 외국인들을 데면 데면 바라보았다. 그러나 어떤 위협감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들 역시 우리가 다른 세상 사람들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거리를 뛰어다니는 유대인 아이들의 나폴거리는 머리카락과 "샬롬"하는 인사와 함께 건네주는 정감 어린 미소를 기억한다. 

10명은 족히 되어보이는 자녀들과 함께 든든한 표정으로 트램을 오르던 유대인 부부를 기억한다.

양 손에 새근 새근 잠든 아기들을 누인 아기 바구니를 들고 예루살렘 성벽을 향해 가던 유대인 아빠의 듬직한 뒷모습을 기억한다.

통곡의 벽에서 떨어졌 있다가 이제야 다시 만난 가족의 얼굴을 어루만지듯 그 옛적 성벽에 손을 올리고 기도하던 그들을 기억한다.

정성스럽게 검정색 모자와 슈트를 차려입고 회당을 들고 나던 그들의 모습도 떠오른다.


강렬하던 햇살과 바람. 왠지 다시 올 것 같았던 유대광야를 기억한다.

잔잔하고 한없이 아름다웠던 갈릴리 바다를 기억한다.

그저 눈물로 기도하게 되던 겟세마네 동산을 기억한다.


그 눈물을 훔치고 먹었던 슈와르마( 이스라엘식 버거)의 환상적이었던 맛을 기억한다.


많은 기억들이 여전히 남아있지만 아쉽게도 그 안에 무궁히 숨겨져있을 이스라엘의 보석들을 난 아직 제대로 발견을 못한것 같다.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가 터졌고 가택 연금상태 처럼 지내다가 둘째 임신과 더불어 또 집에서만 지내다가 귀국을 했다.


이제 다시 만나게 될 이스라엘. 


찬찬히 걷고 찬찬히 보고 꼭꼭 씹으며 맛보고 잘 듣고 그들의 깊은 두 눈을 마주하며 꼬옥 이스라엘 곁으로 한걸음 더 다가서보려 한다.


사람이든, 한 나라든. 다가서는 만큼 알려고 하는 만큼 보이고 친해지는 법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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