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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미곰미 Jan 06. 2024

할머니의 사생결단

단식투쟁으로 일궈낸 승리인 듯 승리 아닌...

12월로 들어서며  독감이 유행이었다.

여기저기 몸살 나고 감기로 아프신 분이 꽤 있었다.

그즈음에 라라할머니도 토요일에 친구분과 함께 어딜 다녀오신 후로  수요일쯤부터 기침을 하시더니 몸살을 하셨다. 처음에 어깨랑 팔이 너무 아프다고 하시더니 다음날엔 등이 아프다고 하셨다. 다행히 열은 없었다.

 그다음 날은 다리가 아프다고 하셨고 나중엔 손가락 발가락까지 아프다고 하셨다.

 그렇게  꼬박 일주일을 힘들어하셨다.

증상이 아무래도 그 당시 유행하던 독감인듯했다. 정해진 방문 시간 외에도 수시로 오고 가며 간호를 해드렸다.


할머님이 괜찮아지실 때쯤 내 몸이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했다. 처음엔 으레 갱년기증후군이겠지 했는데 아니었다. 나도 독감에 걸린 거였다. 그렇게 아파보긴 처음이었다. 그런데 아프다고 자리보존하고 누울 상황이 아니었다. 회복되고 있긴 했지만 할머님이 편찮으시니 약을 먹고 할머니를 뵈러 갈 수밖에 없었다. 1년에 먹을 진통제를 그 일주일에 다 먹은듯하다.  그래도 내가 감기를 옮긴 게 아닌 게 그나마 다행이라 계속 간호해 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젊은 나도 독감에 이리 맥을 못 추는데 할머님은 정말 힘드셨겠다 싶었다.


그렇게  할머니와 똑같은 증세로 아프고 난 후 한주정도 지나고 나니 나도 괜찮아졌다.

그때가 크리스마스 한주전쯤이었다.


 내가 조금 나아지니 그때부터  라라할머님이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데도 딸은 동생이나 나를 통해서만 소식을 전했다.

 그 소식이란 것도  주로 약사인 딸이 할머니의 약이 떨어질 때쯤 우편으로 약을 보내오는 게 다였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새해가 가까워지는데 전화도 안되고 연락도 없으니 화도 내셨다가 욕도하 셨다가 하시며 우울해하셨다.

그러시면서 또 여러 가지 약을 과하다 싶을 만큼 이런저런 이유를 대시며 잡수셨다.

그러시더니 할머니는 입맛도 없고 소화가 안된다며 활명수만 자꾸 찾으시더니 하루하루 지나갈수록  식사를 거의 하지 못하셨다.

그런 상태에서 잠이 안 온다며 수면제도 많이 드시는듯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이브날 아침에 아드님한테서 연락이 왔다.

새벽에 어머님이 전화하셔서 죽을 거 같다고 유언하듯 하셔서 결국 응급실로 모시고 갔다고 했다.

식사를 하지 않으셔서 몸의 모든 바이탈 수치가 다 떨어진 상태여서  입원을 하셨다.

결국, 그 상태가 되니 따님은 크리스마스날에 가족들과 함께 할머니의 병실로 왔다.


뒷날 병원을 찾았을 때 할머니는 상태도 훨씬 호전되어 보였고 기분도 좋아 보였다.

따님 오셔서 좋았냐고 여쭈어보니  웃으시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러시며 하신 말씀이 "작전성공"이라고...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깜짝 놀랐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쳐다보니 "지가 안 오고 배겨" 하셨다.

딸의 생일과  땡스기빙연휴를 지나면서도 오지 않는 딸을 기다리며 화도내시고 욕도하시고 우울해하시더니 크리스마스 때마저 오지 않는 딸을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었나 보다.

감기로 아프다고 해도 따님이 반응이 없으니 그 이후로는 의도적으로 '단식투쟁'을 하셨던 거였다.


앞으로 그러시면 안 된다고 큰일 난다고 말씀드리고 긴병에 효자 없다는데 그러시다가 그렇게 가기 싫어하시는 양로병원 가시면 어떡하냐고 말씀드리니 어떤 놈이 날 거기로 보내냐고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으셨다.

그러시더니 이제 식욕이 도시는지 사다 드린 전복죽과 병원에서 나온 연어구이로 식사를 맛있게 하셨다.

그리곤 이제 좀 살 것 같다고 하셨다.


할머니의 전쟁이 승리로 끝난 듯 보였지만 이건 승리가 아니었다.

따님과 오랜만에 만나서 얘기 많이 하셨냐고 여쭈어보니 얘기도 별로 안 했다고 그냥 애들 키운다고 네가 고생이 많다고 한마디만 하셨다 했다.

 딸은 닥터한테 들은 얘기와 메일로 확인한 할머니의 상태에 대해 몇 마디 하더니 자기 자식들만 챙기더라며 또 섭섭함을 내비치셨다.

크리스마스날이고 병원에 입원을 하셔서 이 가족과 함께 할머니를 방문하긴 했지만

아직 마음이 풀어진 것 같진 않은 듯했다.


새해 첫날 저녁에 할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새해가 시작되고 건강이 회복되신 머니는

떡국을 끓여놓고 기다렸는데 아무도 오지 않고 전화도 안 받는다고 나보고 전화를 해보라고 하셨다.

'헉!! 이건 또 뭔 일이야... 내가? 왜?'

할머니가 부탁하시니 할 수없이 자녀분께 문자를 보냈다.

아들은 토요일 갔다가 어머니랑 한바탕 싸우고 와서 일부러 안 간 거라고 했고

은 당분간 어머니랑 연락하고 싶지 않다고, 공황장애가 재발해서 힘들다고 했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고 번번이 이런 식이라며...  이미 여러 번 반복된 일에 아들과 딸은 이미 마음이 닫힌 상태였던 거였다.

문제는 오래전부터 반복된 할머니의 거짓말에 있었다. 이번 일이 기어코 따님 기를 꺾으려는 할머니의 작전이었단 걸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었던 거였다.


마치 엉켜버린 실타래처럼 시작도 끝도 찾을 수 없는 감정의 골을 어디서부터 풀 수 있을지...

화해하는 법도 사랑하는 법도 잘 모르시지만 조종하는 방법을 연구하신 할머니는 이번에도 이렇게 가짜 승리를 통해  전혀 행복하지 않은 짧은 항복을 받아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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