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어머니 돌아가셨다. 아니면 아마도 어제, 모르겠다. 양로원에서 전보가 왔다. ‘모친사망. 내일 장례식. 친전’ 아무 의미가 없다. 아마도 어제였을 것이다.”
누가 어머니의 죽음을 이런 식으로 말하는가?『이방인』의 첫 구절은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무관심, 죽음이라는 중대한 사건보다 마치 날짜가 더 중요한 것처럼 보이는 내용, 게다가 맞지도 않는 시간 순서… 오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하고 나서 어제 그것을 알리는 전보를 받았다니?
소설의 도입부가 단번에 작품의 주제인 인간 의식의 부재를 알려주고 있다.
1942년 발표된 프랑스 작가 카뮈의 작품『이방인』이 소설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지금까지 필독서 목록에 남아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주인공 뫼르쏘의 등장과 함께 의식 있는 주체로서 소설의 등장인물이 사라지고, 한 인물이 사는 인생의 궤적을 추적하는 소설의 줄거리가 사라졌다.
소설이란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이 그것을 성취하거나 좌절하는 과정을 줄거리를 구성해 인간 현실을 보여주는 문학의 한 형식이었다. 20세기 초반까지 서양 문학의 경우다. 사건이 극적으로 연쇄되어 파국을 향하는 인과적 일관성을 갖춘 줄거리가 소설의 내용이었다. 그러나『이방인』의 주인공에게는 어떤 욕망이나 목표가 없다. 오늘을 어제처럼, 어제를 오늘처럼 사는 기계적인 생활에 매몰되어 있다. 그는 말한다. “나는 그런 식으로 살았지만, 다른 식으로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어떤 일을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의도도 의지도 없고 어떤 계획도 없다. 1인칭 독백의 형식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보는 것은 텅 빈 의식뿐이다. ‘아마도’, ‘모르겠다’와 같은 단어들이 이러한 의식의 부재를 더욱 강조한다. ‘아무 의미가 없다’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혼잣말은 한 학자가 잘 표현했듯 ‘피곤이 깃든 무관심’이다. 짧은 도입부뿐 아니라 소설 전체의 톤이 그렇다. 의식이 있는 주체가 아니므로 책임을 질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없다.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이다. 살인을 왜 저질렀는가 라는 질문에 ‘태양’이라는 대답을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견딜 수 없는 뜨거움 때문에, (…) 방아쇠가 밀린 것이다.”
알제리의 수도 알제는 내게 오랫동안『이방인』의 도시였다. 공항에서 해안가 도로를 따라가며 얕은 산에서 지중해를 바라보고 있는 도시 알제를 처음 만났다. 뜨거운 햇살, 건조한 공기 속에 종려나무가 늘어선 도로… 후세인 데이, 무스타파, 히드라, 엘 비아르, 드라리아… 팻말에 적힌 지명들이 이국적 분위기를 흠뻑 느끼게 했다. 저 멀리 높은 곳에서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순교자의 추모탑’, 신호등 없는 거리, 발까지 오는 통 원피스를 입은 여자들, 파리와 비슷한 건물이 늘어서 있는 중심가 도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흰색 건물…『이방인』의 도시는 아니었다.
낯설고 선뜻 마음이 가지 않았다. 어둡고 무겁고 우울한 도시였다. 높낮이가 심한 지형에 구불구불 난 길들은 좁고 옹색해 보였고 사람들은 의기소침하고 침울해 보였다. 『이방인』과 무관하게 10년간의 잔인한 내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기 때문이라는 것은 후에 알제리 역사를 탐구하고 나서 알았다.
알제에 도착하면서 카뮈를 떠올린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카뮈의 고향 알제리”라고 감격하는 『이방인』의 독자를 여러 명 보았다. 알제뿐만 아니다.『페스트』의 배경인 ‘오랑’도 있고, 바다 위로 쏟아지는 햇살과 입 속에 남아 있는 소금기를 묘사한 ‘티파자’도 있고, 로마제국의 폐허 위로 바람이 분다는 ‘제밀라’도 있다. 카뮈를 통해서 알제리는 우리에게 문학적 상상의 공간이 되었다. 알제리 사람은 만나면 거의 자연반사적으로 카뮈를 언급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노벨상의 작가 카뮈라는 이름을 들은 알제리 사람들은 대개 침묵한다. 카뮈가 알제리 사람과 가까워지는 데 특별히 좋은 카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카뮈는 알제리 태생 프랑스인이었다. 식민지에서 태어난 ‘본토인’이었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 쥐라 산맥에서 식민지로 이주한 노동자였다. 스페인 출신 여성과 결혼했던 그는 1차 대전에서 전사했고, 그의 아내는 가정부로 일하며 어렵게 두 아들을 키워야 했다. 일자리를 찾아 돈을 버는 것이 급했지만, 둘째 알베르는 철학과 문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를 알아본 교사의 도움으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프랑스로 건너가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했고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파리에 주로 머물렀지만 알제리에 대한 그의 관심과 애정은 각별했다. “나는 내가 태어난 이 땅을 열정적으로 사랑했다. 거기서 나의 모든 것을 퍼올렸다.” 알제리는 카뮈에게 문학적 영감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알제리는 카뮈가 목가적으로 서술했듯 “행복, 활력, 창조의 땅’이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인종적 차별, 부당한 착취, 빈곤과 고통이 1세기 넘게 지속되어 병든 땅이었다. 카뮈가 활동하던 시기 프랑스의 식민지배는 말기에 이르러 있었다. 상황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다. 병역과 같은 의무만 부과하고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던 피식민지인들의 위상을 다시 생각해야 했다. 알제리인을 시민으로 수용하는 ‘동화정책’의 실시는 불가피했다. 그러나 프랑스인 이주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격렬하게 반대했다. 자신들보다 8배 많은 알제리인의 참정권을 인정하는 것은 그들 위에 군림하며 누려왔던 기득권을 잃는 것을 의미했다.
해결책이 받아들여졌다면 알제리는 지금까지 프랑스 영토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알제리인들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결국 총을 들었고 50만 명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희생을 겪으며 독립을 성취했다. 독립 전쟁이 끝나자 100만 명 프랑스인 이주자들이 추방되었다. 곧 다시 돌아올 것으로 믿고 알제 항구에서 배를 타고 떠났지만,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이방인』을 읽는 것으로는 알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카뮈는 알제리인들이 프랑스인이 되는 것에 찬성했다. 그러나 알제리가 한 나라로 독립하는 데는 반대했다. 알제리 땅은 알제리인뿐 아니라 정착한 지 이미 100년이 넘은 이주자들의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나는 프랑스인으로 알제리를 사랑한다.” 카뮈의 입장을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알제리를 프랑스의 일부로 편입하는 연방제를 실시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그의 의견은 프랑스인 정착자와 알제리인 양편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프랑스인 정착자들은 그를 배반자로 취급했으며, 알제리인들은 그들대로 ‘선량한 식민자’라는 환상을 심어 주어 투쟁 정신을 무력화하는 위험한 인물로 취급했다. 폭력을 반대했던 그가 노벨상 수상 식장에서 했던 “정의보다 어머니를 선택하겠다”는 말은 알제리인들과 돌이킬 수 없이 결별하는 계기가 되었다. 독립을 반대했던 ‘정치적 오류’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지금까지도 논쟁의 주제로 남아 있다.
카뮈의 작품에 묘사된 알제리의 도시들은 물론 현재의 참조점이 아니다. 알제는『이방인』에 묘사된 나른하고 무기력한 도시가 아니라, 인구의 절반이 30세 이하인 활력에 넘치는 아프리카의 최대 도시다. 오랑도 마찬가지다.『페스트』에 등장하는 음산하고 권태롭고 “솔직히 추한” 도시가 아니라, 밝은 햇살 아래 국제 문화 행사들이 활발하게 열리고 월드 뮤직 ‘라이(raï)가 울리는 문화 도시다.
알제는 갈 때마다 달라졌다. 지금은 거의 다른 도시가 되었다. 건물이 늘어나고 밝아졌다. 해안을 따라 건설된 자동차 전용도로에는 자동차가 넘치고 해변에는 사람들이 넘친다. 미로처럼 얽힌 골목은 노는 아이들로 넘치고 거미줄처럼 얽힌 길에는 젊은이들이 넘친다. 2만 명을 수용하는 거대한 모스크에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는 도시, 밥 에주아르 이공대 재학생 3만 5천 명을 포함한 6만 명의 학생들이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도시 알제가 내뿜고 있는 공기는 싱싱한 역동성으로 넘친다.
독립한 알제리 정부는 학교 교재에서 카뮈의 작품을 모두 제외했다. 2천 년대 들어 알제리 학계와 문화계를 중심으로 카뮈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되었지만, ‘귀환’을 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2010년 카뮈 작품을 주제로 연구자들이 조직한 대학 순회강연은 여론의 반대로 취소되었다.
카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알제리인이 어떻게 느낄까를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와서 일제 강점 당시 일본인 작가의 기억을 순례하겠다고 하면 반갑겠는가?
* 가깝고도 먼 프랑스
알제리가 독립하면서 프랑스는 물러갔지만 두 나라 관계가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되기도 어렵다. 파리-알제 간 항공 시간은 2시간이다. 하루 최소 15편 항공기가 승객을 실어 나른다. 지중해 해안지대에 몰려 사는 알제리 사람들은 같은 나라 안에 있는 사하라 유목민들의 도시 타만라세트보다 파리를 더 가깝게 느낀다. 표지판이나 간판에서 프랑스어가 줄어들고 있지만 알제리는 프랑스 다음으로 프랑스어 인구가 많은 나라다. 프랑스 TV 채널을 위성 안테나로 직접 시청한다. 파리에서는 알제리 출신들이 영화, 문학, 스포츠, 패션 등의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프랑스 축구 국가 대표팀의 그 유명한 선수 지단은 부모가 알제리 출신이다. 인종적 구분에 따라 통계 자료를 만드는 것이 금지되어 있어 정확하지는 않지만 프랑스인으로 귀화한 사람들을 포함한 알제리계 인구를 300만으로 추정한다.
알제리 사람들은 132년이라는 긴 식민지배 기간 프랑스가 저질렀던 수많은 죄과에 대해 참회와 사과를 요구한다. 사석에서 분노를 조절하지 않는다. 프랑스 정부는 과오를 인정하는 데 인색해 보이지 않는다. 역대 대통령들이 여러 차례 공식 사과했다. 그러나 번번이 일관성 없는 태도로 진정성을 의심받았다. 시락 대통령은 알제리를 방문해 사과했지만 다음 해 프랑스 식민지배의 ‘긍정적 역할’을 역사 교과서에 기재하는 법안이 의회에서 통과되면서 양국 관계가 냉각되었다. 사르코지 대통령도 사과하고 나서 프랑스 군에 복역했던 알제리인 제대 군인들을 접견해서 알제리인들을 분노하게 했다. ‘하르키’라고 불리는 이들은 알제리인들에게 독립전쟁 동안 프랑스 편에서 같은 나라 사람들을 죽이는 데 가담했던 배반자들인 것이다. 올랑드 대통령도 “식민지배가 알제리인에게 준 고통을 인정”하고 “참회와 사과”를 했다. 그러나 아프리카에 주둔하고 있는 프랑스 군을 알제리가 지원하는 대가가 아니었겠는가 의심을 받고 있다.
식민지배에 대한 평가는 어느 정도 양측이 합의에 이르러 있다. 그러나 독립전쟁에 대해서는 아직도 양측 첨예하다. 프랑스 정부는 되도록 언급을 피한다. 현 정권에 대한 비판도 최대한 자제한다. 다만 프랑스 언론은 역사에 대한 평가가 불공정하다고 주기적으로 지적한다. 프랑스 군의 활동은 대체로 공개되었고 비판을 받았지만, 알제리 독립군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덜 조명되었다는 것이다. 알제리 독립군이 프랑스에 대한 적대감을 유발하기 위해 자국민을 살상했으며, 독립군 내부에서도 권력 투쟁이 벌어져 서로 죽였다는 사실을 터부시 하며 함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카뮈의 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