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 여러 번 오가면서 알게 된 것이 무엇이었지? 그렇게 물으면 할 수 있는 말이 그다지 많지 않다. 부끄러워진다. 번번이 목적이 있었고 짧았던 체류였다. 서류 작성에 필요해서 거의 하루가 걸리는 그 먼 곳까지 갔다가 하루 밤을 지내고 특정 인사의 서명을 받아 다시 하루를 걸려 돌아온 일도 있었다. 알제리 우편 업무가 느리고 불확실해서 서명을 받은 서류를 언제 다시 받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도저히 마감 시간에 맞출 수 없을 것 같았다.
알제리를 가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알려고 하는 인류학적 호기심은 많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나중에 생각하면 그 반대가 되었어야 했었다. 그들을 알려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어야 했다. 성사되지 않았던 일이나 성사되었어도 길게 지속되지 않은 일들보다 그것이 더 중요한 일이었다. 그때 알았더라면! 과거 시간은 그런 잡다한 후회들로 가득하다.
여러 차례 방문에서 남은 것은 주마간산으로 스쳐 지나간 풍경들 그리고 사람들을 만나고 서로 나눈 인사, 몇 마디 말들, 흘깃 보았던 눈길, 때로는 깊은 말을 하기도 했던 눈빛들이다. 피상적이고 주관적 인상들이다. 그들을 알기 위해서 책을 읽었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많았다. 그러나 서적에서 얻은 정보들은 이해를 보충해 주었지만, 살과 피가 말해주는 인간적 이야기는 아니었다. 내 지식이 될 수 없는 날 자료들이었다. 가장 아쉬움이 남는 것은 여자들과 내밀한 이야기를 할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이다.
레일라, 파리다, 야미나, 살리마, 말리카… 대체로 모음으로 끝나는 부드럽게 울리는 이름들이다. 여러 의미를 담아 무거워진 우리 이름보다 순하고 상냥하다. 산들바람 같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어머니 이름인 파트마, 첫 아내 카디자와 마지막 아내 조흐라도 빼면 안 된다. 나는 이 예쁜 이름의 여자들을 깊이 있게 사귈 기회가 없었다. 같이 일할 기회가 있었던 혹은 방문에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은 모두 남자들이었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 온통 남자들이었으니 나도 그 커뮤니티 속해 있다고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던 것 같기도 하다.
가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의식하게 하는 일이 있었다. 식사에 초대받아 가면 중간에 나를 일어나게 해 부엌으로 가서 식사를 준비한 부인들과 인사를 시켜주었다. ‘남자들의 나라’에서 베푼 배려였다. 간단한 원피스에 긴 머리를 늘어트린 여자들은 얼마나 예쁘던지! 여자들이란 ‘피트나(fitna: 아랍어: 유혹, 무질서)’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는 이슬람 문화는 그래서 생겼을까? 처음 보았을 낯선 동양 얼굴을 활짝 웃으며 반가워했다. 나는 마치 남자들이 하듯 부인의 요리 솜씨와 노고를 치하하고 돌아 나왔다. 손을 잡고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뭘 한 거지? 식탁을 둘러싸고 모여 있는 남자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있었지만, 왠지 그렇게 하는 것을 허락받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히잡을 계속 쓰고 있으면 어때요? 더운 나라에서 갑갑하고 덥지 않은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한 번도 진지하게 물어보지 못했다. 번거로운 일을 억지로 해야 하는 사람에게 그것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어떠냐고 묻는다는 것은 도리가 아닌 것 같았다. 진지한 신앙의 문제를 마치 머플러를 쓰는 번거로움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줄 수도 있을 것도 같았다.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부담으로 느끼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도 예전에 여자들이 장옷을 쓰고 다니지 않았는가? 그렇게 생각하고 지났다.
꾸란과 샤리아 같은 이슬람 텍스트에는 옷차림을 간소하게 하라 그리고 “가슴을 보이지 않게 덮으라”라고 되어 있다. 이러한 예언자의 명령 때문에 이슬람은 특이한 종교가 되었다. 다른 종교에서는 성직자에게만 요구하는 외적 표지를 일반 신도가 하게 한 것이다. 척 보기에 무슬림이라고 알 수 있게 되었다. 그것도 여자들만. 유럽에서 히잡이 사회 이슈가 되곤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프랑스인들은 공개 장소에서 자신의 종교를 드러내는 것을 금지했다. 타인에게 종교적 압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신앙의 자유와 정면 충돌한다.
한 번은 알제 거리에서 한 젊은 여성을 본 적이 있다. 청바지 위로 검은 부츠를 신고 주황빛 도는 스웨터를 입고 갈색 곱슬머리를 길게 늘어트리고 있었다. 이상하게 우연히 본 이 모습이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지워지지 않고 선명하게 남아 있다. 어쨌든 다른 곳 같았으면 그냥 평범했을 차림이었다. 그런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았다. 모여서 지나가던 젊은 남자들은 머리를 돌려 쳐다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젊은 여성의 얼굴은 도전적이고 당당한 것과 거리가 멀었다. 아! 내가 왜 이런 차림으로 나온 걸까? 아주 난감한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눈길들을 견디면서 도시를 돌아다니지 못할 것 같았다. 보는 내가 조마조마했던 기억이 난다. 종교적 압력은 그렇게 강했다.
많지 않았지만 히잡을 안 쓴 여성들도 있었다. 오랑에 위치한 연구소 소장으로 나중에 교육부 장관이 된 여성 분은 히잡은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대학에서 강의하는 사람들이나 고위 행정직을 맡고 있는 여성들 중에도 여러 명이 그랬다. 대학에서도 맨머리 여학생을 볼 수 있었다. 한국어를 배워 한국에 공부하러 왔던 여학생도 서울에서는 물론이지만 알제리에서 만났을 때 한 번도 쓴 것을 보지 못했다. 사회적 압력은 있지만 집안 전통에 따라 억지로 쓰게 하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기도 하는 것 같았다.
히잡을 쓰기 때문에 머리칼에 관련된 문화는 우리와 다르다. 머리칼을 가리게 되어 있으니 머리를 다듬을 필요가 없다. 알제리에서는 우리나라에는 골목 어귀마다 있는 미용실이 보이지 않는다. 어쨌든 별로 본 기억이 없다. 핀이나 띠 같은 머리 장식들이나 귀걸이를 파는 가게도 없다.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전통 의상에서는 히잡 위로 장식을 한다. 이마 위로 늘어트린 장식이나 양쪽 귀를 덮은 천 위로 귀걸이처럼 늘어뜨리는 장식도 있다.
지방에 따라서 머리를 가리는 방법도 다르다. 동부 산악지방 카빌리의 여자들은 우리가 밭에서 일할 때 하듯 머리칼만 가린다. 목을 덮지 않는다. 파리 기숙사에서 살았던 알제리 출신 친구들 중 몇이 머리를 완전히 가리는 면 스카프를 목뒤로 돌려 머리 위로 묶었는데, 좋아 보여서 나도 한 동안 쓰고 다녔다. 나중에 보니 카빌리 여자들이 머리를 가리는 방식이었다. 오레스 지방 여자들은 평범한 스카프를 삼각형으로 접어 턱 아래로 편하게 묶는다. 나머지 여러 지방 도시들에서도 보통 그와 비슷했다. 제일 큰 히잡을 쓰는 사하라 오아시스 도시 가르다야에서는 여자들이었는데, 눈 하나만 내놓고 완전히 가린다. 발목까지 흘러내리게 되어 있으니 히잡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 같다. 뒤에서 보면 여인들의 실루엣이 삼각형이다. 전신을 가리는 이 의복을 입는 것이 어떤지 물어볼 기회가 딱 한 번 있었다.
오아시스 도시 가르다야에서 일생 동안 먹어보았던 중에 가장 맛있었던 라테를 아침 식사에서 맛보았던 날이었다. 알제리에서는 늘 그렇지만 저녁 식사에서 음식 서빙을 젊은 남자가 했다. 대체로 집주인의 아들이나 조카다. 사람을 많이 초대했을 때는 주인이 하기도 하는데, 식탁에는 절대 앉지 않고 계속 서서 돌아다니며 서빙을 해서 안절부절못하게 만든다. 어쨌든 여자들은 식탁에 앉지 않는다. 한 번도 식탁에 앉은 것을 보지 못했다. 가르다야에 두 번째 갔을 때는 우리 일행을 맞아 준 누흐 씨의 조카가 서빙을 했다. 그런데 음식 접시를 위층으로 난 계단에서 가지고 내려왔다. 요리가 천정 위 지붕 아래 있는 좁은 공간에서 준비되고 있었다. 허락을 받고 위로 올라갔다. 모녀가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를 보고 얼마나 좋아하던지! 마치 십년지기를 만난 것처럼 나를 껴안았다. 어머니로 보이는 나이가 든 여자에게 처음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덥고 갑갑하지 않아요? 왜 아니겠습니까! 돌아온 대답이었다. 그렇구나. 그렇겠지. 기온이 높아도 건조해서 땀이 별로 나지 않는 것만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겠군. 만일 우리처럼 습하고 더운 날씨에 히잡을 써야 한다면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무슬림 여성이 우리의 여름을 지내기란 너무 힘든 일일 것이다.
뒤돌아 보면 히잡은 뭔가 거북한 느낌을 들게 했던 것 같다. 강요받고 억압받아 별 수 없이 두르고 있다는 생각이 계속 들어서, 내 앞에서는 안 해도 되는 데, 그렇게 말하고 싶어 졌던 것 같다. 히잡은 더불어 긴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을 가로막는 차단막이었을까?
알제리 여성의 지위는 짧은 글로 요약해서 말하기 어렵다. 도시와 농촌이 다르고 지방에 따라 다르며 개인 간에도 차이가 있다. 직업을 가지고 사회 활동을 하며 어떤 제약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여성이 있는가 하면 가르다야에서 처럼 마음대로 집 밖으로 나갈 수 없고 나갈 때는 눈 하나만 내놓고 온몸을 가리는 여성도 있다. 법적 제도적 측면에서도 비슷하다. 양성평등을 보장하는 헌법과 노동법이 있지만 동시에 여성 권리 측면에서 가장 전근대적인 가족법도 있다. 독립 이듬 해인 1963년부터 여성들에게 투표권이 부여되었고, 남성과 동등한 임금 보장, 야간 노동이나 기타 건상을 위협할 수 있는 노동의 금지, 출산 전후 휴가 보장 등 여성을 위한 여러 제도가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슬람 법체계 샤리아에 기초한 가족법은 결혼할 때 아버지나 남자 형제 혹은 아들의 동의를 요구하며, 일정한 조건에서 일부다처제를 허용하고, 이혼 청구권에서 남녀를 차별하며, 남편의 위자료 및 생활비 지급 의무를 면제한다. 공적 분야에서는 서구법을, 사적 영역에서는 무슬림법을 따르기 때문에 이런 혼란이 빚어지는 것이다. 2005년 가족법이 개정되어 일부 개선이 이루어졌다. 이혼 후 여성이 양육권을 가질 수 있으며, 남편이 부인의 주거를 보장하는 것 등이다. 일부다처도 허용하지만 첫 부인이 동의해야 한다는 단서도 달았다. 그러나 이슬람계는 양성 평등을 위한 법 개정을 서두르지 않고 있다.
2천 년 들어서 사회가 변하면서 여성들에게도 많은 변화가 이루어졌다. 결혼 연령이 높아졌고 피임법이 보급되어 1인 당 출산율이 크게 줄었고 교육 수준이 크게 놓아졌다. 대입자격고사에서 여학생의 합격률이 남학생보다 높을 뿐 아니라, 대학 등록에서도 비율이 더 높고 학업 성취도 더 우수하다. 교육의 기회 측면에서는 양성 평등이 완전히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졸업 후 취업에서는 여전히 불리하다. 다만 일부 분야들에서는 여성의 수가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데, 의료계나 법조계의 경우다. 의사의 70% 정도가 여성이고 판사의 절반 정도가 여성이다. 정치계에서도 여성 쿼터가 있어 의회의 ⅓이 여성으로 아랍국가들에서는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실제 정치적 영향력에서 반드시 그렇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