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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리아 Nov 08. 2024

평등주의는 현명한 것일까?: 알제리의 소수민족 베르베르


알제리나 모로코에 가면 간혹 자신을 ‘베르베르’라고 소개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베르베르(Berbère)? 한국에 많은 독자가 있는 『개미』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Berber)와 혼동하지 마시길! 둘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 챗GPT를 검색하니 문화적 관련성이 있을 수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 무슨 ‘기계적’ 망상! 베르베르인들의 문화와 작가 베르베르의 작품 세계 사이에는 공통점이 없다.

 

'베르베르', 마그레브 선주민의 명칭이다. 그들이 먼저 살았고 아랍인이 나중에 들어와 정착하면서 소수민족이 되었다. 베르베르인 인구는 어느 정도일까? 정확한 통계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 학자들이 발표하는 수치들은 제각각이다. 거의 천만까지 차이가 난다. 베르베르인들을 하나의 민족으로 인정하고 공식적으로 작성한 통계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베르베르인과 아랍인의 구분이 모호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최대 3천만 명까지 추산하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마그레브 전체 인구의 거의 ⅓에 달하는 숫자다. 


이 같은 높은 인구 비중에도 불구하고 베르베르인들이 어떤 갈등이나 분쟁을 일으켰다는 뉴스가 전파를 탔던 적이 없었다. 알제리에서 베르베르어를 금지하자 대규모 시위가 있었고 그로 인해 촉발된 정치 개혁이 알제리 내전의 한 원인이 되기는 했지만, 분리 독립 무장 투쟁이 벌어진 일이 없다. 베르베르인 인구가 훨씬 더 많은 모로코에서도 관련된 폭력 사태는 없었다. 소수민족 차별로 인한 인권침해나 집단학살의 비극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매우 특이한 현상이다. 

원래 싸움을 싫어하는 평화로운 민족이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베르베르 문화사전에 의하면 그들은 부족끼리 싸움이 일상적이었던 사람들이었다. 자신들보다 훨씬 늦게 마그레브에 들어와 정착하고 다수가 된 아랍인들과 같은 이슬람교도라는 종교적인 이유로 평화롭게 공존했을 뿐이다.


베르베르인은 외부에서 도래한 민족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고고학과 집단 유전학 연구 결과는 외부 기원설을 부정한다. 마그레브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기원전 4천 년 전부터 지중해와 육로로 이주한 여러 민족들이 섞이고 동화하며 형성된 집단이라고 연구가들은 정의한다. 다시 말해서 인종이나 혈통이 아니라 지리적으로 집단화된 민족이라는 것이다. 


흔히 베르베르인을 유목민 집단으로 소개하는데, 그 등식은 잘못된 것이다. 알제리 카빌리 지방이나 모로코의 아틀라스와 리프 산맥의 집단 거주지들은 모두 정주민들이다. 그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그러니까 베르베르인은 정주민이나 유목민 구분 없이 서쪽 대서양에서부터 동쪽 이집트 국경 ‘시와’ 오아시스까지 광대한 지역에 퍼져 살았던 사람들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2천 미터가 넘는 아틀라스 산맥의 산 위에서 농사와 목축을 하는 사람들이나 사하라 사막에서 풀을 찾아 옮겨 다녔던 투아레그 유목민들이나 모두 베르베르다.


지리적 조건 외에 같은 사회와 문화 전통 그리고 언어가 이들을 하나로 묶는다. 특히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방언으로 발달했지만 단일한 구조를 갖고 있는 베르베르어가 정체성의 핵심이다. 문자가 있었으나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아 20세기 중반 ‘티피나그’를 보완한 문자체계를 개발하기까지 무문자 사회였다는 점도 이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공유하는 문화나 사회구조적 전통이 전승되어 현재 마그레브 지역의 문화를 동쪽 아랍 이슬람 문화와 다르게 만들었다. ‘부르누스’와 같은 의복, ‘쿠스쿠스’와 같은 음식 그리고 평등주의적 사고방식 등이다. 로마, 반달, 비잔틴 등 여러 외부 세력의 침공에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버티며”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저항 정신을 베르베르 문화의 중요한 일면이라고 보는 전문가들도 있다. 


베르베르인들은 동쪽에 사는 이웃 이집트 사람들과 매우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전제군주 파라오를 중심으로 중앙집권 사회를 만들었던 이집트 사람들과 달리 함께 모여 세력을 키우려 하지 않았으며 권위를 거부하고 평등을 지향했다. 공동체와 관련된 사안을 남자 전원이 참여하는 회의에서 논의하고 만장일치로 결정하는 직접민주주의 사회였다. 학자들은 ‘원시 민주주의’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현재까지도 기본 정신이 유지되고 있다.  


평등주의적 사고는 모든 사회 구성원들에게 직접 적용되는 가치관으로 어떤 구성원이 더 큰 권력이나 더 많은 재산을 가질 수 없게 했다. 예컨대 너무 많은 올리브유나 밀을 가지게 된 사람은 자신의 재산을 처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족 공동체들 사이에서도 평등했다. 외적의 침공하면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연합했지만 다른 공동체를 종속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이 종속당하는 상태를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정주민들뿐 아니라 유목이나 반 유목 집단에서도 상황이 같았다. 전쟁이나 집단 이동을 위해 필요한 지도자를 지명하더라도 한시적이고 상대적인 권위만 인정했으며, 지명되었던 사람은 전투가 끝나거나 부족의 이동이 끝나고 나면 물러나게 했다. 이렇게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에 권력을 위임하려 하지 않아 위계질서를 갖춘 권력이 형성되기 어려운 것이 베르베르 사회였다. 


절대 평등주의는 베르베르인들의 치명적 약점이기도 했다. 중앙집권적 권력이 없지 않았지만, 성립되었던 기간이 길지 않았고, 권력 행사의 반경도 넓지 않았다. 세습 왕조로 이행하기도 했지만 허약했고 오래가지 않았다. 감옥과 같은 국가 권력의 폭력도 없었다. 가장 심한 처벌은 죄를 지은 사람의 집을 태워버리고 추방하는 것이었으니 사형과 같은 폭력과는 차원이 다르다. 권력이 허약했으므로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킨 예가 별로 없어 거대한 유적을 볼 수 없다. 알제리에 가면서 유럽과 같은 거대한 왕궁이나 석재 건축물을 기대하면 안 된다.   


중앙집권적 권력의 부재는 그들을 외부 침공에 매우 취약하게 만들었다. 능력 있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힘을 모아 효율적으로 저항할 수 없었다. 베르베르인의 역사를 페니키아시대, 로마시대, 반달시대, 오스만시대 등 일련의 외부 세력의 시대로 분절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평등주의는 결국 베르베르인들이 현재까지 국가 없는 민족으로 남아 있게 된 한 원인이었다고 분석할 수 있다. 다만 외부 세력 중에서 아랍인들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슬람교가 창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7세기 동쪽 아라비아 반도로부터 ‘알라의 전사’들이 이슬람 포교를 위해 마그레브를 침공했다. 그로부터 4세기 정도 지나 식솔을 거느린 거대한 아랍 베두인 집단이 이주하기 시작했다. 11~15세기 사이 지속적으로 유입된 아랍인은 밀려오는 바닷물처럼 평원을 적시며 서서히 전진했다. 약 100만 명 정도 넓은 땅에 퍼져 살았던 베르베르인 사이로 약 20만 명이 침투했다. 


아랍인이 평원을 물들이자 베르베르인들은 높은 지대에 남아 섬처럼 남아 서로 고립되었다. 알제리의 카빌리와 오레스, 모로코의 리프 산맥과 하이 및 안티 아틀라스 산맥 그리고 리비아와 튀니지의 접경 제벨-네푸사 등 높은 산악 지대에 베르베르인의 집단 주거지가 분포한다. 사막 오아시스들도 베르베르인 집단 주거지로 남았는데, 사하라 사막의 이바디파 무슬림들과 투아레그족이다. 


이슬람교로 개종한 베르베르인들은 예언자 무함마드와 같은 종족이며 꾸란의 언어인 아랍어를 구사하는 아랍인들의 특권을 인정했다. 아랍인들과 함께 도시를 건설하고 왕국을 창건하면서 ‘다르 알 이슬람(Dar Al Islam)-이슬람의 집’ 속으로 편입되었다. 이슬람은 기독교를 밀어내며 굳건하게 정착해 마그레브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일단 이슬람 지역이 되면 다른 종교가 침투하지 못한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인정되는 통설인데, 마그레브도 그 한 예가 되었다. 


일부 베르베르인은 빠르게 적응했다. 가장 수가 많고 넓게 퍼져 살았던 베르베르 유목민 제나타 부족은 자신들과 생활양식이 비슷한 아랍인들에 쉽게 동화되어 아랍인들이 지브롤터를 건너 스페인을 침공할 때 주력부대가 되었다. 아랍인들이 베르베르인들을 동등하게 취급했으며 특히 전리품을 동등하게 분배했던 것이 이들이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게 했던 이유였다고 분석한다. 


지중해와 대서양이 만나는 곳에 높이 솟은 바위산은 베르베르인 대장 ‘타릭’의 이름을 따라 ‘제벨 타릭(Djebel Tarik: ‘타릭의 산’)’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나가는 좁은 해협 이름은 ‘지브롤터’가 되었다. 일부 베르베르인들은 더 적극적으로 꾸란의 언어인 아랍어를 익히고 아랍인과 교류하며 스스로 아랍인이 되었다. 원주민이 외부에서 도래한 사람들에게 자발적으로 동화한 것이다. 그러니까 현재 베르베르인은 아랍인 집단에 동화하지 않고 자신의 전통과 언어를 지키며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베르베르인의 분포는 아랍인들이 들어온 방향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인다. 아라비아 반도와 가장 가까워 아랍의 영향이 그만큼 강했던 리비아와 튀니지에서는 전체 인구의 1%에 불과하다. 그러나 알제리에서는 20%, 모로코는 전체 인구의 40%로 아라비아 반도에서 멀리 갈수록 베르베르인의 인구 비중이 높아진다.  


현재까지 국가 없는 민족 베르베르인들이 앞으로 독립된 민족 국가 건설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는가?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일부 베르베르 문화 운동가들이 분리 독립을 이슈화하지만, 문제는 심각하게 제기되지 않을 것이며 갈등이 극단적 분열로 발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일반적 견해다. 


우선 집단 거주지에 분산되어 있는 베르베르인들이 베르베르인이라는 정체성보다는 소속 국가의 정체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알제리와 모로코 간 영토 전쟁이 일어나자 베르베르인들은 같은 베르베르인이라는 사실보다는 소속 국가의 이해에 더 민감했다. 모로코를 방문했을 때 만났던 베르베르인들은 알제리인들이 자신들의 땅을 빼았아 갔다고 반감을 감추지 않았다.  


베르베르인 단합 기구가 내부 분열로 가동이 원활하지 못하다는 사실도 있다. ‘세계아마지그대회(Congrès Mondial Amazigh)’는 베르베르 권리 보호 및 신장, 국제 여론의 환기 등을 목표로 해외 디아스포라까지 포함하여 결성된 범국가적 공동 연대다. 그런데 회장직과 관련한 의견의 차이로 2018년 8차 대회를 마지막으로 현재까지 열리지 못하고 있다. 


알제리에서는 베르베르 정체성 회복 운동이 정치적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는데, 카빌리 지방을 제외하고는 국민의 호응도가 높지 않다. 총선에서 베르베르인 정당들의 득표율이 대단히 저조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베르베르인들이 권력에서 소외된 집단이 아니라는 점에서 분리 독립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것으로 본다. 베르베르인들 가운데 특히 카빌리 출신들이 알제리 사회의 엘리트 계층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낮지 않다. 재계에서도 공기업 사장 등 요직을 점하고 있다. 남부 사하라의 도시 타만라세트에 갔을 때 박물관장 두 사람이 모두 카빌리 출신들이어서 놀랐던 경험이 있다. 


민족 명칭 ‘베르베르(Berbère)’


그리스어 어원의 명칭이다.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이방인’이라는 의미로 ‘바르바로이(barbaroi)’라고 불렀는데, 이 보통 명사가 로마시대를 거치는 동안 이집트를 제외한 북아프리카 사람들을 지칭하는 고유 명사가 된 것이다. 

유럽어에서 ‘야만적(babaric,   barbare)’이라는 단어도 거기서 파생되어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두 단어는   형태가 다르다. 프랑스어로 민족 이름은 ‘베르베르(Berbère)’이고 ‘야만인’은 ‘바르바르(barbare)’다.   영어로는 각기 ‘Berbers’와   ‘barbarien’이다. 

이와 유사한 어원으로 16세기 지중해를 오가는 유럽인 선박을 공격했던 무슬림 선박들을 말하는 영어 단어 ‘바르바리 해적(Barbary   pirates)’이 있는데, 여기서도 민족 명칭과 ‘야만’이라는 단어가 혼동되고 있다. 


베르베르인들은 유럽인들이 자신들을 부르는 이름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언어로 ‘아마지그(Amazigh)’라고 칭한다. ‘고귀한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뜻이다. 복수형은 ‘이마지겐(Imazigen)’이다. 그들이 살고 있는 땅 마그레브를 ‘타마지하(Tamazigha)’라고 하고, 그들의 언어인 베르베르어는 ‘타마지그트(Tamazight)’라고 한다. 


베르베르 상징 깃발 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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