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큰 정자은행은 덴마크에 있다. 프랑스 TV 방송의 소개를 챗GPT도 확인해 준다. 바이킹의 정자가 인기가 높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 세계 사람들의 고객을 대상으로 하루 평균 10~15 건의 인공 수정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덴마크 남학생들이 정자를 파는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설명도 있다.
높은 파도가 치는 바다를 배경으로 긴 금발 곱슬머리를 흩날리며 근육질 팔에 도끼를 들고 무엇이든 단번에 때려눕힐 것처럼 등장하는 ‘바다의 늑대들’! 상투적인 바이킹의 이미지다. 스파르타 병사, 로마 군단, 게르만 전사에 이어 나타난 유럽의 대표 싸움꾼이다. 각기 한 시대 유럽 대륙을 활보하다가 사라진 전사들이지만, 축제, 영화, 만화, 컴퓨터 게임을 통해서 수시로 부활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바이킹은 9세기말~11세기 사이 약 250년 간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에 살았던 남자들을 특정하는 명칭이다. 핀란드는 제외한다. 우리 눈에는 비주얼이 비슷하게 보이지만 민족적 근원이 다르다. ‘바이킹’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3세기 아이슬란드의 대하 문학 ‘사가(saga)’에서였다. 다시 말해서 그 명칭은 장본인들이 사라지고 난 후에 생긴 것이다. 스스로를 바이킹이라고 불렀던 바이킹은 없었던 셈이다.
바이킹은 유럽 역사 속으로 오랫동안 사라져 있었다. 긴 시간의 침묵을 깨고 부활한 것은 19세기 유럽의 낭만주의 시대였다. 독일 작곡가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가 크게 히트하면서 단어가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흔히 뿔 달린 투구를 쓴 실루엣으로 많이 등장하지만 사실 바이킹들은 투구, 특히 쇠로 만든 투구를 쓸 기술력이나 경제력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다. 오페라를 무대에 올렸던 스텝들 덕분에 쓰게 된 것이다.
“큰 눈은 푸른색이고, 머리칼은 붉으며, 몸은 크고 건장하다. 처음에는 힘이 있지만 일이나 피곤을 잘 견디지 못한다. 추위나 배고픔은 견뎌도 갈증이나 더위는 못 견딘다.” 고대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는 이렇게 ‘게르만’족을 묘사했는데, 바이킹은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살았던 게르만의 일파였다. “대추야자처럼 키가 크고 금발에 혈색이 좋다.” 그들을 보았던 중세기 아랍인 여행가는 그런 기록을 남겨 놓았다.
바이킹이 유럽의 절반을 떨게 만드는 공포의 대상으로 등장한 것은 중세기 중반이었다. 바닥이 얕은 날렵한 배를 타고 북쪽 차가운 바다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강을 따라 유럽 내륙 깊숙이까지 떼 지어 다니며 주민들을 습격했다. 특히 신성불가침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수도원이나 교회를 공격하고 사제와 수도사들을 주저 없이 죽여 패닉 상태에 몰아넣었다.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사람들은 이들이 대단히 폭력적이고 무자비한 인간들이라고 생각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사실 바이킹이 종교 건물을 공격한 것은 그들이 특별히 잔인하기 때문이 아니라 기독교를 알지 못하는 “가엾은 야만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북유럽은 다른 유럽 지역보다 5백 년이나 늦게 11세기가 되어서야 기독교도가 된 지역이다. 개종하기 이전 그들에게는 교회나 수도원이 귀중품이 쌓여 있는 큰 집들일뿐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사제들이나 수도사들은 방어할 생각도 하지 않고 순교했으니 죽이거나 노예로 파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이었겠는가? “주님 북쪽 침략자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소서.” 그들이 창궐했던 250년 동안 서유럽 해안가와 강가에 살던 사람들은 그렇게 기도했다.
바이킹은 장거리 항해를 하며 해안가에 배를 대고 장사를 했던 사람들이었다. 처음에는 싣고 간 가죽이나 바다코끼리의 상아를 주화나 무기와 물물교환했다. 그러다가 강제로 뺏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약탈을 시작했다. 사람을 납치해 돈을 요구하기도 하고 다시 돌아오겠다고 협박해 엄청난 금액을 상납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서유럽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지긋지긋하게 시달렸던 프랑스 왕은 북부의 넓은 땅을 아예 떼어주고 거기에 정착해 살면서 다른 바이킹을 막아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2차 대전 때 연합군이 상륙한 해안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노르망디’ 지방은 그래서 생긴 것이다. 바이킹을 북쪽 사람들이라는 뜻에서 ‘노르만’이라고 불렀고 그들이 정착했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바로 이 노르망디에 정착하고 동화한 바이킹의 후손들이 17세기 도버 해협을 건너가서 영국을 정복했다.
바이킹은 왜 갑자기 출현했을까? 농사를 짓고 고기를 잡아 살던 사람들이 왜 갑자기 경제적 부를 찾아 먼 거리 항해를 시작했을까? 그 이유는 아직 확실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실제 바이킹에 대한 역사적 자료는 빈약하다. 고고학적 발굴에서도 밝혀진 것이 많지 않다. 인구가 갑자기 크게 늘어나 외부로 진출할 필요가 있었다 혹은 사회가 점점 서열화되어 힘을 가진 사람들이 생기고 이들이 수하에 사람들을 모으기 위한 재물이 필요했다 등의 가설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인구가 왜 늘어났는가 그리고 사회가 무슨 이유로 계급화되었는가 등에 대해서는 설득력 있는 설명이 없다. 단 한 가지 확실하게 밝혀진 사실은 이들이 배를 만드는 기술이 뛰어났다는 것이다. 그들이 만든 배는 가볍고 안정성 있으며 기동성이 대단히 높았다. 잘 만든 배에 모험심이 더해져서 멀리까지 항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이킹이 유럽 전역을 휩쓸 때 그들이 갖춘 장비는 형편없는 것이었다. 갑옷도 투구도 없었고 무기도 초보적이었다. 거의 맨 손으로 싸웠다. 그들의 전투력에 대해서 연구자들은 여러 가설을 제시한다. 폭음을 하는 습관이 그들이 대담하게 만들었다든가 혹은 대마초 같은 풀을 씹어 먹거나 태워서 연기를 마셨다는 것 등이다. 그들은 싸우지 않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들에게 평화로운 상태란 허약하다는 것을 의미했다는 문화적 측면을 강조하는 주장도 있다. 모두 일리가 있다.
몇 년 전 스웨덴에서 일주일을 보낸 적이 있었다. 힘들었다. 겨울이라 쌓여 있는 눈과 매서운 추위도 있었지만 그 보다 더 괴로웠던 것은 해가 떠 있는 시간이 너무 짧다는 것이었다. 11시가 되어야 밖이 뿌옇게 밝아 오더니 오후 2시에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맑은 정신이 들지 않았다. 어느 날은 나도 모르게 큰 머그잔으로 커피를 다섯 잔이나 마시고 있었다. 북유럽인들이 왜 세계에서 가장 커피 소비가 많은 사람들인지 그리고 왜 틈만 나면 따뜻한 남쪽으로 떠나려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차갑고 사나운 북해를 바라보며 그렇게 어려운 생태 환경에 적응한 사람들이니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얼마나 강인한 사람들인가! 이 사람들이 ‘바이킹’이라고 불렸던 250년 남짓한 기간 동안 움직였던 동선을 살펴보면 그들이 얼마나 진취적인 기백과 담력을 가진 사람들인지 알 수 있다.
노르웨이에 살았던 바이킹은 서쪽 북대서양으로 진출해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를 발견하고 정착했으며, 북아메리카 캐나다의 세인트 로렌스 강 입구까지 진출했었다. 고고학적 발굴로 증명된 사실이다. 15세기 콜럼버스 보다 4세기 먼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 한 것이다. 유럽인들은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
스웨덴에 살던 바이킹은 발트해를 건너 강을 따라 내려가서 흑해와 카스피해까지 진출해 교역을 하고 정착했다. 그들을 ‘루스(Rus)’라는 불렀는데, ‘러시아’라는 국가 이름은 거기서 온 것이다.
덴마크에 살았던 바이킹은 프랑스의 노르망디를 할양받아 정착했다. 이들 중 일부는 용병 집단이 되어 왕국들 간 전쟁에 참가했다. 그리고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해안선을 따라 지중해까지 진출했다. 시칠리아에 도착한 이들은 200년간 지배하고 있던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노르만 왕국을 창건해 1891년 이탈리아가 통일될 때까지 존속했다.
이들의 진취성은 거기서 그친 것이 아니었다. 근대에 들어와 북극과 남극에 처음으로 갔던 노르웨이인 난센과 아문센 같은 탐험가들도 바이킹의 후예가 아니었는가?
소수 집단이었던 바이킹들은 어떻게 이처럼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는지, 그 정신적 동력은 무엇이었는지, 많은 역사학자들이 관심을 갖는 주제다. 연구 결과 가운데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은 내부 구성원들의 관계를 지배한 평등주의다. 프랑스 역사서에 언급되어 있는 한 예화가 그들의 평등주의를 잘 말해주고 있다.
911년 바이킹들이 센 강을 타고 올라오자 파리에 있는 프랑크 왕국의 왕은 그들과 협상하고 싶어 했다. 협상할 대상을 찾기 위해 너희 중 누구가 왕이냐고 물었다. 그들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우리는 모두가 왕이다.”
바이킹 사회에서는 계급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떤 계급도 지배력을 과도하게 행사하지 않았다. 서열에 집착하지 않는 그들의 문화는 갈등을 만들지 않았다. 이러한 평등주의적 전통은 북유럽인들에게서 현재까지 이어지며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강자들은 힘을 과시하지 않는다. 힘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약자의 콤플렉스다. 자존감이 확고하고 자신이 있으면 비교 우위를 찾지 않는다. 북유럽 숲을 채우고 있는 자작나무도 그렇다. 나무 꼭대기가 안 보일 정도로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 있는 높디높은 실루엣의 자작나무가 키를 자랑하겠는가? 도토리는 서로 키를 재 보겠다고 할지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