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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라 조상이 기다리는 것을 기억하라: 알제리 가르다야

by 스토리아


결혼한 지 며칠 되지 않은 신부였다. 검은색 입술, 진한 눈썹, 깜박이는 큰 눈, 턱의 문신, 헤라 염색을 한 황갈색 손, 닭 볏처럼 펼쳐 머리 위에 얹은 장식, 열 손가락에서 반짝이는 반지, 겹겹이 팔을 감고 있는 금팔찌, 목에 여러 겹으로 매달린 금목걸이… 비현실적이었다.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긴장하게 하는 낯섦과 팽팽한 젊음이 눈 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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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흐 씨가 여자들을 만나 보고 싶다는 나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는 연락을 보내왔다. 여자인 나에게만 허락된 특별 대우였다. 집 밖으로 나와 다른 문으로 들어갔다. 남자들이 외부 사람들을 맞이하는 공간에서 여자들의 공간으로 들어간 것이다. 천장이 높고 장식이 별로 없는 넓은 거실이었다. 작은 창문이 벽 위쪽에 높이 있어서 그런지 어두웠다. 중년의 여자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말을 걸었지만 착하고 순박한 미소만 돌아왔다. 마음의 무장을 순간적으로 풀어 버리는 착한 얼굴은 인종이나 민족을 초월해서 한눈에 보인다. 누흐 씨의 둘째 부인이었다. 그리고 검은 입술의 여인, 누흐 씨의 며느리였다. 내게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결혼식 치장을 다시 한 것 같았다. 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두 여자의 분위기가 뭔지 부자연스러워 그냥 짧은 인사로 만족했다.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아니 찍었다. 그런데 남에게 절대 보여주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찍었다. 서울에 돌아와 여러 번 다시 보았는데, 공개하고 싶은 유혹을 도저히 억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삭제했다.


마스카라, 속눈썹을 진하게 만드는 화장품을 그렇게 부른다. 알제리에 같은 이름의 도시가 있다. 마스카라(Mascara)라는 도로 표시를 여러 번 보았지만, 참 하필이면 화장품 이름을 붙인 도시가 이곳에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지나쳤다. 그냥 발음이 같은 것이겠지. 19세기 프랑스가 알제리를 침공해 식민화할 때 무장 저항을 했던 알제리의 영웅 압델카데르가 출정했던 북부의 역사 도시다. 그 지명이 엉뚱하게도 화장품 ‘마스카라‘의 어원이 되었다.

이집트 시대부터 북아프리카 건조 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눈병이나 화장에 광물질 안티모니를 사용했고, 그 안티모니 생산지 중의 하나가 마스카라였다. 가르다야의 젊은 신부가 눈과 입술에 바른 검은 염료도 안티모니였다. 프랑스인들이 광물질을 가져다 속눈썹을 진하게 만드는 화장품을 만들고 마스카라라고 이름을 붙였다. 마스카라의 주민들은 세계 여자들이 자신의 도시 이름을 그렇게 사용하고 있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이제는 안티모니를 생산하지도 않고 아랍어로 ’군 주둔지’라는 뜻이니 그럴만하다.


신부는 신혼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색채는 흐릿해졌지만 방의 모습이 기억에 뚜렷하게 남아 있다. 침대가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창문이 없이 밀폐되어 있었고 공기 중에는 숨 막히는 향기가 떠돌고 있었다. 벽에는 화려한 무늬를 넣어 짠 양모 벽걸이들이 걸려 있었고, 침대 위에는 붉은 실크 천 덮개가 덮여 있었으며, 침대 아래쪽으로 금실로 가장자리를 두른 레이스가 둘러져 있었고, 바닥에는 신부의 어머니가 딸을 위해 직접 짠 작은 카펫이 깔려 있었다. 화장대 앞에 여러 종류 향수병들이 늘어서 있었다. 향초들을 모아 두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향수병들이 내뿜는 향기였다. 향수병 하나를 집더니 내게 선물했다. 오아시스와 므자브 젊은 여인의 향기를 담은 향수병은 서울 내 방에 한 동안 머물러 있었다.


신혼 방에서 흘러넘치는 풍요로운 색감은 바깥 공간의 무채색과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남자들은 흰색 튜닉과 회색 바지 차림이었고, 여자들은 흰색 하이크와 검은색 단화 차림이었다. 전 주민이 유니폼을 입고 있는 것 같았다. 건물들은 모래색 아니면 흰색이었다. 오로지 이 작은 신혼부부의 방만 터질 듯이 색으로 넘치고 있었다. 무채색의 메마른 사막과 화려한 색채로 고립된 작은 섬, 대립되는 그 두 공간이 가르다야를 다시 떠올리게 하는 첫 번째 이미지가 되었다.


유명한 유럽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가 와서 보고 영감을 받아 스위스의 ‘롱샹 교회’를 설계했다고 하는 모스크에 안내받았다. 모스크는 이슬람교도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다. 기독교의 교회나 불교의 절과 다르다. 내가 들어가 보았던 모스크는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사원뿐이다. 들어간다고 막을 사람이 없는 한적한 모스크도 있었지만, 내 호기심 때문에 그들의 계율을 어기고 싶지 않았다. 가르다야의 모스크에 들어 가게 두었던 것은 용도 폐기하고 관광객에 내어 주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였다. 그들이 사용하는 모스크가 다른 곳에 여러 군데 있었지만 안내받지 못했다. 나중에 관광 안내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근처도 가보지 못했던 것이다.


모스크는 흰색이었다. 석회암을 빻아 구워 식힌 뒤 모래나 석회를 섞어 바르고, 마르고 나면 다시 발라 계속 덧칠해서 생기는 백색이다. 여러 겹 입혀 얻는 순백색은 눈이 부시다. 무채색의 찬란함이다. 신도가 몇 명 들어갈 것 같지도 않은 보잘것없는 작은 공간이었지만, 초라해 보이지 않았다. 빛이 들어올 수 있는 구멍들만 뚫려 있는 텅 빈 공간 속에서 고결한 흰색을 내뿜으며 뜨거운 햇살을 조용히 견디고 있는 벽과 기둥은 얼마나 당당해 보였는지! 가르다야 사람들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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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건물들의 내부는 미니멀리즘의 세계였다. 성인 남자들이 모여 공동체의 일을 의논하고 결정하는 제마아-회의소도 흰색 민 벽, 민 바닥에 의자들만 둥글게 배치되어 있었다. 우연히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던 어느 집 방의 내부도 가구가 거의 없이 간소했다. 등받이 없는 간이 의자와 대추야자 잎으로 엮은 돗자리, 양털 베개, 나무 상자 정도였다. 꼭 필요한 것만 취하고 그 이상 소비하지 않는다. 치장이나 장식은 낭비다. 낭비는 죄악이다. 누흐 씨는 그렇게 므자브 부족의 생활 철학을 설명했다. 며칠 동안 머물면서 절제와 절약은 선택할 수 있는 미덕이 아니라 그들이 살고 있는 극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이라는 것을 알았다.


북쪽 저 멀리 사하라 아틀라스 산맥에 비가 내리면 빗물이 모래와 흙을 쓸며 흘러와 말라 있던 계곡을 지나 모래 속으로 사라진다. 므자브 사람들과 그들의 대추야자를 살게 하는 것은 바로 이 덧없고 무정한 물줄기다. 므자브에는 자연적으로 흐르는 개천이나 샘이 단 한 군데도 없다. 2~3년마다 한 번씩 범람하는 물을 기다려야 한다. 무사 씨는 그 안타까운 물을 어떻게 모아 일부는 대추야자 농장 쪽으로 흐르게 하고 일부는 가두어 두는지 그림을 그려 가며 설명해 주었다. 빠르게 흐르는 물의 압력을 견디기 위하여 일정한 간격으로 나누어 기둥을 만들고 위쪽에는 분출구를 뚫어 놓은 둑, 흙을 다져 쌓은 둑으로 막아 놓은 저수지는 천 년 넘게 버티고 있는 자랑스러운 구조물이었지만 물이 흐르면 무너질 것처럼 위태롭게 보였다.


땅을 적신 물은 두 달 정도 지표면에 머물며 증발하거나 땅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진다. 비가 오지 않는 나머지 긴 시간 동안에는 여기저기 우물을 파고 물을 길어 올린다. 예전에는 당나귀나 낙타 아니면 사람이 가죽 두레박으로 쉬지 않고 퍼 올렸다. 이제는 펌프를 쓴다. 흘러 온 물이나 퍼 올린 물은 흙을 다져 만든 작은 수로를 통해서 흘러가며 대추야자 농원을 적신다. 대추야자 농장을 한 바퀴 지나가며 뿌리를 적시고 나면 물길을 막아 다른 농장으로 흐르게 한다. 꼭 필요한 만큼만 적셔준다. “그들은 땅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물을 나눈다.” 물이 땅보다 귀하다. 우리와 반대다.


물을 모으는 둑들과 구불구불 이어지는 수로를 보고 나면 물을 ‘물 쓰듯이 하는’ 것이 죄스러워진다. 알제리를 다녀오면 한 동안 수돗물이 콸콸 흐르는 수도꼭지나 물줄기가 시원하게 뻗어 나오는 샤워기를 보면 섬칫한다. 항상 다니는 수영장에 가서 물이 넘치는 풀을 보면 멈칫한다.

므자브에 있을 때면 미국의 라스베이거스가 떠오른다. 콜로라도 강에서 물을 끌어다 쓰는 그 유흥 도시의 방종은 모욕적이라고 느낀다. 모하비 사막 한가운데서 초록색이 싱싱한 잔디를 키우고 나무를 기르며 분수에서 물을 뿜어 올리고 거대한 풀에 물을 넘치게 해서 배를 띄우고 수상 쇼를 즐긴다니! 오로지 도박과 여흥을 위해 후버 댐에서 그 엄청난 물을 끌어다 쓰다니! 할 말을 잃는다.

우리의 일상은 그 양 극단 사이를 오간다. 지구가 더워져서 온갖 재난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가르다야 사람들처럼 금욕주의자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우리가 자주 듣는 '환경보호'나 '지속가능한'과 같은 삶의 전형이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면 라스베이거스의 무절제한 방종에 탐닉하고 싶어 그 결심을 기꺼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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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욕주의적 실천만으로 편안히 잘 살 수 있을까? 실망스럽지만 그렇지 않다. 가르다야 사람들은 대추야자 농사만으로 살지 못한다. 엄청난 노력을 들여 얻는 물로 생산하는 대추야자의 양은 보잘것이 없다. 투자에 비해 소득이 적다고 프랑스의 저명한 사회학자 부르디외는『알제리 사회학』에서 펜타폴에서 대추야자 농사를 하는 것은 사치라고 일갈했다. 정성을 다하지만 대추야자 농사는 외부의 공격을 피해 고립된 오아시스에 머물며 공동체가 살기 위해 내세우는 명분일 뿐이다.


가르다야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윤택하게 살 수 있는 것은 남자들이 외지로 나가 돈을 벌어서 보내기 때문이다. 므자브 사람들은 알제리에서 유명한 장사꾼들이다. 식당업에도 많이 진출해 있다. 성인 남성의 1/3 정도가 가족을 고향에 두고 바깥세상에 나가서 일한다. 므자브 사람들은 떠나는 남자들에게 말한다. “나가거라. 그리고 조상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라. 네가 물질이든 노동이든 고향에 줄 수 있는 것을 찾으라.”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넓은 마당에서 노래를 불러 주었던 남성 코러스의 낮고 굵은 목소리가 하는 말이었다. 남자들이 고향을 떠나는 것은 항상 혼자서 일시적으로 하는 것이다. 영원히 떠나서는 안 된다. 너무 오래 떠나 있어서도 안 된다. 오래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으면 무거운 벌금을 내거나 용서를 구하게 한다. 그런데 므자브 남자들은 어떻게 이탈하지 않고 돌아오는 것일까?


므자브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자식을 일찍 혼인시킨다. 그리고 남자가 돈을 벌러 도시로 나갈 때 여자가 따라갈 수 없게 한다. 가족을 지키는 기둥인 여자는 공동체를 떠날 수 없다. 남자는 돌아올 수밖에 없다. “여자들이 공터에서, 결혼식이나 기타 다른 기회에 남들과 어울리지 않도록 할 것이다. 여자들은 시장에 가서는 안 된다.” 그렇게 여자들의 행동을 엄격하게 보살핀다. 집에만 머물러 있어야 하고 밖에 나갈 때는 한 눈만 내놓고 온몸을 가리는 흰색 하이크를 입어야 한다. 답답했다. 그렇게 살아도 괜찮은가 묻고 싶었다. 우연히 기회를 얻었다.

예정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숙소로 들어갔다. 테라스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여 호기심에 올라가 보았다. 천정 위 테라스 지붕 바로 아래 작은 공간에서 나이가 든 부인이 딸을 데리고 손님을 위한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도 놀랐지만 두 사람도 갑작스러운 낯선 얼굴의 출현에 깜짝 놀라는 것 같았다. 다음 순간 두 사람은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이해했다. 갇혀 있는 곳에서 나가고 싶어 한다. 묶여 있는 몸이 자유롭고 싶어 한다. 딸이 머리에 두르고 다니는 검은색 히잡을 선물로 주었다. 알제리에 있는 동안 그리고 서울에 돌아 와서도 잠시 두르고 다녔다.


검은색 입술 신부의 방에 담겨 있는 화려한 색과 강렬한 향기는 빼앗긴 자유에 대한 보상이 아닐까? 육로로 알제로 돌아오는 긴 여정에서 떠오른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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