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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아레그 땅은 알제리로 남겠다: 사하라 타만라세트

by 스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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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2시. 타만라세트 공항에 도착했다. 오래 잡혀 있었다. 어느 관광단인가? 직원이 물었다. 개인 방문입니다. 아는 사람을 찾아왔습니다. 직원이 우리를 한참 쳐다보았다. 이 무슨 정신 나간 소리지? 그의 얼굴에서 읽혔다. 여권을 가지고 사무실 안으로 사라지더니 한참 후에 다시 나타나 돌려주었다. 예약한 호텔을 확인하고 택시를 불러 주었지만, 그냥 보내지 않았다. 경찰차가 에스코트했다. 30분이나 떨어진 곳이었다. 위험 지대에 들어왔다는 경고였다. 그러나 체류는 더없이 평온했다.

2004년을 마지막으로 알제리 남부에서 테러 사건이 없었다. 20년 간 조용했다. 그럼에도 도시는 아직 통제를 풀지 않고 있었다. 도시에 들어와서 나가기까지 여행사의 인솔을 받아야 한다. 서울로 돌아오기 전 갔던 한국 대사관에서는 미리 신고하고 갔야 했다고 알려주었다. 의도치 않게 경솔한 여행객이 되었다.


알제리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 타만라세트, 사방으로 최소한 700㎞를 가야 다른 도시를 만난다. 서울 부산 왕복 거리보다 멀다. 바다 같으면 절해고도라고 하겠다. 거리 감각을 완전히 마비시킨다. 프랑스인들이 자를 대고 오아시스들을 직선으로 연결해 국경을 만든 것은 이런 거리 감각의 상실 때문이 아니었을까?


‘카라반-하렘’ 호텔에 짐을 풀었다. 사막 지대 호텔의 방에 들어가면 불 꺼진 영화관에 들어가는 느낌과 비슷하다. 느닷없고 갑작스러운 어둠 그리고 휙 스치는 신선함! 방에서 밖으로 나갈 때는 영화가 끝나고 밖에 나가는 것과 비슷하다. 눈을 찌르는 햇살과 신선한 공기가 훅 덮친다.


연한 흰 구름이 슬쩍슬쩍 걸쳐 있는 푸른 하늘 아래 바싹 마른땅, 그 위에 길과 거의 비슷한 황토색 단층 집들이 늘어선 단조로운 도시였다. 기계를 빌리지 않고 인간의 팔만 써서 모래 땅 위에 일으킨 도시는 그렇게 소박했다. 대추야자나무도 별로 없었다. 대신에 상점들, 정돈되어 보이는 공공건물들 그리고 제법 규모 있는 시장이 있었다. 열대 과일과 야채 그리고 말린 열매와 양념 자루들이 뜨거운 햇살 아래 노곤하게 도열해 있었다. 해가 떨어지고 저녁이 되어 호텔에서 우연히 만난 프랑스인 가이드를 따라 저녁을 먹으려고 중앙로에 다시 갔다. 불을 환하게 밝힌 도로에는 젊은 사람들이 가득했고 차가 밀렸다. 사막에 떨어지는 비처럼 신기한 광경이었다. 사막 사람들은 밤에 깨어난다. 사납고 기세 등등한 햇살이 수그러들어야 비로소 일어난다.


중세기에 물물교환을 하는 도시였다고 한다. 백아프리카와 흑아프리카가 소통하는 문의 역할은 여전하다. 예전에는 소금, 대추야자, 곡식이 남쪽으로 내려갔고, 지금은 가전제품과 우유를 비롯한 식료품이 내려간다. 흑인 인구가 북부보다 훨씬 많았다. 원래 살던 투아레그 부족 말고도 사하라 남부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알제리에 노동력을 제공하고 있었다. 타만라세트 대학에는 45개에 이르는 국적의 학생이 재학한다. 명실상부한 국제 도시였지만, 파리나 런던 같은 유럽 국제도시들보다 안전했다. 시장에서 호객 행위로 난감해지는 일도 없었고, 배낭을 조심하라는 말을 누구도 하지 않았다. 삼엄한 경비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마주치는 사람들이 순하고 태평스럽게 보였다.

물은 어디에? 오아시스 도시인데 물을 길어 올리는 곳이 보이지 않았다. 인 아메나스에서 물을 끌어올려 700㎞를 흘려보내준다. 그 먼 거리를 인공 수로를 따라 흘러왔다고 생각하니 샤워를 하는 것이 너무도 이기적인 일 같았다.


타만라세트에서 맞아준 사람은 닥터 아카무크였다. 유튜브에는 코로나 사태 때 그가 했던 인터뷰가 여러 편 떠 있었다. 아프리카 대륙 전체가 코로나 전염병 피해를 별로 받지 않았던 것은 아프리카인들의 타고난 체질적 방어 체계 덕분이라고 분석했다. 점심에 초대해 주었고 투아레그 음악 ‘임자드’ 문화원을 방문하게 해 주었다. 임자드는 한 줄 현악기의 이름이기도 하고 그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음악 이름이기도 하다. 전수자로 지명된 젊은 투아레그 여인이 부르는 노래는 느리고 나른했다. 어디나 여자들이 일하면서 혼자 부르는 노래에는 무력한 슬픔이 깊이 스며들어 있다.

닥터 아카무크는 첫눈에 보았을 때 유럽인인가 싶은 외보였는데, 타만라세트에서 태어난 투아레그족이었다. 그것도 ‘아메노칼’ 즉 부족연맹체 족장의 손자였다. 타만라세트 공항의 이름은 그의 증조부의 이름이었고, 타만라세트 대학의 이름은 그의 부친의 이름이었다. 사하라 사막의 큰 부분이 알제리 영토로 남은 것은 전적으로 그 가문 덕분이었으니 알제리 정부가 그 정도의 감사 표시를 하는 것은 당연해 보였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나는 밤 2시 공항 직원이 걸었던 전화에 대답해주지 않은 것에 대한 섭섭한 마음을 완전히 잊고 진심으로 감격했다.


알제리 독립 혁명이 끝나갈 무렵 프랑스는 사하라 사막만이라도 자신들의 영토로 남기고 싶어 했다.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독립 전쟁이 시작되기 2년 전 사막에 석유와 가스가 매장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은 투아레그 부족장을 파리로 초대해 융숭하게 대접했다. 그리고 나라를 세워줄 테니 술탄이 되라고 권유했다. 프랑스가 배후에서 조종하려고 한다는 의도를 모르겠는가? “투아레그의 땅은 알제리로 남을 것이다.” 부족장은 단호했다. 그렇게 사하라는 유럽에서 빠져나와 아프리카의 일부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꿋꿋하게 잘 버텼던 부족장도 투아레그족이 6개 나라로 흩어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사하라 사막에 금을 긋다니! 유럽인들이 한 일은 그의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었다.


아하가르 산맥 깊숙이 있는 프랑스인 샤를 드 푸코 신부가 살았던 돌집에는 가보지 못했다. 프랑스어 다큐멘터리로 많이 보았던 기독교 성지를 특별히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막상 가까이 가니 마음이 달라졌다. 그런데 너무 늦었다. 사흘 전에 신고하고 허가를 받아야 했다.

1905년 투아레그 부족들 사이에 와서 살면서 투아레그어(타마체크)-프랑스어 사전을 만들었던 푸코 신부는 깊은 신앙심으로 성자로 추대되기는 했지만, 사실 프랑스가 사하라에 진출하고 투아레그를 ‘평정’하는 작업을 도운 사람이었다. 미개인들을 문명화시키고 기독교도로 만들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러나 투아레그 누구도 기독교인이 되지 않았다. 프랑스가 철수하면서 그어진 국경 때문에 투아레그가 지금까지 수난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신부님은 예상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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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라 사막 남부까지 한류가 흘러와 있었다. 민속박물관 안내원, 저녁 식사 자리에서 만난 수의사, 떠나면서 공항에서 만난 두 아이의 엄마, 저녁을 같이 먹었던 간호사 등 여러 사람들이 한국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을 눈을 반짝이며 좋아했다. 한국의 대중문화를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아는 사람들은 대단한 팬들이었다. 그들의 허락을 받지 않고 사진을 싣는다. 다시 만나면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해야지! 별로 가능성은 없어보이지만.

닥터 아카무크도 자신의 보았던 여러 편 한국 영화 제목을 알려주었다. 축구를 좋아하는 그는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 선수들의 이름도 알고 있었다. 자기 처제가 얼마나 열렬한 BTS의 팬인지 보여주기 위해 나와 전화를 연결해주기도 했다. 동아시아 국가들과 교류나 문화 유입의 양상이 조금씩 달라졌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1980년대에는 자동차를 비롯한 일본 물건이 수입되었고 만화 등 일본 문화가 수입되었다고 한다. 90년대 내전 동안 중단되었다가 내전이 진정되고 알제리가 안정되기 시작한 2천 년대 들어 동아시아와 교류가 다시 활발해졌는데, 건설업에 진출한 중국의 문화는 별로 흥미를 끌지 못했으나 한국 제품과 한국 문화는 특히 젊은 세대들에 크게 어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일본산보다 한국 제품의 품질이 더 우수하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라고 한다.


닥터 아카무크와 함께 점심을 먹고 나오는데 한 점 비 구름도 없이 청명한 하늘에서 미지근한 물이 잠시 툭툭 떨어졌다. 이게 뭐지? 쳐다보는 사이에 벌써 끝났다. 사막에 내리는 비, 1년에 10번 정도 내리는 고마운 비가 하필이면 그 순간에 떨어지다니, 그 우연이 하늘의 축복처럼 고마웠다.



“사막의 밝은 색 피부의 용맹한 전사” 투아레그


모래색을 배경으로 청색 터번을 두른 그들의 실루엣은 ‘사막의 제왕’이라고 불릴 만큼 당당하다. 다리를 두 번 접어야 바닥에 앉는 키 큰 낙타 위에 앉아 조용히 흔들리며 걷는 그들의 초연한 모습에는 보는 사람을 숙연하게 만드는 무언가 있다.


투아레그 남자들에게 꼭 필요한 물건은 세 가지라고 한다. 낙타, 대추야자, 그리고 타겔무스트-터번이다. 타겔무스트는 성년이 되면 두르기 시작하는 4~5미터짜리 긴 천이다. 눈만 남기고 얼굴 전체를 가린다. 햇빛과 모래바람을 피하기 위한 것이지만 평상시에도 거의 벗지 않고 두르고 있다. 잠을 잘 때는 벗는 것 같은데, 아침에 일어나 보면 벌써 머리 위에 얹고 있었다. 예전에는 오아시스 농장에서 재배하는 청색 물감 ‘인디고’로 염색해 오래 쓰고 있으면 이마와 코끝에 파란색물이 들었다고 한다. 이제는 수입한 천이고 색깔도 다양하다. 우연히 두르는 모습을 볼 기회가 몇 번 있었다. 우리가 붕대를 감는 것 비슷하게 이쪽저쪽 돌려가며 감고 마지막 자락을 머리 꼭대기에 척 꽂든지 아래로 늘어트렸다가 바람이 불면 입을 가리는 데 썼다.

내가 만났던 투아레그 남자들은 키가 크고 손과 발이 낙타처럼 두툼하고 건장했다. 여자들도 키가 큰 편이었다. 이 자부심이 강하고 용맹한 사람들은 프랑스 군대와 충돌하며 가장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베르베르인 부족이었다. 그러나 단합은 그들의 특기가 아닌 것 같았다. 여러 갈래 부족들이 연합체를 구성하고 연합체의 대표를 선출하지만 특별한 권한을 부여하지 않고, 한 인물을 중심으로 잘 뭉치지 않는다. 평등주의자들이라는 측면에서 그들도 역시 베르베르인들이다.

투아레그족은 몇 년에 한 번씩 비가 왔을 때 축축해진 땅에서 솟아 나는 마른풀들을 찾아다니며 양이나 염소, 낙타를 키우며 산다.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이동 목축을 포기하고 정착하는 수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정부가 통제하기 쉽게 정착을 유도하기도 하지만, 최근 기후변화로 목초지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지구 전체가 겪는 것이니 무슨 해결책이 있겠는가?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있다. 아이들은 9개월 동안 가까운 도시에 머물며 학교에 다니고 방학 때 집으로 돌아와 사막에서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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