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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베르 집단거주지 알제리 카빌리:‘저항의 땅’

by 스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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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멜이 운전하는 자동차가 가파른 산길을 계속 올라갔다. 높은 곳으로 올라 갈수록 심장이 점점 조여 왔다. 언제까지 올라가야 할까? 너무 높아. 다시 오고 싶지 않아. 계속 생각했다. 험한 산길이었다. 위험 지역을 들어갔으니 조심하라. 하루에 한 번씩 폰에 서울 외무부에서 보내는 문자가 떴다. 아는 사람이 있고 현지인 안내와 함께 있으니 괜찮겠지. 그래도 문득문득 긴장했다. 군방위대 초소 한 군데에서는 반나절을 잡혀 있었다. 여권을 모아 가더니 감감소식이었다. 저 멀리 지중해와 좁은 해안 길 그리고 풀이 무성하게 돋아 있는 버려진 땅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방위대는 동양인들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놀라고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무뚝뚝한 얼굴로 알제 중앙정부에 연락해야 한다면서 보내주지 않았다. 검문이 끝나고 들어간 첫 마을도 친절한 눈길을 보내주지 않았다. 다른 마을도 다르지 않았다. 카빌리, 알제리를 여행하면서 가보았던 곳 중에 제일 차갑고 까다로운 곳이었다.


카빌리? 나라 이름 알제리도 생소한데, 그 한 귀퉁이에 있는 지방이라니? 관심을 가질 이유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자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와 엮일 수 있는 특별한 이유도 없다. 프랑스 대표팀 축구 선수였던 지네딘 지단 이야기를 하면 아, 그래? 하는 정도 관심을 받을 수 있을까? 그의 부모가 이곳 출신이다.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에서 태어난 이민자 2세대인 지단의 얼굴을 보면 유럽인도 아니고 아랍인도 아닌 베르베르인의 전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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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빌리는 북아프리카-마그레브의 선주민 베르베르인 집단 주거지 가운데 하나다. 아랍 이슬람 지역에서 마그레브가 특별한 것은 베르베르인의 존재 때문인데, 카빌리는 그야말로 골수 베르베르다. 베르베르 정체성 의식과 보호 활동에서 카빌리를 따라갈 곳이 없다.

텔 아틀라스 산맥에 모여 사는 이 고집스럽고 강인한 부족 집단을 소개하려는 것은 문화적 역사적으로 알제리를 이해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알제리 전체 인구의 20%에 가까운 인구를 차지하고 있고, 이민자들이 국내외에 많이 진출해 있어 사회적 영향력 면에서 중요하다. 프랑스 식민통치와 독립전쟁, 그 이후 현재까지 알제리 근현대사에서도 그렇다.


알제리 동북부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카빌리 지방은 우리나라 강원도와 면적이 비슷하고 강원도처럼 산이 많다. 그런데 산들이 훨씬 높고 인구밀도가 훨씬 높다. 1천~2천 미터 산들이 있는 고산지대이고, 강원도 인구가 150만인데, 카빌리 인구는 7백만이다. 또 다른 점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우리와 정반대로 산 등성이에 퍼져 있다는 것이다. 우거진 나무들 사이에 보이는 흰색 집들은 언뜻 보기에 유럽 지중해 주변의 별장지대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그 같이 한가로운 곳은 아니다. 물이 없다. 지중해 주변이라 비가 겨울에만 내리고 빠르게 흘러가 버려 우리처럼 가다가다 약수터를 만나는 일은 없다. 물을 찾으려면 계곡으로 내려가야 하고, 집에서 쓰려면 길어 올려야 한다. 여자들이 고단하다. 양식을 마련해야 하는 남자들도 마찬가지다. 산이 너무 가팔라서 농사를 짓지 못하고 무화과나 포도, 올리브를 키우고 풀을 적게 먹는 양이나 염소를 기르며 산다. 예전에는 밀을 키우기 위해서 무장을 하고 집단으로 평원에 내려가야 했다. 일부 부족들은 장신구나 칼 같은 수제품을 만들어 생활한다. 힘든 환경이지만 높은 산의 건강한 생태 환경 속에서 인구가 잘 늘어나 외부로 나가 장사를 하거나 이민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현재는 상황이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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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내리기 힘든 가파른 능선에 집을 짓고 모여 살기 시작한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지중해 더위를 피하고, 동서로 해안길을 오가는 외국 군대의 공격과 약탈을 피하며, 산 아래 평원의 권력집단이 독촉하는 세금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높은 산 위에 살았던 덕분에 페니키아, 로마, 비잔틴 등 지역을 침공해 지배했던 외부 세력에도 거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슬람에도 완전히 굴복하지 않고, 쿠란을 따르기보다는 자신들의 관습법을 유지했다. 지금도 카빌리 여자들은 히잡을 쓰지 않는다. 스카프로 머리칼을 여미는 정도이고 출입도 제한을 받지 않는다. 이 같은 독립적인 성향 때문에 ‘저항의 땅’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카빌리 베르베르 문화사전, 알제리 소수민족의 삶과 역사』를 번역하면서 이들의 저항 정신을 보여 주는 여러 사건들을 접했는데, 그중 하나가 프랑스가 침공했을 때 일어난 일이다. 프랑스 군인이 남긴 증언에 의하면 « 허리까지 벗고 짧은 바지를 입은 남자들이 물러서지 않기 위해서 서로 무릎을 밧줄로 묶고 있어 총검으로 하나하나 죽여야 했다 »는 것이다. 상상만 해도 너무 잔인하고 끔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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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년 간 지배했던 프랑스가 카빌리에 특별히 가혹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른 지방에 비해 오히려 특혜를 받은 지역이라고 할 수도 있다. 점령 초기 오해가 있었다. 프랑스인들이 카빌리 지방이 자신들에게 우호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주저 없이 많은 양의 올리브유를 팔았고, 프랑스의 공격에 저항했던 압델카데르의 지원 요청을 두 번이나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군은 카빌리 사람들이 자신들의 점령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 착각이었다. « 싸구려 물건을 실은 여윈 당나귀를 끌고 무거운 망토를 걸친 채 마그레브 전역을 누비며 행상을 하는 » 억센 카빌리 사람들의 실용주의적 단면이었으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알제리가 한 나라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카빌리 사람들로서는 다른 부족이 공격당했다고 나설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프랑스가 가까이 오자 카빌리 사람들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점령 후에도 토지 강제 수용 정책에 사생결단을 각오하고 반대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프랑스인들은 카빌리 사람들이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는 알게 되었지만, 그들이 우월한 부족이라는 생각은 버리지 않고 ‘분열 통치’ 전략에 적극 활용했다. 전투 병력으로 피식민지인을 차출할 때 적용했던 인종적 기준에서 가장 용맹한 전사로 분류했으며, 특별한 교육적 관심을 쏟았다. 최초의 학교를 카빌리에 설립했으며 몇 부족을 선정해 집중적으로 학교를 운영했다. 식민지배 말기 교사를 배출하는 고등사범학교 졸업자의 절반이 카빌리 출신이었다. 다른 지방들이 받지 못했던 혜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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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적 혜택은 군인이나 노동자로 프랑스에 이주하는 데 유리한 조건을 만들었고, 이주했던 사람들의 귀환은 카빌리의 정신적 각성을 촉진했다. 부당한 식민지배에서 독립해야 한다는 것, 자신들의 정체성은 베르베르 라는 것 등을 다른 지역보다 첨예하게 의식하게 했다. 독립운동의 핵심 지도자들이 활동하는 지역이 되었고, 베르베르 민족주의의 생산과 실천의 중심지가 되었다. 베르베르 깃발을 만들고 베르베르 문자를 완성해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카빌리 사람들이었다. 프랑스에 남아서 정착한 카빌리 사람들은 단체를 만들고 고향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주시하며 여론을 환기시키는 등 베르베르 문화 운동의 배후지가 되었으며, 이들이 고향으로 보내는 돈은 지방 경제의 자금이 되어 지역을 부유하게 만들었다. 대외적으로 카빌리가 알제리 다른 지방들에 비해 현저하게 가시성이 높은 것은 여기서 기인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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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후 알제리의 정치 상황은 카빌리 지방에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알제리 독립운동가들은 출신지, 종교, 정치 성향 등 여러 측면에서 대단히 다양했는데, 아랍인과 베르베르인의 대립도 그 분열의 한 축이었다. 원래 독립적이고 프랑스의 영향이 강하게 받았던 카빌리 출신자들은 대체로 비종교적이고 진보적이었다. 아랍문화 전통이 강한 다른 지역 출신 지도자들과 달랐다.


‘이슬람의 나의 종교, 아랍어는 나의 언어, 알제리는 나의 조국이다.’ 알제리 독립운동의 이념이었던 아랍민족주의를 잘 요약하는 유명한 구절이다. 중앙집권적 근대 국가의 건설 이념도 아랍민족주의였다. 카빌리 출신 독립운동가들은 권력의 주변으로 밀려났다. 신생 정부는 베르베르인들이 국가를 분열시킨다고 비난하며 강경하게 탄압했다. 행정, 법정, 교육, 군에서 베르베르어 사용을 금지하고 대학에서 베르베르어 강의를 금지했다. 카빌리는 강하게 반발했다. 막연한 연대감이었던 베르베르 정체성이 하나의 이념이 되었고,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반체제 운동의 동력이 되었다. 아랍인이 들어오기 전 마그레브는 베르베르인들의 땅이었다. 그러므로 베르베르 정체성이 아랍 이슬람적 정체성 보다 근원적인 것이고 진정한 것이다. 국가의 현대화는 베르베르 정체성 복원을 통해 달성해야 한다. 카빌리 베르베르 문화운동 활동가들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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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와 카빌리 지방은 탄압과 반발을 반복하며 대립의 수위가 점점 높아져 결국 ‘베르베르의 봄’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시위로 폭발되었다. 정부는 유일 정당 체제를 폐지하고 다당제로 전환하는 등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뜻밖의 사건이 벌어졌다. 난립한 많은 정당 가운데 이슬람원리주의를 표방하는 ‘이슬람구국전선’이 급격하게 떠올라 걸프전 이후 청년과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으며 1991년 지방선거에서 압승하게 되었다. 이에 군부가 개입하여 선거를 무기한 연기하면서 ‘알제리 내전’이 시작되었다.


10만 명이 희생된 알제리 내전은 2000년 공식적으로 종식되었다. 그러나 베르베르 문화 운동은 내전 기간은 물론 이후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베르베르어 ‘타마지그트’가 공식어로 인정되고 헌법에 명시되었으며, 베르베르인 전통 축제인 율리우스력 1월 1일 ‘옌나예르’ 축제가 대통령령으로 국가 공식 휴일로 지정되었다. 이 같은 진전에도 불구하고 일부 과격분자들은 분리 독립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 전문가들은 가능성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카빌리 출신들이 사회적으로 유리한 입지에 있기 때문이다. 남부 타만라세트에 갔을 때 놀란 적이 있었는데, 공공기관 장들이 카빌리 출신들이었다. 6천 킬로 떨어진 남부까지 요직에 진출해 있는 것이다.


사흘간 짧은 여정에서 만났던 카빌리 사람들은 피해의식을 완전히 떨쳐 버리지 못하고 배타적인 경계심을 풀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베르베르 정체성을 지킨다는 자부심과 결의에 넘치는 것 같았지만 한 편으로는 피곤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대학 캠퍼스에서 젊은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지나치게 많은 과제가 그들을 지치게 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의문도 들었다. 언어만 해도 베르베르어와 프랑스어를 사용하지만 지역을 떠나면 아랍어가 꼭 필요하니 3개 언어가 능숙해야 한다. 게다가 요즘은 영어가 필수 사항이 되지 않았는가? 4개 언어라니? 생각만 해도 현기증이 난다. 정체성을 지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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