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랑에 가고 싶은데요.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키아티 교수는 스마트폰을 누르기 시작했다. 아랍어를 할 수 있으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을 텐데. 잠깐 스치는 생각이었다. 배울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배우려고 해 보았지만 곧 포기했다. 목 저 아래서 길게 올라오는 발음이 어려웠다. 비슷한 프랑스어 ‘r’ 발음을 따라 하는 데도 한참 걸렸는데, 더 어렵네. 글자는 더더욱 어렵게 보였다. 곡선과 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글의 각진 네모 체계에 익숙한 내가 그 곡선과 점에 가까워지려면 참 오래 걸리겠다. 외국어 하나를 익히는 데 그 긴 세월을 보내고 나서 또 다른 외국어를 시작하겠다는 것은 너무 무모한 야심이었다. 인공지능이 초스피드로 통번역까지 해주는 세상에서 부질없는 일이지! 갑자기 키아티 교수의 명령이 떨어졌다. 갑시다. 알제 공항으로 출발했다. 비행기 좌석은 없었다.
알제리 국내선 청사는 붐비고 있었다. 키아티 교수는 여기 꼼짝 말고 서있으라는 말을 남기고 청사 안을 돌아다녔다. 어이! 하고 손짓을 하고 가까이 가서 악수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창구 직원, 체크인 데스크 직원, 빗자루를 든 청소원, 신사복 차림의 남자... 여자, 남자, 젊은 사람, 늙은 사람, 일일이 눈으로 따라가기도 어려웠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알고 있는 것일까? 공항 사람들을 다 알고 있는 건가? 어쨌든 그 많은 만남 덕분에 오랑행 비행기 티켓이 생겼다.
오랑에서는 그의 지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레스토랑에 도착하니 나이가 약간 들어 보이는 남자 4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동산업을 한다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아이구, 이곳에 땅을 사러 온 것도 아닌데... 그저 친구 부탁으로 멀리서 왔다는 사람을 점심 식사 자리에 끼워준 것이었다. 지중해 햇살이 쏟아지는 야외 카페 테이블에 둘러앉아 농담을 하고 웃는 그들의 모습이 가끔 떠오른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술만큼 담배도 하지 말라고 하건만, 농담을 하고 환하게 웃으며 담배 재를 바닥에 털어 나를 놀라게 했다. 지중해 건너 유럽의 항구에 와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오랑은 나의 예상과 전혀 다른 분위기의 도시였다.
알제리에서 2번째 큰 도시 오랑, 낯설지 않은 도시였다. 대학교 다닐 때 카뮈의 소설『페스트』를 읽으면서 ‘오랑’이라는 이국적 지명이 마치 특별한 사건이 일어날 운명처럼 울린다고 생각했었다. 작가는 너무 특징 없고 평범하기 때문에 전염병이 돌 것이라는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도시라고 도입부에서 누누이 설명했지만, 내 느낌은 달랐다. 그때는 저 멀리 어딘가 있을 도시를 실제 가볼 것이라고 상상하지도 못했다. 그 도시에 온 것이 감격스러웠다.
소설 덕분에 오랑이라는 도시는 내게 단어 ‘페스트-흑사병’이 연상시키는 검은색, 밤, 어둠 같은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었다. 실제 만난 도시는 너무나 달랐다. 놀라웠다. 해안가 높은 제방 위에 우뚝 서있는 초현대식 건물의 유리 벽이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고, 종려나무가 늘어선 넓은 산책로에는 눈부신 지중해 햇살을 받으며 사람들이 한가롭게 걷고 있었다. 프랑스 휴양도시 니스나 칸 비슷한 느낌이었고, 알제리 인구의 절반이라는 젊은이들이 웃고 떠들며 지나가는 모습이 그 휴양도시들보다 훨씬 더 활기 찬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비둘기도 나무도 공원도 없는, 새의 날갯짓도 낙엽의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삭막하고 추한 도시, 시청 앞 계단 양편에 있는 두 마리 사자상도 단단하지만 무의미해 보이는 몰개성 하고 평범한 도시, 그렇게 묘사된 가공세계의 오랑은 반세기 이상이 지난 현실과는 거의 상관없는 것 같았다. 내 머릿속에 오래 동안 간직되어 있던 도시의 이미지가 일거에 날아가 버렸다.
알제리의 대부분 지중해 항구 도시들처럼 오랑도 서쪽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주는 산을 끼고 움푹 들어간 만에 조성된 항구다. 도시 어디서나 저 높이 보이는 바위산은 도시를 내려다보기 위해서 올라야 하는 필수 관광 코스였다. 정상을 향해서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니 절벽 쪽에 지어진 성당이 보였다. 이슬람 도시에 남겨진 눈부신 흰색의 텅 빈 성당은 적막했다. 넓은 테라스에 서니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큰 항구가 아니었다. 바다 한가운데 가느다란 뱀처럼 구불구불하게 뻗어 있는 인공 제방 안쪽으로 여러 시설들이 빼곡히 차 있는 항만은 너무 협소해 보였다. 바다가 육지 쪽으로 깊게 들어가 있지 않았고 해안 길이도 짧아 더 이상 확장할 수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 지형이 아주 특이했다. 해안 일대가 높은 절벽이었다. 그리고 도시는 그 높은 둑 너머에 저 멀리 까마득히 펼쳐져 있었다. 바다에 « 등을 돌리고 돌아 앉아 있는 » 항구, 카뮈의 표현은 정확했다. 바다는 보이지 않고, « 정 보고 싶으면 유감스럽게도 찾아 나서야 하는 » 항구라니? 밝고 환하고 자유로운 도시라는 첫인상이 갑자기 숨 막히는 듯한 답답함으로 바뀌었다. 바위산을 내려와서 해안도로를 달리면서 그 느낌은 더 심해졌다.
산을 내려와 해안 제방에 만들어진 전용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뒤좌석에 앉아 계속해서 바다를 찾았다. 수평선도 보이지 않았고, 일렁이는 파도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굵은 쇠봉이 촘촘한 철책이 어른 키보다 더 높게 해안을 따라 죽 쳐져 있었다. 군데군데 보이는 좁은 철문으로 가끔 사람이 들어가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산업시설과 군사시설 그리고 밀항을 이유로 일반의 접근이 금지되어 있었다. 철책을 잡고 정박한 배들을 한동안 쳐다보다가 돌아섰다. 바다는 이중으로 막혀 있었다. 오랑 사람들은 바다를 보려고 높은 자연 제방을 넘어와도 다시 한번 견고한 인공 장애물에 부딪힌다. 여름이 되어 해수욕을 하고 싶으면 다른 해변을 찾아야 한다. 바다가 막혀 있는 항구 도시, 이러한 지형은 어떤 역사를 만드는 것일까? 잠시 궁금해졌다. 페니키아 시대부터 시작되는 2천 년이 넘는 긴 역사를 공부하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 같다.
지중해 항구 도시 오랑을 이해하는 열쇠말 중 하나는 스페인이다. 10세기 초 스페인 안달루시아 사람들이 지중해를 건너와 바닷가 자연제방을 넘어 도시를 만들었고, 15세기말 기독교도들에 쫓긴 스페인 무슬림들이 오랑에 와서 정착했다. 그때부터 200년 간 오랑은 스페인 땅이었다. 알제리 영토가 된 것은 18세기말이었으니,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곧이어 알제리를 침공해 점령한 프랑스가 유럽인들을 모집해 알제리 곳곳에 정착하게 했는데, 그때도 스페인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정착했다. 카뮈의 귀머거리 어머니도 그들 중 하나였다. 시장 거리나 설문조사를 위한 여행사 면담에서 만난 사람들이 대체로 밝고 쾌활했는데, 그러한 분위기를 만드는 데 ‘정열의 나라’로 알려진 스페인 이주자들이 일조한 것은 아니었을까? 확인되지 않은 나의 개인적 추론이다. 20세기 중반에는 유럽인 인구가 알제리인 인구보다 더 많은 도시였다. 알제리 독립 전쟁이 끝나고 유럽인 20만 명이 자기 나라로 돌아갔지만 아직도 2만 명 정도 스페인 후예가 남아 동네를 이루고 살고 있다.
오랑의 중심 곳곳에는 외부 사람들이 바다를 통해 들어왔다가 떠나면서 남겨 놓은 유적들이 남아 있다. 마치 그물에 걸려 빠져나가지 못한 물고기들처럼. 여러 시대, 여러 양식의 건물들이 공존하고, 기독교와 이슬람이 공존한다. 투우장과 서쪽 바위산 위의 산타 크루즈 성당을 스페인이 남긴 유적이고, 총독 베이의 궁전과 그랜드 모스크와 같은 아랍 양식의 건물은 오스만 제국의 유물이며, 광장에 있는 시청과 오페라 하우스는 19세기말 프랑스 양식이다. 프랑스인 기독교도들이 미사를 올렸던 성당은 용도를 변경해서 도서관이 되었다. 영혼의 양식을 얻는 장소에서 정신의 양식을 얻는 장소로 탈바꿈한 것이다. 지중해 바다에 등을 돌리고 돌아 앉아 저 먼 남쪽 사막과 아프리카 초원을 바라보고 있어도 바다를 통해서 들어오는 물결을 막지 않고 주저 없이 들어오게 했던 개방적인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내를 돌다 어느 한 골목에 들어가니 초입부터 저 끝까지 삼성 로고를 그린 간판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세계 도처에 보이는 삼성 로고지만 그렇게 많이 모여 있는 것은 알제리에서 처음 본 것 같았다. 놀라는 나를 보더니 택시 운전사는 삼성 제품은 너무 비싸서 거의 없고 중국산들이 대부분이라고 말해 주었다. 한국산이나 중국산이나 별로 구별할 생각이 없는 무심함!
알제리 역사를 살펴보면서 특이했던 점은 지중해 바닷가의 살면서 바다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다는 것이었다. 알제리 역사서를 여러 권을 읽어 보았는데, 배를 타고 어디를 갔다는 언급을 읽지 못했다. 예컨대 우리가 역사 시간에 배웠던 장보고의 해상 무역 개척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알제리에는 그런 사례가 없었다. 바다를 통해서 이러 저런 민족들이 왔었다는 이야기 밖에 없었다. 해양 진출이 활발하지 않았던 것은 혹시 배를 만드는 데 필요한 목재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지중해 일대는 건조한 기후로 키가 작은 관목 밖에 자라지 못한다. 게다가 알제리는 해안 너머에도 나무가 자랄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사하라 사막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도 언젠가 전문가들에게 확인을 받아야 할 개인적 견해다.
오랑 사람들이 지중해로 진출했던 적은 없었지만 그들의 문화는 지중해 너머 유럽 대륙까지 진출했다. 알제리를 대표하는 현대 대중음악 ‘라이’다. 유럽에서 서구화된 아랍어 대중음악을 통칭하는 단어처럼 쓰이는 ‘라이’는 오랑과 인근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통 시가를 현대화한 음악이다. 타악기와 현악기가 내는 빠른 템포의 반주에 맞추어 남녀 간의 사랑이나 개인적 정서를 노래하는 대중가요인데, 대단히 흥겨워서 듣는 사람들은 앉아 있지 못하고 일어서서 춤을 추게 된다.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탄압을 받아 알제리에서는 라디오나 TV와 같은 공식적인 채널에서는 금지되었으나 알제리 이민자들이 많은 파리의 카페나 바 등을 통해 퍼지면서 점점 프랑스인 팬들이 늘어났다. 프랑스 대중음악뿐 아니라 록, 팝, 펑크, 랩 등 여러 외국 음악 장르를 흡수하고, 가사도 아랍어에 프랑스어, 영어도 혼합하며 유럽과 아랍세계로 퍼져 나가 이제는 « 경계를 넘나들고 새로운 경험과 문화를 자유롭게 흡수해 독창적 음악 세계를 개척한 대표적 트랜스문화 »가 되었다. 우리 일반 대중에게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누가 알겠는가? 언젠가 강력한 월드 뮤직으로 떠올라 우리의 k-pop과 경쟁하게 될지?
동영상으로 여러 가수들의 노래를 들어왔던 라이에 대해 전문가의 설명을 듣고 나서 잠시 기분이 좋아졌지만, 서울에 돌아와 생각하니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 공연장은 아니더라도 작은 카페나 거리에서 오랑 사람들이 부르고 즐기는 것을 직접 보고 함께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을! 음악을 모르는 비전문가의 한계였다. 두고두고 후회가 되었다. 다시 오랑에 갈 기회가 생긴다면 꼭 라이 뮤직 투어를 해야지. 마음을 먹었지만 그 기회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