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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관 Apr 04. 2024

땅에 쓰는 시

    

자기 안경을 찾는 할머니처럼 내 것이 의외로 가까이 있었음을 알고 싶다. 그건 행복 사랑 같은 대중적 말랑함이겠지만 그래도 상투적인 것들이 그립다. 베트남 여행 때 가이드에게 이끌려 천국의 계단(길거리 카페의 조악한 구조물이었다)이란 곳에 갔는데 줄까지 서서 빠짐없이, 하나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노르웨이 트롤퉁가에서 사진 찍으려면 전 세계 여행객들사이에서 두 시간을 기다린다더라. 또 다른 명소 제단바위도 마찬가지다. 어쨌거나 십분 정도 기다렸다가 천국의 계단이라는 곳에 올라가 당신과 함께 70년대 신혼여행 포즈로 사진을 찍었다. 작위적 연출 사진을 싫어했는데 막상 우리 부부를 보니 그냥, 괜찮은 것이다. 이런 변덕이 변화를 이끌어내는 거 아닐까. SNS 인증샷에 현혹된 탓이겠지만 그건 타인들 행복의 껍질만 맛보는 일이다. 올라가고픈 당신 속마음을 읽은 탓에 기꺼이 포즈를 취했다. 남편과 추억을 남기고픈 수줍음 많은 당신의 사랑이었다고 확신한다.      


인생을 잘하려고 애쓰지 말자. 결혼생활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왔으니 이미 잘 한 것이다. 손가락브이나 하트를 한 번도 한 적 없는 나는 어색하고 그네들의 일관성?이 신기해서 정작 그 미소는 못봤다. WEB을 오가는 길에 누군가의 포스팅을 보았을 테니 은연중에 나를 자극해 그리 행동하게 했을 것이다. 보라색 좋아하는 당신에게 맞춤인 ‘자카란다’라는 나무를 보았는데 당신 좋아할 꽃이라서 이름을 기억했노라고 허풍떨었다. WEB에서 우연히 보았는데 이름을 찾아두었다. 화분을 들여놓고 싶었지만 더운 나라에만 사는 나무였다. 

    

솟아나는 새싹들 때문에 바위도 간질간질할 테다. 신록의 계절이다. 갈 곳도 없는데 차에 기름을 가득 채워놓고 세차도 정성껏 했다. 낙엽을 '녹색의 시체'라 표현한 시인의 우울을 생각하다가 아름다운 것을 그리 보았으니 문학적 허세일지도 모른다고 해버렸더니 마음이 가뿐해지는 것이다. 동네 공원에 공공근로 할머니들이 나란히 팬지 모종작업하는 모습을 보며 ‘땅에 쓰는 시’라고 메모했다. 하긴, 시를 읽으며 키득거린다면 것도 이상스런 일이다. 돼지 시체조각을 구워먹는다고 썼던 나도 마찬가지다.      


철거가 완료된 재개발지역처럼 시원했다가 거기서 쫓겨난 세입자처럼 불안했다가 하는 나날이다. 제 내부의 폐허를 느끼는 건 실패들을 기억하는 것일 테고 빈터를 떠올리는 건 번아웃의 증거 아닐까. 시집은 소외와 슬픔들로 두꺼워진다. 시인은 직업일 수 없고 심장의 온도가 한 눈금 낮은 상태일 뿐이다. 웃음이 명약이라지만 조롱 비슷한 깔깔거림과 박장대소는 차분히 눌러놓을 필요가 있다. 감정들이 정리정돈 된 고요함이 좋다. 우는 사람에게 다 지나갈 테니 그치라고 충고하기보다 조금 덜 울라고 다독이고 싶다.

     

욕망, 욕심들을 희망이라 착각했다. 그것들은 사람을 고문하기만 할 뿐 잡히지 않는다. 판도라의 상자 맨 밑에 희망을 넣은 까닭은 제우스가 인간을 조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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