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영관 Jun 28. 2024

속도 60km


관계는 난로와 같아서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았어야했다. 실외기를 실외에 감추고 애쓰는 에어콘은 이주노동자 같아서 과로에 신경 썼어야했다. 무자비한, 시라는 사용주 밑에 시달리다가 과열되어 불난 경우도 많았다. 이런 문장을 써보다가 창을 열었다. 6월초인데 해가 과로하는지 덥다.     

까마귀와 까치가 칼부림 같은 영역다툼 소리가 들어온다. 까치는 제가 까치라고 생각하기에 영역을 양보하지 않고 까마귀는 태생이 까마귀였으니까 제 방식대로 사는 것이다. 새콤달콤 레모네이드 소리를 가진 박새와 쭉 뻗는 하이볼 목청을 가진 곤줄박이는 몸집도 작으니 피신했을 테다. 작거나 크더라도 나름의 생존방식은 있다. 나는 침묵이다. 말을 줄였더니 모임 후의 후회가 줄고 내게 날아오는 오해가 뜸해졌다. 나는 나를 과로시키고, 악당들도 많은 세상인데 나 하나만 괴롭히고, 이것만 견디면 큰 사람 될 거라는 환상이나 내게 갖게 하고, 결국 나는 나라는 괴물을 양식하는 셈이었다. 성장속도가 늦다고 구박하는 양식업자 말이다. 질투심은 내 심장에 기생하면서 결국 숙주까지 잡아먹어버렸다.     

중3이나 됐을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들이라서 얼굴에 미스트(mist)를 뿌리며 지나갔다. 어린 것들이 모여서 담배를 물고 있다. 어린 것들이라서 어리다는 휘황함을 모를 것이다. 어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지 퀵보드 타고 빠르게 지나갔다. 번민의 중심으로 빠르게 돌입한다는 것도 모르겠다. 어른과 사춘기의 차이는 체감속도로 구분된다. 하나는 지루한데 세월의 시속 60km가 겁나는 어른들도 있는 것이다. 노인은 길 끝에 무엇이 기다리는지 알아서 천천히 걷는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밖에 없고 자기 자신을 바꾸는 일조차도 믿을 수 없을 만큼 힘든데도 우리는 정작 남을 바꾸기 위해 가진 에너지를 모두 투자한다.(『더 걸 비포』, jp 덜레이니) 칭찬도 좋지만 시집 표4를 쓰듯이 정확하게 해야겠다. 누군가는 타인의 칭찬을 비웃을지 모른다는 경계심을 가져야겠다. 주름도 없다는 둥, 나이를 어디로 먹냐는 둥, 만나서 한참이나 칭찬을 거듭하는 인사형식은 또 얼마나 애틋한가. 내 삶의 마지막 페이지에 내가 표4를 붙이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      

로또 칸을 채우다가 창밖 하늘을 보는 사람의 등을 보았다. ‘낙첨 되었습니다’ 소리를 듣고 돌아서서 즉석복권을 훑어보는 사람을 훔쳐보며 하루를 보냈다. 피핑톰(Peeping Tom)까지는 아니고 글쟁이 습성일 뿐이다. 놀이터 파고라 아래 앉은 노인의 눈이 동굴 같았다. 그 동굴 끝에는 본인이 앉아있으리. 내가 생각하는 최악의 형벌은 거울 하나만 걸려있는 독방에 가두는 것이다. 자신보다 독한 극약이 어디 있으며 자신이라는 불치병을 무엇으로 완쾌할 수 있겠나. 반복은 기억을 강화하지만 결국 모든 것을 무감각하게 만든다. 치료할 수 없다면 쓰라림이라도 덜어내야 한다. 수동적이어도 살아내는 최선은 무감각 아닐까. 운명에 빠르게 끌려간다면 핑계라도 있어야 절망을 피하지 않을까.

 


작가의 이전글 무한반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