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션프로그램은 지원자의 간절함을 상업화한 것이다. 냉혈한 같다. 시청자는 통증 없이 그 순간들을 소비하고 중간광고를 성가셔한다. 녹화라면 그럴 것까지는 아니지만 중간광고는 출연자들이 한 숨 돌리는 시간으로 인식될 것이기에 성가시게 여기는 자체가 야박하다는 거다. 남은 피가 마르는데 쉬지 말고 또 해보라는 요청이다. 강퍅하다. 이러다가 지원자에게 감정이입 되어 응원하고 절망한다. PD는 이 지점을 노린 것이다만 심사위원이 비난을 받기도 한다.
“얘는 노래는 잘 하는데 이상하게 안 땡겨”라는 심사위원 멘트가 맴돌았다. 동점자 결정토론이었다. 진행 당시에는 지원자에게 들리지 않지만 재방송을 보는 탈락자는 들었을 테니 비수가 될 것이다. 감정 수습을 위해 자신을 위로하며 “내가 그래도 잘 했어”를 되뇌지 않았을까. 몇몇 오디션을 전전하며 심장이 녹슬었을 그 당사자에게 박수 쳐주고 싶다. 지상파와 인디무대는 엄청난 격차를 가지지만 기성 가수와 지원자 실력이 차이 없다고 생각될 때마다 ‘운칠복삼’ 같은 상투어를 붙이게 된다. “이상하게 안 땡긴다”는데 어쩌겠는가. 저울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눈금을 수긍하게 하는 게 고수 심사위원이다. 제 취향을 공개적으로 떠든 그이의 배려심이 아쉽다.
무대는 아니고 출판 기획위원에게 원고를 보낸 적 있기에 지원자를 공감한다. 고통의 총량은 같을 테고 당장 결과를 듣는다는 점에서 지원자들이 나보다 낫다. 원고 보내고 3개월 기다리면 강철심장도 구멍이 난다. 그걸 검토하는 기획위원은 제 취향에 따라 거부하고 인맥에 따라 허술한 원고도 끼워주었을 것 같아 심란해진 적 많았다. 그랬을 것 같은 작품이 드물게 있었지만 졸렬한 의심이었다. 근래에 지원자와의 과거인연을 언급한 오디션 심사위원도 보았다. 세상은 우스꽝스럽고 부조리 천지지만 느낄 때마다 맥이 빠진다. 소위 잘나간다는 사람들도 선정됐다는 소식에 매달려 산다. 마음이 가난해서 타인을 핑계 삼는다는 뜻으로, 빈자소인(貧者小人)을 떠올린다.
우리를 이끄는 힘은 취향이고 변덕이다. 취향에 따라 자본주의적으로 구매하고 반복하는 게 변덕이다. 변덕의 사촌은 후회다. 아름다운 취향이 진정한 예술이라 생각한다. 타인의 것인데 내가 갖고 싶어야 예술이란 말이다. 변덕은 겪는 사람 짜증나게 한다. 지적에 감탄하고 그의 멘트를 인용하픈 심사위원은 어디 있을까. 심사에 좌절한 분들께 카푸치노 한 잔 사드리고 싶다. 당신들 희망이 천사의 취향과 같기를 바란다. 그리고, 바늘에 찔리면 바늘에 찔린 만큼만 아파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