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레코즈 #1
“시골 엄마집으로 완전히 내려갈 거야”라고 얘기하자, 친구가 말했다. “너 시골 내려가면 이장님 아들이랑 결혼한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친구들은 서울을 떠난다는 생각은 해 본 적도 없다. “맥도널드는 있냐?(없음)” 등등의 질문에서 알 수 있다. 때때로 나는 꽤 중대한 사안을 성의 없이 결정해 버리는 버릇이 있는데, 그때도 그랬다. 당시 친구들 중 자취하는 건 나뿐이었고, 다들 가족들과 한 지붕 아래서 살고 있는 터라 틈만 나면 ‘집구석 탈출 전략’을 고안하던 시기였기에 다시 집으로 기어들어가겠다는 나에게 대체 왜 그러느냐(돌았냐)고 했다. 부모님이 퇴직 이후의 삶터를 시골로 정했을 때 솔직히 나와는 별 상관이 없는 일로 생각했었다. 가끔 내려가서 시골 맛을 즐기면 좋지 뭐, 이 정도. 그런데 지금 내가 그곳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새벽에 술에 절어 귀가하거나, 시도 때도 없이 끼니를 거르거나 뭐 아무래도 좋았던, 타인과의 조정과 조절이 필요 없던 가벼운 일상감은 너무나도 매력적이긴 했지만, 어느 날 문득 이제 그런 일상패턴의 전환이 절실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결정하지 않으면 앞으로 두고두고 뒤통수를 후려 맞을 것 같은... 그렇다면 혼자서도 규칙적인 생활인으로 살아보면 어떨까 하는 방안도 생각해 보았지만, 약 8년 동안의 자취생활이 너무나도 지겨워지고 버거워진 탓에 귀가를 결정했다.
혼자살이 내내 붕 떠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자취 초반에는 그 기분을 해방의 기쁨이라 여겨 거리낌 없이 누렸지만 곧 이 기쁨은 공허함이 되고. 마음의 허기를 마뜩잖은 것들로 가득 채우는 동안 엉망이 된 생활 속에서 어느 날 총기 없는 눈동자를 하고 있는 나를 마주하고선 아차 싶었다. 혼신의 힘을 다 해 망가지고 있었던 거다. 배고프다고 똥을 먹을 수는 없는 건데 말이다. (물론 자처해서 입에 부은 것도 본인이지만요) … 아무튼 이러저러한 이유로 서울생활과 혼자 사는 것 모두 종료하기로 결정. 이사 막판에는 조금 숨이 막힐 정도였다.
떠나기로 결심한 이상 서울에서의 어중이떠중이 생활을 하루라도 빨리 청산하고 싶은 마음에 곧바로 작업실과 자취방을 부동산에 내놓고, 관련된 은행 업무와 세무 관계를 정리했다. 일반적으로는 집이 나간 뒤에 이사날짜를 잡지만, 그마저도 기다리고 싶은 마음이 없어 부동산에 다녀오는 길로 곧장 이삿짐센터에 전화를 걸어 예약을 했다.
집 청소를 했다. 다시 쓰지 않을 물건들, 누가 훔쳐가도 눈치채지 못할 물건들, 누군가 두고 가거나 빌려준 물건들. 한데 모아두니 양이 상당했다. 언제 이렇게 많은 물건들이 집에 기어들어온 거지. 차근차근 그간의 잔재와 잔정을 말끔히 정리하고 나니, 노련한 미용사가 머리를 박박 감겨준 것처럼 뒤통수가 개운했다. 이사준비를 속성으로 하는 바람에 떠나는 자의 여운을 충분히 즐기지(?) 못해서 비련의 여주인공 마음으로 이사당일 기차에 올랐는데, 세상에나 그렇게 가뿐할 수가.
내려가는 기차에서 네이버사전 어플을 열어 귀촌을 검색해 보았다. 떠나기 전 지인들과 몇 차례나 페어웰 모임을 가졌는데, 그때마다 저들끼리 귀촌이니 귀농이니 가타부타 갑론을박하여 정확한 단어를 찾아내기 위함이었다.
<귀촌(歸村): 촌으로 돌아가거나 돌아옴> 나는 애초에 촌에서 온 것은 아님으로 땡.
그렇다면 귀농.
<귀농(歸農): 다른 일을 하던 사람이 그 일을 그만두고 농사를 지으려고 농촌으로 돌아감> 흠, 농사를 지으려는 마음은 없으니까 이것도 아니고.
귀향은 어떨까.
<귀향(歸鄕):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돌아옴> 도착지가 고향은 아니니 귀향도 아니다.
하던 차에 발견한 적절한 단어. 낙향이다. 어감이 썩 달가운 느낌은 아니지만, 의미는 아주 걸맞다.
<낙향(落鄕): 시골로 거처를 옮기거나 이사함> 나는 낙향열차를 타고 있군.이라고 생각하면서 어째서 낙향의 낙(落)이 떨어질 낙이 되는 걸까 하고 생각했다. 수도권을 제외한 나머지는 그저 달랑달랑 붙어있는 것이란 말인가. 벌써 지방인으로서 굉장히 분한 지점이다. 유의어로 표시되는 퇴경 退京(서울에서 퇴치당했다는 의미?)이나 하향 下鄕(뭐가 됐든 서울 밑이라는 건방 좀 보세요)을 보면서 가관이구만 하며 웃었다.
그나마 긍정적인 해석에서의 여지를 (애써) 찾아보자면, 동음이의어의 낙향이라는 단어가 하나 있다는 점이다. 바로 즐길 락의 낙향이다. <낙향(樂鄕): 늘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좋은 땅> 낙향(落鄕)에서 출발해서 낙향(樂鄕)까지 도착할 수 있다면 좋겠다. 언젠가 꼭 반드시 낙향(樂鄕)에서 성실하게 밭을 매는 잘생긴 이장님 아들을 찾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