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드라마 《브러쉬 업 라이프(ブラッシュアップライフ)》 를 이틀 만에 보았다. 30대에 돌연 죽어버린 주인공 아사미(안도 사쿠라)가 절친의 목숨을 구해내기 위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인생을 다시 살게 되는 뻔한 타임리프 컨셉 드라마이지만, 일드특인 순수악 형태의 빌런이 나오지 않고, 일상이 현실감 있게 표현되어 있어, 보다 보면 어느 순간 이게 SF드라마였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성격, 취향, 인간관계, 학교, 직업, 주거환경 등의 요소는 수 많은 선택들을(자의로든 타의로든) 거쳐 고정된다. 그 선택들이 축적된 레이어들은 하나의 파일로 렌더링되어 ‘현재의 나’를 구축하는 것이다. 매 환생마다 다른 선택을 시도하고, 그 선택들로 달라진 인생을 살게 되는 아사미를 볼 수 있는데, 몇 번을 선택해도 결코 바뀌지 않는 것들도 존재한다는 사실(아사미와 헤어져야만 미래에 10억장자가 될 수 있는 구남친이라던가)이 1회차 인생을 사는 나에게도 크게 공감되는 부분이었다.
느긋하게 점심으로 유부초밥을 먹다 무심코 떠오른 에피소드에, ‘그 얘기는 꺼내지 말 것을’ , ‘그 길로 돌아갔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을 했다. 지나간 것들은 왜 항상 희미하게 보이는 꼬리를 달고 다니나. 엔간하면 후루룩 털고 일어날 것을, 혼자 식사를 하는 바람에 걸려오는 말이 없어 공연히 진지해졌다. “에이, 그래도 그땐 최선이었어” 하고 생각하지만 뺨을 때리듯 내뱉던 그 사람의 마지막 멘트가 떠오르면 다시금 반성하게 된다. 그렇지만 아마 2회차 인생이 주어져 그 때로 돌아간대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가 개봉했을 무렵, 후기가 극명하게 갈려서 볼까말까 고민하던 중에 상영종료가 되어 이제서야 OTT로 보았는데, 웬걸 영화관에서 볼 걸 그랬다. 저예산 영화였으나 감독의 선택이 매우 박력있었다.
영화가 맹렬히 토해내는 메세지들 중 가장 마음을 울렸던 것은, 최악의 선택들이 만들어낸 최악의 현실을 살고 있는 주인공 에블린이, 멀티버스에 존재하는 최선의 에블린으로 비롯된 빌런 조부 투파키를 다정함으로 물리친다는 결말이었다. 말도 안되고 웃기는 영화 속에 이렇게 단단한 심지를 박아놓다니. 모든 결정의 순간마다 쪼개지고 태어나는 무수한 우주 속에서 수 많은 가능성을 경유하고 도착한 이 순간을 생각해 보았다. 실수와 실망을 거치면서 넓혀가는 각자의 우주 속에서 일어났으면 하는, 일어났을 법한, 일어나선 안되는 순간들이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들떠 자꾸만 어깨가 들썽거리는 것이다.
잠이 들지 않는 밤이면 벽장 속에 감추고 싶은 지난 날들이 무자비하게 나를 괴롭힌다. 정성 들여 골라 놓은 현재의 나를 뒤집어 보니 조각천으로 급급하게 기운 누더기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나 할까, 바느질을 전부 뜯어내고 제로부터 시작하고 싶어지는 충동이 들 때가 있다. 그간 해왔던 최선의 선택들이 사실은 최선이 아니었음에 오싹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선택들로 출력된 ‘현재의 최악의 나’는 또 다시 최선의 선택을 할 것이고, 그 최선의 선택이 과연 미래의 최선일지는 모를 일일 것이며 그게 만일 최악이 되어버린다면… 이러다간 끝이 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 세계를 완전하고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어떤 것이 최선이고 최악인지 골라내는 것은 필시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망가진 현주소에서도 미소를 띄우고 산산조각난 나를 이어붙이면서 하루를 살아내는 것은, 동시다발적으로 오는 실수와 실망의 막간에 자리하고 있는 기쁨과 환희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속에서 말하는 ‘다정함(be kind)’이 우주를 살리는 묘안이 되었던 것처럼. 온 우주의 기운을 모아 쏘아대는 융단폭격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을 우리는 잠재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까지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더하여 서사를 뿌리치고 뻗어가는 원심력과 존재이유에 대한 구심력을 적절히 조이고 풀어가며 살아가야 하는 똘똘한 지혜가 더해진다면 더할 나위 없다.
종종 셔츠단추를 잘못 잠가 마지막에 멀뚱히 남게 되는 단추가 하나 있다. 그런 모양새로도 그냥저냥 살아가는 것이다. 어느 우주에서는 나보다 더 최악으로 살고 있는 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모르는 새에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는 것 같기도요(농담입니다).
ps.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를 좋아하는 사람과 이야기 나누고 싶다는 말에 절실히 공감하며,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에브리씽 레브리웨어 올 앳 원스)》 의 2인조 감독 다니엘스(Daniels)가 연출한 뮤직비디오를 한번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병맛 비주얼이 정말 출중하거든요. 워낙 비급으로 연출을 해서인지 대략 10년 전 작품인데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싼마이 감성이 느껴진답니다.(좋은 의미에서요) 꽤 오랫동안 노래를 흥얼거리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The Shines - Simple song https://www.youtube.com/watch?v=RoLTPcD1S4Q
Foster The People - Houdini https://www.youtube.com/watch?v=_GMQLjzVGfw
DJ Snake, Lil Jon - Turn Down for What https://www.youtube.com/watch?v=HMUDVMiIT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