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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명은 자기만의 밤을 건너간다

아우스터리츠

by 권민정


《아우스터리츠》 W.G. 제발트



죽어가는 그런 나방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종종 이 혼돈의 시간에 그들은 어떤 불안과 고통을 느꼈을까 하고 자문하곤 하지요. 알폰소에게 들은 바로는 아무리 사소한 미물이라도 그들의 영적인 생명을 부인할 이유가 원래는 없다는 거예요,라고 아우스터리츠가 말했다. 인간이나 수천 년 전부터 인간의 감정 상태와 밀접한 개와 다른 가축들만 밤에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작은 포유동물들, 즉 쥐 나 두더지도 그들의 눈의 움직임에서 알 수 있듯이 잠을 자면서 오로지 그들 내면에만 존재하는 세계에 머물고 있으며, 나방이나 채소밭의 상추도 밤에 달을 쳐다보면서 어쩌면 꿈을 꿀지도 몰라요,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pp106-107)




W.G. 제발트 (1944-2001)는 전후 독일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그는 장르를 넘나드는 글쓰기를 하는데 소설, 수필, 기행문, 역사서술이 경계 없이 섞인 작품을 쓴다. 그는 독일의 과거, 특히 나치 시대가 남긴 상흔을 집요하게 탐구하는 작가이다. 그의 작품 세계는 망각된 과거, 지워진 흔적에 대한 탐사이다.


이 작품 《아우스터리츠》는 그의 대표작으로 유럽 현대사의 폭력 속에서 뿌리를 잃은 한 남자(아우스터리츠)가 자신의 과거를 추적하는 이야기이다. 이 작품 역시 소설이면서 역사 기록, 수기, 비평을 섞어 독특한 문체의 글이다. 주인공 아우스터리츠는 1930년대 후반, 나치의 박해를 피해 킨더 트랜스포트(유대인 아동 구호 열차)에 실려 영국으로 보내진 한 소년의 생애를 따라가는 소설이다. 주인공 아우스터리츠는 자신이 누구인지, 부모가 누구였는지, 왜 고향을 떠나야 했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웨일스의 목사 부부에게 맡겨져 성장한다. 성인이 된 후 그는 도시의 건축물, 폐허가 된 역, 버려진 요새 같은 장소를 탐사하다가 점점 자신의 과거를 둘러싼 흔적들을 되짚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의 ‘실종된 삶’ 전체를 마주하게 된다.


그는 친구 제럴드의 별장에 놀러 가서 증조부 알폰소와 함께 해안 절벽의 경이로운 풍경을 본다. 저녁에 증조부와 함께 해안 절벽에 앉아 수많은 나방 떼, 제비들의 하늘을 나는 모습을 보며 증조부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 문장은 그곳에서 겪었던 일을 아우스터리츠가 이 소설의 서술자인 ''에게 하는 이야기이다.


이 아름다운 문장을 본 후 “나방이나 상추도 밤에 달을 쳐다보면서 어쩌면 꿈을 꿀지도 몰라요” 하는 아우스터리츠의 말이 자꾸 생각난다. 사실 여부를 말하려는 문장이라기보다 존재에 대한 존엄과 연민을 극도로 확장하는 시적 사유의 글이겠지만, 특히 달 밝은 밤이면 “저기 저 나무도 꿈을 꾸고 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작가는 파괴된 인간 세계를 회복하기 위해 존재 전체에 대한 연민을 극단적으로 확장한다. 아우스터리츠는 자신의 잃어버린 삶, 기억, 뿌리 앞에서 무력해지면서 인간만이 고통이 아니라 모든 생명에게 깃든 고통과 불안을 감각하는 심리적 확대를 경험한다.


어떤 존재도 고통에서 예외가 아니며 모든 생명은 자기만의 밤을 건너간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타자를 바라볼 때 인간의 상처도 비로소 말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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