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by 권민정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이리하여 18세기 말엽에는, 내가 역사를 다시 쓴다면 십자군이나 장미 전쟁보다 더 충실히 기술하고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을 변화가 일어났지요. 중산층 여성이 글을 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만일 《오만과 편견》이 중요하다면, 그리고 미들 마치》《빌레트》《폭풍의 언덕이 중요하다면, 그렇다면 사절판 책과 아첨꾼에 파묻혀 시골집에 갇혀있던 귀족 부인들뿐만 아니라 일반 여성이 글쓰기에 몰두하게 되었다는 것은 내가 한 시간의 강의에서 입증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일이지요. 셰익스피어가 말로 없이는, 말로는 초서 없이는, 초서는 길을 닦고 언어의 자연적 야만성을 길들인 잊혀진 시인들 없이는 글을 쓸 수 없었듯이, 제인 오스틴과 브론테 자매 그리고 조지 엘리엇도 이러한 여성 선구자들 없이는 글을 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걸작이란 혼자 외롭게 태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PP117-118)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은 1929년 출간된, 여성이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물질적 사회적 조건, 그리고 여성 문학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억압되고 남았는가를 탐구하는 사유의 기록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1928년 10월에 캐임브리지 대학의 뉴넘 칼리지의 예술협회와 거튼 칼리지의 오드타에서 강연을 했다. 그 강연의 소논문에 기초하여 이 책이 쓰였다.

버지니아 울프는 그 강연에서 여성이 소설을 쓰려면 ‘자기만의 방’과 ‘연간 500파운드’가 필요하다고 말했는데 이는 사유의 자유, 경제적 독립, 사회적 제약에서의 해방을 상징한다.

오늘의 인용문은 18세기말 중산층 여성이 글을 쓰기 시작한 사건은 매우 큰 사회적 변화이고, 이 변화는 십자군 전쟁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제인 오스틴, 브론테 자매, 조지 엘리엇은 선구 여성들의 토대 위에 존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걸작은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다수의 경험이 응축되어 탄생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여러 해 동안 일군의 사람들이 공통으로 생각한 결과이며, 따라서 다수의 경험이 한 사람의 목소리 뒤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한강 작가 역시 노벨문학상 수상 직후 전화인터뷰에서 “나는 한국 문학과 함께 자랐다.”라고 말했다. 한강 작가는 어린 시절부터 한국어와 한국문학작품에 익숙했고, 그 배경이 현재의 문학 감수성과 언어 감각의 토대가 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앞선 세대 문인들의 존재 덕분에 자신의 글쓰기가 가능했다는 생각일 것이다. 자신의 문학세계가 개인의 고립된 창작이 아니라 한국 문학이라는 토양 위에 세워졌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걸작은 혼자 외롭게 태어나지 않는다”는 사상과 맥이 닿는다.


버지니아 울프는 이 책에서 셰익스피어와 똑같은 재능을 지닌 ‘가상의 누이’ 이야기를 펼치며 그녀는 교육도, 글을 쓸 방도, 무대에 설 기회도 없어서 아무도 모른 채 죽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즉 상상 속의 셰익스피어 누이는 천재였지만 살아남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이 비극적 가설은 여성의 재능이 어떻게 역사에서 지워졌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자기만의 방》 6장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글쓰기에 대해 말한다. “자기 자신이 되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실재 reality”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여기서 실재란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삶을 살면서 문득 느껴지는 순간의 진실, 겉모습 뒤에 숨은 진짜 의미를 포착해야 한다는 것이다. 울프는 일상을 덮고 있는 무의미한 시간들 속에서도 가끔 갑자기 “존재가 밝게 드러나는 순간(moment of being)"이 찾아온다고 말한다. 작가는 이러한 실재를 정직하고 섬세하게 포착해야 한다는 것이다. 글쓰기란 삶의 본질을 조용히 바라보고, 그것을 문장으로 건져 올리는 작업이다라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 작가는 남을 흉내 내거나 관습적인 문장을 따라 하지 말고 내가 진짜로 느끼는 것을 쓰고, 사물을 편견 없이 바라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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