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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러련 Mar 11. 2024

[석순60] 여는 글

고려대학교 여성주의 교지 석순石筍 60집에 그럴연이라는 필명으로 실은 글입니다. 석순은 캠퍼스 곳곳에 오프라인으로 배포됩니다.



아니, 근데, 그리고 잠깐만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글을 쓰고 글을 읽고 글에 대해 이야기하던 숱한 밤들을 기억합니다. 그 자리에는 늘, 따로 또는 같이, 아니, 근데, 그리고 잠깐만이 함께했습니다.


    (겨우겨우 한 문장을 쓰고, 온점을 치고, 엔터를 누른 뒤)

    아니 근데…


    책에서는 이렇다고 하네요.

    그런가요? 근데…


    그럼 다음 글로 넘어갈까요?

    그… 잠깐만요.


머리는 복잡하고 마음은 무거울 때 아니, 근데, 그리고 잠깐만이 소중한 동료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들 덕분에 한 문장이 한 문단이 되고, 한 페이지가 두 페이지가 되고, 머릿속 생각이 활자가 되고, 쓰레기에 둘러싸여 울던 사람이 구멍 많은 페미니스트가 되었습니다.


    (기후정의행진에서 구호를 외치며) 잠깐만, 난 페미니즘하는 사람인데 어쩌다 체제전환까지 온 거지?

        
    만화에 남자밖에 안 나와서 재미가 없어. 아니 근데, 여자는 왜 안 나오는 거지?


    (어떤 종류의 귀여운 척을 하곤) 잠깐만, 지금 내가 페미니스트로서 이래도 되는 걸까?

우리는 싸운 적도 많습니다.


    너희들 때문에 글이 자꾸만 길어지잖아.


    아니야, 근데야, 잠깐만아, 이제는 회의를 마치자. 집 좀 가자.


그들은 지독하고 끈질깁니다. 뭐 하나 그냥 봐주는 법이 없이, 트집을 잡고 시비를 걸고 말대답을 따박따박 합니다. 아주 지긋지긋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머리가 복잡하거나 마음이 무거울 때면 그들을 먼저 찾게 됩니다. 그들과 마주 앉아 찬찬히 이야기하다 보면 해야 할 말이 떠오르고, 써야 할 글이 떠오릅니다. 늘 함께 다니며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들이 없는 삶으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미리 사과합니다. 그들은 아주 약삭빠르기 때문에 이 책을 쥔 당신의 손끝을 타고 당신에게로 넘어갈지 모릅니다. 그러면 당신은 조금 괴로워질지 모르겠습니다. 미리 고맙습니다. 그 괴로운 길에 함께 해주어서요.


아니 근데 잠깐만, 인사를 빼먹었군요!


안녕하세요, 석순입니다.


아니, 근데, 그리고 잠깐만이 함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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