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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러련 Aug 29. 2023

소피 루이스, 『가족을 폐지하라』

"장담하건대 당신은 (특정한 계급에 속한) 한 명, 두 명, 세 명, 또는 네 명의 개인에게 임의로 신생아를 떨어뜨리는 복권 시스템보다 더 나은 무언가를 상상할 수 있다. 그들에게 아기를 삶에서 가장 중요한 20여 년 동안 (아기 자신의 동의도 없이) 맡겨놓고, 아기가 자신의 육체적 생존, 법적인 존재 상태, 경제적 정체성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만들고, 또 그들이 자기 인생을 노동에 바치는 이유가 되게끔 강제하는 시스템 말이다. 당신은 사랑하는 아이에 대한 헌신이 성인들(특히 여성)의 족쇄가 되는 규범보다 나은 무언가를 상상할 수 있다."

 - 소피 루이스, 『가족을 폐지하라』38쪽


“금수저” “흙수저” 논리의 출현 이후 가족을 일종의 “로또”라고 여기는 경향이 더 강해졌으며, 그 경향은 늘 그래왔기에 당연하고 어찌할 수 없는 것으로 우리나라 대중의 인식에도 자리 잡은 듯하다. 그러나 『가족을 폐지하라』에서 제안하듯 태어나는 아동의 입장에서 다시 한번만 생각해 본다면,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임의적으로 어떤 ‘가족’에 배정되어 그 가족에게 생존을 맡겨야 한다는 것은 아동에게는 불공평하고 국가에게는 무척이나 편리하게 돌봄의 책임을 피하는 일이다. 김지혜의『가족각본』에서도 지적되었듯, 국가는 (정상)가족이라는 이상을 구축함으로써 개인(가족)에게 돌봄의 책임을 지우고 구성원의 노동력을 착취한다. 이에서 나아가 루이스는 이 거대 구조가 백인 부르주아 가족에게나 피식민/흑인/노동자/퀴어 가족에게나 마찬가지로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거대구조는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로 적용된다”는 말에 공감은 한다만, 마음에 켕기는 구석이 없지는 않다. 이미 국가권력에 의해 “폐지된” 가족들, 혹은 국가권력으로부터 개인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가 되는 가족들이 존재하는 와중에 가족을 싸그리 폐지하자는 주장은 배가 한참 부르거나 적어도 멋모르는 소리로 들릴지 모른다. (며칠 전 『가족각본』특강에 가서 가족 폐지론에 대한 질문을 했더니, 우리나라의 가족에 대한 담론 수준에서는 아직 시기상조인 것 같다는 답변을 들었다.) 성소수자가 (제도적) 가족을 형성할 수 없고(결혼할 수 없고) 비국민의 자녀는 존재하지도 않는 것으로 치부되는 우리나라 가족제도의 현실에서 가족을 냅다 폐지하자니 퀴어된 입장으로서 억울한 마음이 약간 든다. 가족이든 결혼이든, 그것이 좋든 싫든, 일단 누려나 보고 결정하면 안 될까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렇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가족 안에서만 연대와 돌봄을 사고할 수 있기에(그렇게 된 데에는 자본주의-가부장제가 설계한 가족 제도와 관념의 탓이 크겠지만—그리고 그 제도와 관념 내에서만 누릴 수 있는 혜택과 지원과 심지어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들이 있는 것도 문제지만) ‘가족 되기’를 그토록 원하는 것은 아닐까? 가족이라는 관계는 사실 그 절대적인 우연성에 비해 지나치게 강제적이다. (결혼도 까놓고 보자면 생각만큼 자의적이지는 않다… 과거에는 더더욱 (반)강제적이었고…) 그러니 내가 너의 가족이 되고 싶다는 말은, 가족으로부터 기대되는 돌봄과 보호와 사랑을 주고 싶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가족으로부터 그런 것들이 기대된다는 것 자체가 그 마음을 타락시키고 만다. 가족이 되고 싶다는 말은, 계약에 의해, 법적으로 정해진 관계에 의해, 돌봄을 제공해야만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이기도 하다.


말장난 같겠지만 실제로 그렇기도 하다. 무슨 말이냐면, 혈연이라는 관계가 갖는 임의성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가족됨'이 주는 제도적 혜택, 또 따스한 감각이 실은 '가족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것이라는 낯선 주장이 갖는 의미를 조금씩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 나는 결혼을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다. (와! 뜬금없다!) 흔히 철딱서니 없이 결혼을 미루는 이들의 태도로 일축되는 성생활의 자유에 대한 갈망 때문도 아니고, 결혼이라는 것에 따라붙는 구속이라는 딱지에 대한 반감 때문도 아니다 (동시에 그렇기도 하다... 돌봄 제공 의무를 구속이라고 본다면 말이다). 아무리 내 선택에 의한 결과더라도, 돌봄을 제공해야만 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이를 돌보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게 꼭 지금의 '가족제도'라고 명명되는 것에 포함된 이들만이 누리는 권리와 의무, 가령 주택청약의 우선순위라든가, 수술동의서 서명이라든가,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거부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지만 모두가 이런 것을 누릴 수 없음이 앞서 말한 가족제도 때문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물론 이게 현실적이라기보다는 이상적인 고민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좀 더 이상적으로 고민하고 싶다. 가능하다면 조금 더 멋진 관계를 구축하고 싶다. 그 관계 속의 우리는 서로를 돌보되 서로로부터 희생을 강요당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또 어떻게 요구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것의 이름이 가족은 아니어야 할 것 같다.



책갈피)


22쪽) 결국 모두가 패자다. 가족은 자본축적을 제외한 다른 모든 목적에는 비참할 정도로 부합하지 못하므로. […] 한편으로 가족은 이 지구에서 가장 많은 강간과 가장 많은 살인이 일어나는 장소다. […] 논리적으로, “당신을 가족같이 대하겠다”는 의지의 표명(많은 항공사, 레스토랑, 은행, 소매점, 직장에서 그러하듯이)은 소름 끼치는 위협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대신 누군가에게 은유적으로 “가족”이 된다는 건 그 사람에게 상당히 가족답지 않은 무언가, 말하자면 수용, 연대, 기꺼이 돕겠다는 약속, 환대, 돌봄이 있다는 걸 믿게 만드는 일이다. 


52쪽) 스필러스는 “가족”을 척도로 삼거나 염원하기보다는 흑인 여성들이 노예제의 여파로 “여성이라는 젠더의 전통적인 상징 바깥에” 우뚝 서게 된 사실에, 이 사실이 정치 투쟁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주목한다. “우리가 할 일은 이 색다른 사회적 주체가 설 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가족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그런 자리를.


64쪽) "가족을 제외한 모든 백인 제도가 파괴된다면 국가도 다시 일어설 수 있지만 백인 국가보다는 흑인 국가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가부장적 국가를 확실히 파괴하는 방법은 가족 제도를 파괴하는 것뿐이다.


66쪽) 흑인 돌봄 제공자가 흑인 아이의 인생에서 가족이 없는 상황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흑인 가족이 필요하지 않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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