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백 Feb 02. 2024

27. 폭 망한 레온 여행 (5월 1일 월)

40일간 산티아고 순례길 그림일기 

어제저녁 외관만 구경했던 레온 대성당을 오전에 다시 가니 줄을 안 서고 들어갈 수 있다. 순례자 입장료 할인은 없고 성당 직원은 순례자 여권에 도장을 불친절하게 찍고 날짜도 안 써주었다. 무성의함은 다른 성당과 비교되었다. 

  성당 내부는 아름다웠지만 작은 개별 성당은 창살문을 잠가놓아서 사진을 찍으려면 창살 너머로 손을 뻗어야 했다. 남편은 스테인드글라스 창이 아름답다며 사진을 열심히 찍었다. 

  내 블로그를 읽었다며 인사하는 순례자를 만났다. 단순하게 기록하는 마음으로 쓰는 블로그지만, 나를 알아보는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좋다. 


  오늘이 하필이면 5월 1일 노동절이라 대부분 상가가 영업을 안 해서 거리는 썰렁하고, 대신 가족 단위 사람들이 나들이하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동전을 쥔 손가락 모양 특이한 조형물을 보았다. 근처에는 로마 시대 수로 흔적이 남아있다. 귀중한 문화유산이라 생각되는데 안내판 하나만 있고 방치된 채 아이들은 놀이터 삼아 뛰어놀고 있다.

  강을 따라 산책길을 걸어서 산 마르코스 수도원으로 갔다. 아름답고 거대한 규모에서 수도원의 위상이 느껴졌다. 앞쪽 넓은 광장에 있는 분수에서 물이 솟았다. 광장 한편에 있는 지친 순례자 조형물은 벗어놓은 신발이며 표정이 그럴듯해서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산 마르코스 수도원 앞 광장에 있는 지친 모습 순례자 조형물은 생생해서 내 눈길을 끌었다.


  날씨가 좋아 무엇을 찍어도 사진이 예쁘게 나왔다. 오전에 레온을 돌아보고 숙소로 돌아와 쉴 때까지만 해도 괜찮은 여행이었다.  

    

  꼭 먹어봐야 하는 스페인 음식 사진을 들여다보곤 했던 남편에게 “레온이 큰 도시이고 여행하는 중이니 먹고 싶은 것, 무엇을 먹을지 미리 검색해요.”라고 했다. 

  저녁을 먹으러 나갔는데, 노동절이기도 하고 브레이크타임이라 문 닫은 식당이 많았다. 그래도 관광객이 많이 모이는 레온 대성당 근처에는 영업 중인 식당이나 카페가 여럿 있었다. 

  영업 중인 식당들 다 지나치고 문 닫은 식당 앞에서 투덜거리던 남편은 이 골목 저 골목 끝도 없이 걸었다. 대성당에서 멀어질수록 영업하는 곳은 점점 줄어들고 나는 저녁을 먹기도 전에 지쳐 쓰러질 지경이었다. 

  뭘 먹으려고 저러나 하는데 남편은 어떤 바(bar)에 들어갔다. 만들어져 있는 타파스는 본체만체하더니 메뉴판을 달라고 했다. 메뉴는 스페인어로만 되어있고 우리는 스페인어를 모르고 번역기를 돌려도 무슨 음식인지 알기 어려웠다. 

  고민 끝에 무언가를 주문했는데 한참 만에 도자기 그릇에 그럴듯한 찜 요리가 나왔다. 보기에 먹음직스러워 보여 잔뜩 기대하며 한 입 먹었는데 비위가 상했다. 고기가 아니라 여러 특수 부위로 만든 찜이었다. 25유로(바에서 그 정도 가격이면 비싼 음식) 내고 내가 먹은 건 맥주 반 잔과 서비스로 나온 빵 조각이다. 

  차라리 원하던 거 맛있게 잘 먹었다고 하면 나을 텐데, 자기는 뭔지 모르고 시켰다며 영업시간 타령만 하는 남편 말에 어이가 없었다. 뭔지 모르는 거 먹으려고 레온 골목이란 골목은 다 뒤지고, 영업하는 곳 모두 지나쳐서, 눈에 보이는 만들어 놓은 타파스 마다하고, 모르는 음식 나올 때까지 한세월 기다린 거였다. 참 나.

     

  레온 여행한다고 들떴던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어젯밤에 지갑을 도둑맞는 꿈을 꾸더니 재수 없는 날이다. 

  호스텔에서 아침밥을 만들어 먹고 있을 때, 미국에서 왔다는 한국계 순례자는 자기가 먹다가 남은 안초비 올리브를 우리 샐러드 접시에 불쑥 쏟아부었다. 그러더니 영어 섞어서 꼬부라진 발음으로 맛있는 것이니 먹으라고 했다. 기본적인 예의도 없는 아주머니 순례자 때문에 기분 상했던 일까지 떠올랐다. 

  내일 아침밥으로 먹으려고 사다 놓은 샌드위치 반으로 저녁을 먹으며 레온 여행을 마무리했다. 혼자 먹었는데 무슨 맛있었겠냐던 남편은 배가 부른 지 늘어져 영상을 시청하며 쉬고 있다.

  내일부터 다시 순례길을 걷는다. 얼마만큼 걸어야 작은 것들에 연연하며 맘 상하지 않는 경지에 이르게 될까.        

 

레온을 상징하는 사자상

                                             

매거진의 이전글 ​26. 여행자의 마음으로 레온을 향해(4월 30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