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백 Feb 02. 2024

28. 순례길 의미 그리고 의기양양해진 남편(5월2일)

40일간 산티아고 순례길 그림일기 

레온 Leon ~ 산 마틴 델 카미노 San Martin del Camino      

  레온에서 휴식과 여행을 마치고 오늘은 다시 순례자가 되어 새벽 일찍 출발했다. 레온이 큰 도시라 그런지 한참을 걷도록 도시를 벗어나지도, 다른 순례자를 만나지도 못했다. 

  4월 초에 걷기 시작했는데 달이 바뀌어 5월이 되었다. 아직도 새벽에는 쌀쌀해서 티, 후드, 패딩, 고어텍스 바람막이에 장갑까지 끼고 걷는다. 그동안은 레깅스를 내복 대신 입었는데 오늘은 등산바지만 입고 출발했다. 바람 세기와 찬 정도가 4월과 달라졌다. 

  스페인 다른 지역은 지금 이상 고온으로 엄청 덥다고 한다. 우리가 걷고 있는 순례길은 북쪽이고 고원이라 다른 지역보다 온도가 낮다. 

  우리나라 순례자는 넓은 챙모자, 토시, 장갑, 얼굴 가리개까지 하며 햇빛을 차단하는 데 신경을 쓴다. 차림새를 보면 멀리서도 우리나라 사람을 알아볼 수 있다. 반면 서양 순례자는 반소매 티에 반바지를 입고 모자조차 안 쓰는 경우가 많다. 피부를 햇볕에 태우려고 작정한 것처럼 보인다.   

   

  오늘도 차도 옆길을 걸었다. 자동차 소리에 시달리며 소음이 사람을 얼마나 피곤하게 하는지 또 한 번 느꼈다. 남은 거리는 200km대로 떨어졌다. 점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가까워진다. 지나온 시간이 꿈결 같다.        

                                                                       

200km로 떨어진 순례길 표지석 옆에 선 남편


  순례길 초반에는 배낭을 메고 걷던 순례자 중 많은 이들은 걷는 거리와 날짜가 길어지면서 배낭 택배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나이 든 순례자는 우리나라, 서양 상관없이 택배를 이용하는 비율이 늘었다. 몸과 체력의 한계는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남편은 처음부터 택배를 이용한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다른 순례자들이 증명하는 거라며 웃는다.

  순례가 꼭 고생을 동반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순례길에 이미 택배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는데 그것을 이용하는 게 무슨 문제냐고 한다. 덕분에 우리가 지치지 않고 걸을 수 있고, 특히 내가 블로그에 매일 글을 올렸다며 의기양양했다. 

  남편 무릎이 아프다는 말을 들은 후 나는 배낭 택배 이용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대신 내가 느끼는 불편함을 개선하려 남편과 계속 조율했다.

  무거운 배낭을 안 메고 걸었지만 걷는 동안 충분히 많은 것을 느꼈고, 오히려 무거운 배낭이 없어 힘도 덜 들고 일찌감치 도착하여 충분히 쉬고 글도 썼다.      


  이제 걷기에 익숙해져서 25km 내외는 거뜬하게 걷고 있다. 오늘도 26km 정도 가뿐히 걸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메세타 고원을 걷는 동안 구름 낀 날도 많았고, 바람도 간간이 불어 걷는 데 도움이 되었다. 듣던 만큼 메세타 고원이 그렇게 지루한 구간은 아니다.

  그동안 우리가 이용했던 사립 알베르게는 오래된 스페인 옛 건물을 개조한 경우가 많았는데 오늘 묵은 곳(La Huella Pilgrims)은 새로 지은 건물이라 아주 깔끔했다. 인터넷 사이트에는 새 건물이라 깨끗하고 좋다는 우리나라 순례자의 후기가 많았지만, 밥 해서 먹을 주방뿐만 아니라 전자레인지조차 없어 우리는 불편했다. 특히 이층 침대의 일 층이 너무 낮아 앉을 수도 없고 누워있어야만 했다.      


  알베르게에서 운영하는 식당은 7시가 넘어야 저녁을 먹을 수 있어서 우리의 리듬에 맞춰 점심 겸 저녁을 먹기 위해 근처 식당(Los Picos)을 찾아갔다. 메뉴에 쌀밥과 달걀부침이 있어 주문했는데 푸짐하고 맛도 괜찮아서 만족스러웠다. 

  식사 후 내일 아침밥과 걸으면서 먹을 간식을 사려고 근처 슈퍼마켓에 갔다. 내가 좋아하는 수박이 먼저 눈에 띄었다. 올해 처음 보는 수박이라 두 조각을 잘라 무게를 재고 돈을 냈다. 한 입 베어 무니 우리나라 하우스 수박처럼 진한 단맛은 아니지만, 청량하고 달콤한 수박 물이 입안 가득 찼다. 스페인 수박 한 조각에 잠시 행복을 느꼈다. 

  햇볕이 좋아 널어놓은 빨래가 나갔다가 오는 사이 다 말랐다. 그동안 해오던 대로 할 일을 마무리하고 쉬며 또 하루를 보낸다. 

나무가 있으면 걷기가 한결 수월해지는 메세타 고원 순례길. 오늘은 나무들을 자주 만났다.


매거진의 이전글 27. 폭 망한 레온 여행 (5월 1일 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