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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경 Jul 12. 2024

통증과 죽음의 고민 속에서 가족 사랑의 중요성


사람은 참을 수 없는 통증 앞에서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암 환자로 11년간 살아가면서,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나에게 닥칠 거라고는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견딜 수 없는 통증을 참고 삶을 견딜 것인가아니면 통증 없는 죽음을 선택할 것인가나는 진지하게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2달 만에 본격적인 생리가 시작되었다. 폐경기가 오려나 한 달을 건너뛰었지만, 생리 때만 되면 출혈만 없었지, 불쾌한 느낌은 여전했다. 출혈이 없어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지저분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번 달도 일주일 이상 지저분한 무언가가 나오면서 하루하루를 힘들게 지냈다. 그러다 본격적인 생리가 시작되었다. 평소라면많은 출혈은 3-4일이면 끝났다하지만 이번은 달랐다일주일 이상 많은 양의 하혈이 이어졌다     


고통은 극심했다. 두 달간 좋은 약과 비싼 물을 먹으며 체력을 최대한 올려놓았지만, 모든 게 한순간에 무너졌다. 열흘 가까이 흘린 생리혈로 체력은 다시 바닥을 기고 있었다. 무너진 체력을 올리기엔 공진단도 비싼 물도 역부족이었다.     




갑자기 오른쪽 팔에 견디기 힘든 통증이 왔다퇴원 이틀 전이라 더 긴장되었다. 처음으로 진통제를 먹고 잤다. 다음날도 진통제를 먹고 어깨 주위에 4개의 핫팩을 붙이고 잤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거의 이틀 밤을 고통 속에서 지냈다.     


딸이 아들을 시켜 퇴원 전날 밤이라며 전화했다. 나는 통증으로 고통을 호소하다 아이들 목소리에 울고 말았다. 어린 아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눈물을 참지 못한 나는 전화를 끊었다.      


잠시 후, 아들과 통화하는 나의 목소리에 놀란 딸이 전화했다. 내일 집에 오면 마사지 해주겠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해 주었다. 혼자 외로이 있는 이 병실이 싫었다이 밤이 끝일 것만 같았다.     




항상 웃던 얼굴이 짜증과 고통으로 가득 찬 일그러진 얼굴로 바뀌었다. 내 얼굴을 본 간호사들은 나의 고통을 이해한다며 퇴원 당일 아침에 진통 주사를 엉덩이에 놔 주었다. 통증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퇴원하면서 점심을 먹기 위해 친구가 운영하는 중국집에 들렸다.  

   

친구 한 명이 더 왔다. 나는 친구들 앞에서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며 처음으로 울었다. 친구들은 바람쐬러 강가로 나가자고 했다. 몸이 힘든 나는 거절했다.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짐 정리를 끝내고 쉬면서 나는 오만가지 생각이 왔다 갔다 했다.     




점점 심해지는 통증에 새벽에 나는 딸 방으로 달려갔다. 딸은 자다가 놀라서 일어났다. 안경을 찾는 딸에게     

“약 좀 찾아 줘! 엄마 약 어디 있니?”라는 나의 울부짖음에 놀란 딸은 부엌 식탁에 있는 약을 찾아 주었다. 통증은 점점 심해졌다. 참을 수 없었다. 기말고사 중인 딸은 학교 가기를 망설였다.     


“얼른 가! 시험 잘 보고 와야지! 엄마 집에만 있을 거야.”     


“괜찮겠어?”라며 걱정에 가득 차 집을 나서지 못했다. 억지로 학교로 보냈다.      




다음 날 새벽 통증이 더욱 심해졌다. 아이들 자는 동안 남편은 일을 나가기 위해 씻고 나왔다. 나는 울면서 남편에게 부탁했다. 내가 혹시라도 잘못되면 내 돈이 얼마 되지 않지만두 아이에게 나누어 주라고당신은 내가 들어놓은 보험만으로도 노후는 가능할 거 같으니     


두 아이 대학까지 졸업하고 자리 잡고 살 수 있게 해달라고. 남편은 내 거 필요 없다며 걱정하지 말고 건강만 신경 쓰라고 했다. 아이들에겐 앞으로 10년 이상 엄마의 손길이 더 필요하다며 나를 안아주었다     


오랜만의 남편과의 스킨십이었다. 지금의 내 처지와 고통을 공감하지 못할 걸 알고 있지만내 머릿속에는 오로지 아들딸 걱정뿐이었다. 지금의 통증을 이길 수 없다는 걸 인지한 나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뼈암 통증의 시작이라면 나는 이 고통을 참고 살 자신이 없었다어제오늘 통증을 느끼면서 ‘어떻게 하면 고통 없이 실패하지 않고 한 방에 죽을 수 있을까?’ 어설프게 잘못해 실패해서 장애라도 생기면 지금보다 더 고통 속에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약을 처방받아야 하나? 약국가서 어떤 약을 사서 모아야 하나? 어느 건물로 가서 떨어져야 하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죽을 자신도 없었다모든 게 무섭게 두려웠다.     




딸이 학교 가기 전 아침을 차려주었다. 식사 후, 딸은 학교로 나는 동네 정형외과로 갔다내 이름이 호명되어 선생님을 만났다. 어깨가 아프다고 하자,     

 

“지난 4개월간 어떻게 지내셨어요?”     


“계속 한방병원 다니면서 치료하다 뼈암인 걸 알게 되었어요.”     


“본 스킨에서 그렇게 나왔으면 본 병원 가셔서 통증을 위한 방사선 치료를 받으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초음파를 한번 봐 주시겠어요? 어깨 아래 살의 통증이 너무 심해서 혹시 인대나 근육에 문제가 있을 수 있잖아요. 뼈도 볼 수 있으면 좋겠고요.”     


“뼈는 볼 수 없지만, 봅시다.”라며 초음파로 팔을 보시면서 “오늘은 진통제 주사와 물리치료 받고 큰 병원으로 가보시게 좋을 거 같아요.”라고만 하셨다.     


진통 주사를 맞고 물리치료실에서 이런저런 치료를 받아도 통증은 점점 심해졌다. 그때 오빠 전화가 울렸다. 나는 울면서 아프다고만 했다.     


“병원 가도 진통제 외에는 안 줘. 아버지 때 경험해 봤잖아.”라며 안타까워하며 전화를 끊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침대에 대자로 누워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핸드폰에 알람이 나의 신경을 건드렸다. 나는 모든 알람을 껐다눈물만 계속 흘렀다화장실에 가고 싶지만일어날 수가 없었다.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스피커폰으로 전화기를 켜고 울기만 했다. 언니도 울면서      


“정신 똑바로 차려!”     


“언니! 정신이고 뭐고 그냥 죽었음 좋겠어. 이건 사는 게 아니야.”     


“김인경! 정신 똑바로 차리라니깐! 집에 아무도 없지? 형부 점심 사 가지고 갈게. 뭐 먹고 싶니?”     


“언니! 나 움직이기 싫어. 아침에 딸이 밥 줬어. 아들 오면 달라고 할게.”     


조금 있으니 형부 전화가 왔다. 울면서 오겠다는 걸 막았다. 모든 게 귀찮았다. 진통제를 또 먹었다. 며칠째 먹는 진통제에 입안엔 입병이 가득했다피곤함이 몰려왔지만잠을 잘 수가 없었다잠깐 정신을 잃었다.     




정신 차린 나는 본병원에 가기 위해 한방병원에 연락했다아무리 연락해도 교수님과 연결되지 않았다. 응급실로 가려고 알아보았다. 한방은 응급실 입원이 안 된다고 했다. 퇴원한 지 3일밖에 되지 않았지만, 참을 수 없었다.  

   

토요일에 입원해야 월요일에 양방 선생님을 만날 수 있다무조건 입원해야 했다. 집에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학교에서 걱정되어 전화 온 딸은 울면서 병원에 자기와 가자고 했다. 혼자 가지 말라고 했다. 너무나 감사했다.     


혼자 가면 간병인을 구해야 했다. 나는 서 있을 수도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그렇다고 허리가 아파서 오래 누워있을 수도 없었다. 딸은 마지막 기말고사를 마치고, 집에 와서 입원 준비를 했다.     


밤에 잘 때도 새벽에 화장실 갈 때 혹시나 넘어지거나 못 움직일까걱정된 딸은 내 손을 꼭 잡고 잤다. 비참한 내 모습에 말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진통제를 여러 개 먹고 잠이 들었다.      




통증과 싸우면서 인간이 고통 앞에서 스스로 무너지지 않을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내 삶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 속에서도 가족의 사랑과 따뜻한 위로가 나를 버티게 해주었다.     


우리는 종종 가장 어렵고 힘든 순간에 자신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다. 이때 가족의 사랑과 정성은 진정한 삶의 가치를 깨닫게 해주는 순간이 된다.          


2024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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