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 긋기의 어려움
코로나 봉쇄와 격리가 날로 심해지기만 하니 걱정이다. 힘들다고 투정 부리다가도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도 훨씬 오래전부터 더 힘든 상황을 견디고 있다고 하니 섣불리 불평도 못하겠다. 어른들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아이들이 더 안 됐다. 우리 집 아이들은 그래도 십 대여서 컴퓨터와 핸드폰만 있으면 집에서 꼼짝 안 하고 지내는 건 얼마든지 잘한다. 한참 뛰어노는 거 좋아하는 더 어린아이들은 집에 갇혀서 많이 지겨워하고 있을 것 같아 안쓰럽다. 자라는 아이들은 신체 활동이 중요하고 또한, 또래 관계를 배워 나가는 시기인데 그런 활동에 제약이 있다는 게 여러 모로 걱정스럽다.
우리 집 아이들도 집에서 아무런 스케줄 없이 지낸 지 오래됐다. 원래부터 공부하는 학원은 별로 안 다니고 있었지만 악기 연주나 스포츠 활동은 하나씩 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모든 활동이 중단되고 하루 종일 집에 갇혀서 시간이 무한정 주어진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냥 두니까 너무 몸을 안 움직이는 게 걱정돼서 하루에 일정시간은 유튜브 보면서 홈트나 요가를 같이 해보자고 제안했다. 처음에는 하기 싫어했지만 내가 같이 해주니까 그래도 조금씩 따라 하고 있다. 그나마 이게 아이들 성장과 발전에 도움이 되는 유일한 일정이다. 나머지 시간은 모두 컴퓨터 오락과 핸드폰 게임으로 소진하고 있다. 이래도 되나 걱정스럽지만 별다른 뾰족한 도리가 없다.
감정코칭에서는 아이의 감정은 모두 수용해 주되 행동에는 일정한 한계를 그어 주어야 한다고 배웠다. 아이를 바람직한 행동을 하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어른의 역할이고 책임이기 때문에 아이가 바른 방향으로 가지 않는데도 그대로 두고 무조건 오냐오냐 하는 건 감정코칭이 아니다. 문제는 아이가 컴퓨터 게임을 할 때 얼마큼이 허락해도 되는 정도의 적당한 여가이고 얼마큼이 지나쳐서 한계를 그어주어야 하는 정도인지 정해진 답이 없다는 점이다. 그것은 부모와 아이가 서로 소통하고 조율해서 적당한 지점에 한계를 함께 그어야 한다. 아무리 조율을 해도 아이도 백 프로 만족하고 부모인 나도 백 프로 만족하는 지점은 없는 것 같다. 나야 아이가 공부만 했으면 좋겠고, 아이는 게임만 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감정은 행동의 원동력이다. 부정적인 감정이 문제 행동을 하게 만들고, 긍정적인 감정이 바람직한 행동을 하게 만든다고 배웠다. 그러기에 아이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많이 느끼게 하면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바람직한 행동을 한다는 게 감정코칭의 철학이다. 그런데 실제 삶에서는 이 원칙이 그렇게 단순하게 적용되지는 않는 것 같다.
실제로는 부정적인 감정이 바람직한 행동의 동력이 되기도 하고 긍정적인 감정이 문제 행동의 동력이 되는 것처럼 보이는 때가 있다. 나는 자랄 때 공부도 열심히 하고 착한 아이였지만 긍정적인 감정으로 그러지는 않았다. 어른들은 공부 안 하면 장래에 큰 일이라도 날 것처럼 두려움을 조성했고 친구들 사이에 경쟁심도 부추겼다. 엄마는 내가 성과를 낼 때 과하게 기뻐하고 내가 작은 실패라도 하면 나보다 더 많이 좌절하고 실망했기 때문에 그런 게 나한테는 큰 부담이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실패하면 망할까 봐 두려웠고, 친구한테 지면 자존심 상할까 봐 두려웠고, 엄마가 실망하고 슬퍼할까 봐 많이 두려웠다. 지금 돌아보면 공부하고 말 잘 듣고 남에게 칭찬받는 행동도 많이 했지만 그 행동의 원동력이 두려움이었기에 건강하고 행복한 상태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나처럼 쫓기며 살게 만들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아이들이 부담이나 두려움, 과도한 경쟁심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신경을 많이 썼다. 되도록 심한 잔소리나 큰 억압을 하지 않으려고 신경 쓰며 키웠더니 아이들이 스트레스 없이 마냥 해맑게 잘 자라주는 건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좀처럼 철이 들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마음이 편하니까 단순하게 재미있는 일을 찾아 하루 종일 핸드폰하고 컴퓨터 게임만 하면서 지내는 것 같다. 긍정적인 감정은 바람직한 행동의 원동력이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자발적으로 공부하고 자발적으로 컴퓨터 게임하는 시간을 줄이는 바람직한 행동을 스스로 하지는 않는 것 같아서 많이 초조해진다.
결국은 우리 엄마가 나한테 했던 것처럼 뭔가 스트레스를 줘야 아이들이 바람직한 행동을 하는 게 아닐까 의심스럽기만 하다. 그럴 때는 그냥 아이들에게 내 마음을 편안하게 털어놓는 편을 선택했다. 요즘 너무 컴퓨터 게임만 많이 하는 것 같아서 걱정스럽다고, 그래도 학교 진도에 맞춰 조금씩 공부를 해 둬야 학교 수업을 따라갈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제안을 해 보았다.
간섭과 관심의 차이는 너무나 얇다. 내 목소리에 조금이라도 채근하는 느낌이나 짜증이 섞여 있으면 잔소리가 된다. 그냥 편안하게 내 생각과 감정은 이렇다고 전달한다는 마음으로 해야 적당한 관심이 된다. 그것도 아이가 기분 별로 안 좋을 때 하면 내가 아무리 조심해도 아이는 짜증스럽게 듣는다. 아이가 싫어하는 기색이 보이면 괜히 부딪히지 않고 바로 멈추고, 아이가 자기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면 있는 그대로 들어주고 적절히 대응을 해줬다. 그래야 아이가 나의 진심을 알아줄 것 같아서이다. 엄마는 자기를 억압하고 스트레스 주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장래에 대해 관심이 있고 자기와 함께 미래에 대해 고민해 주는 친절한 어른이라고 믿게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아이와 신뢰하는 관계를 굳게 지키면서 한 편으로는 바람직한 행동에 대한 적절한 선을 명확하게 긋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내 마음의 불안, 초조, 걱정스러움, 두려움 등을 잘 알아차리고 조절해야 한다.
아이들은 항상 내가 바라는 속도만큼 빨리 철이 들지는 않는 것 같다. (내 바라는 마음이 문제인 걸까?) 그래도 편안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내가 바라는 바를 조심스럽게 표현하면 조금씩은 자기 할 일을 스스로 찾아서 하기도 한다. 작은 아이는 방학 동안 매일 1~2장씩 풀어야 하는 연산 문제집이 방학 숙제였는데 내내 미루다가 마지막에 온갖 짜증을 다 부리면서 며칠 동안 고생을 했다. 결국에는 막판에 내가 한 두 페이지 도와주기도 하고 같이 풀어주기도 하고 그랬는데도 결국은 끝까지 못했다. 아이가 마지막에 ‘방학 시작했을 때부터 매일 한 장씩만 풀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라고 말했을 때 속으로 웃었다. 역시 내가 참고 아이 편이 돼서 숙제를 도와주며 기다리니 결국은 아이가 스스로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을 하기는 한다. 이런 깨달음이 진짜 바람직한 행동으로 잘 이어졌으면 좋겠다.
인생은 한 번의 깨달음으로 바로 바로잡아지지는 않는 것 같다. 몇 번 더 미루고 고생하고 짜증 내는 시행착오를 반복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그렇게 자기 경험으로 통해 스스로 얻어내는 교훈이 가장 값질 것이라 믿는다. 내가 잔소리해서 가르쳐줘 봐야 나와 아이의 관계만 나빠지고 아이가 스스로 깨닫는 시간만 늦어질 뿐이다.
큰 아이도 컴퓨터 게임을 한참 하다가 한 번씩 이유도 없이 짜증을 내고 우울해하고 그런다. 슬쩍 가서 이유를 물어보면 공부를 하긴 해야겠는데 하나도 모르겠고, 하기도 싫고, 자기는 잘하는 것도 없고, 좋아하는 것도 없다며 온갖 답답한 소리만 늘어놓는다. 내가 되도록 흔들리지 않고 편하게 아이 기분을 공감해 주고 들어주다 보면 혼자 투덜댔다 짜증 냈다 결국은 공부도 안 하고 그냥 잠들어 버린다. 어른인 내 눈으로 봤을 때는 참 부질없는 감정낭비고 시간낭비다. 아이가 허송세월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불안하고 초조해진다.
하지만 이런 여러 복잡한 기분과 결국 바람직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은 실패한 경험들도 그 나이 때 느껴야 하는 당연한 감정이고 경험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아이가 짜증 내고 기분이 안 좋으면 엄마인 나도 기분이 좋지 않은 게 사실이지만 자아정체성을 찾아가는 사춘기 시절에 마냥 놀기만 하면 한 편으로는 마음이 영 개운치 않다는 사실을 아이가 잘 느껴봤으면 좋겠다. 그리고 결국 결과는 폭망이라는 사실을 아이가 경험해 봤으니 반가운 일이다. 그런 일상의 반복 끝에 내가 바라는 바람직한 결론을 내면 좋겠지만 아직은 요원해 보인다. 그래도 기다려 줘야지. 누구든 자라려면 시간이 필요한 법이니까 말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로 시작되는 성경구절을 알고 있다. 교회에 다니지는 않지만 많이 들어봤고 익숙하고 공감이 되는 표현이다. 그 구절을 실제 내 삶에 녹여내는 건 말도 못 하게 힘든 일이다. 그래도 다른 길이 없으니까 오늘도 기도하며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의심하며 하루를 보낸다. 아이들이 이런 나의 기다림 속에서 자기 모습을 잘 찾아가기를 바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