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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성 리더 Aug 07. 2023

수저계급론 따위는 나에게 중요치 않다.

나를 믿는 순간 꿈은 현실이 된다 2화

나의 어린 마음은 나의 가난함이 슬펐던걸까?


코흘리기 유치원 시절부터 부터 초등학교 저학년때 까지 기억하는 내 어릴적 살던 집은 서울 변두리 (현재 서울시 강동구 고덕동) 에 위치한 자그마한 주택이였다. 주인집으로 들어가는 문과 주인집옆 세입자들이 들어가는 작은 철문이 따로 있는 집이였다. 


주인집에는 내 또래의 아이가 살고 있었다. 그 문을 통과 해서 집에 들어가는 주인집 아들이 한없이 커보이고 부러웠었다. 어린 나이 였지만 물론 신분 계층은 없지만 나는 천민이고, 그 친구는 양반으로 느껴졌었다. 내 자신이 한없이 작은 느낌이였다. 세입자들 전용의 작은 철문을 통과하면 지하에 복도식으로 3개의 집중에 두번째 가운데 집이 우리집 이였다. 


복도식으로 3개의 집이 있다보니 작은철 문은 항상 열려 있었다. 못사는 집에 도둑이 들어올 일은 없겠지만, 그 누가 왔다갔다 해도 그만큼 방범에 취약했던 그런 집이였다. 연탄을 피워 난방을 하는 집이였다. 문옆에는 항상 검정 연탄이 쌓여져 있었고 말이다. 

신발장은 현관문 밖에 놓여 있어 그 누가 신발을 집어가도 모를 정도였다. 현관문은 안에 사람의 움직임이 보이는 불투명유리와 가벼운 철문이였다. 문을 열고 닫음에 있어 삐그덕 거리는 소리는 항상 귀에 거슬렸었다. 지금 같으면 기름칠이라도 했을텐데...그런데 왜 그 소리가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는지 모르겠다. 

현관문을 열면 벽돌3-4장 깊이의 지하로 장판이 깔린 거실겸 작은 주방이 있었다. 식탁하나 놓을 자리 없는 그런 집이였다. 구석에 원형 접이식 상은 공부할때는 책상이 되고, 식사를 할때는 식탁이 되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현관문 밖에 놓인 신발이 잠길까봐 헐레벌떡 치우기 일수였다. 자그마한 방 두개가 있는 그 집에서는 친할머니와 부모님, 두살 터울의 누나 총 다섯식구가 한방에서 지냈었다. 


엄마는 미싱을 다루는 기술을 가지고 계셨다. 두 개의 방중 하나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엄마의 미싱과 오바로크가 놓여있는 작업장으로 쓰였다. 엄마는 수선일 등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고 각종 천과 실로 가득한 그 방에는 먼지가 가득하였다. 엄마를 도와주는 일이 있지 않는 한, 그 방의 문을 열면 "방문 꼭 닫고 먼지 날린다고 얼씬도 하지 말라"고 하셨던 기억이 난다. 지금 두 아이의 아빠인 내가 아파트 생활을 하면서 아래집에 피해를 주니 입에 달고 사는 "뛰지 마!"라고 소리치는 모습이랄까? 

그 작업장으로 쓰였던 방의 문은 항상 굳게 닫혀 있었다. 방의 창문은 어릴적 내 키보다 높은 곳에 있어 비가 오는 날이면 빗줄기가 창밖 바닦에 떨어져 빗방울이 튀는 모습이 아련하게 기억나는 집이였다. 


유년 시절에 나는 항상 집앞 골목에서 구슬치기, 비석놀이, 땅따먹기, 작은 놀이터에서 땅을 파고 다시 덮고 온갖 곤충들을 장난감 삼아 놀던 기억, 집에서 가까운 뒷산에 올라가 '홍콩할매귀신이 나타났다고 물리치러 가자'고 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가난했지만 친구들과 어울리기 좋아하고 활발한 성격의 천진난만한 아이였다. 해가 질 때까지 놀다보면 친구들 어머님들은 "oo아 밥먹어" 라고 부르면, 같이 놀던 친구들이 한명씩 다음날을 기약하며 집으로 각각 향하는 그런 풍경의 그 모습이 아련하게 그려진다.


앞에서 언급한 주인집 아들보다 내가 더 부러워 하는 친구가 있었다. 당시, 동네 입구에 짜장면집이 하나 있었는데, 그 동네 하나뿐인 짜장면집 아들이 바로 그 친구였다. 그 친구와 나는 유치원 같은반 친구였고, 이어서 초등학교 1학년때도 같은 반이 되어 자연스럽게 서로 가깝게 지냈다. 

그 친구가 같은반 친구라는 자체는 그 당시 나의 자랑이고 행복이였다. 그 친구와 놀다 보면 짜장면집에 가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집은 짜장면 하나 여유롭게 사줄수 없는 가정 형편이였다. 하지만 나는 그 친구 덕분에 짜장면이나 탕수육 등 다양한 중국요리를 얻어 먹을 수 있었다. 어린 마음에 그 친구는 나에게 자랑거리였고, 그 친구와 친하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다른 친구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였다.


우리 아버지는 택시기사였다. 아버지껜 택시운행 시 가지고 다니시는 500원, 100원, 50원을 따로 꽂아 놓는 동전지갑이 있었다. 그 지갑은 항상 퇴근 후에는 장롱 속에 보관하고 있었다. 

용돈이 부족한 나는 아버지가 잠이 드셨을때, 장록 속에 있던 아버지의 동전 지갑을 들키지 않게 항상 긴장하면서 숨을 멎어가며 조심스레 소리 없이 500원짜리 하나, 둘씩 빼어낸 후 그 돈으로 다음날 친구들과 신나게 오락실에서 오락을 즐기던 기억이 새롯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분명히 아버지도 아셨을 것이다. 아시면서도 눈감아 주셨던것 같다. 




어린 나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나의 가난이 너무나도 싫고 창피했다.


부모님의 평생을 가난과 싸우는 삶을 보고, 그 가난한 삶을 함께 견뎌내며 자란 나는, 그 어린 나이일 때부터 그 가난을 끊고 싶었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돈이 되는 일을 생각하고 실천해야 했고, 돈 많이 버는 직업을 찾고자 했다. 

나는 뭐가 되고 싶을까? 무엇을 해야 돈을 많이 벌까? 하는 생각을 하던 중에 찾은 내 꿈은 파일럿이였다. 다른 직업에 비해 돈도 많이 벌고, 하늘은 난다는 자체가 너무 멋있어 보였다. 제복의 멋스러움도 한 몫했다. 유년시절 공부도 안하는 놈이 한번은 서점에 가서 '파일럿이 되자' 라는 제목의 책을 구매 한 기억이 있다. 그 책을 읽고 '파일럿이 되려면 열심히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행동으로 옯겼어야 했는데, 막연히 마음속으로 동경만 하고 지냈었다. 

그러다가 파일럿이 되기 위해서 실제 행동으로 옮긴 건 경찰 재직시절이었다. 근무를 하면서 항공이론교육을 받기 시작했는데, 그때의 설레임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경찰시험에 합격하고 '나도 하면 되겠구나' 라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경찰 시험과목중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한 과정이 파일럿이 되기 위한 준비에 다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경찰 재직시절 2년 동안 영국 어학연수를 갔다온 것도 어릴적 단순히 마음속에 갖기만 했던 꿈과 가까이 갈 수 계기가 된 것이다. 이론 수업은 미국에서 온라인과 주 1회 서울 이대 근처 스터디카페에서 이루어졌다. 파일럿이 간절히 되고자 같은 꿈을 꾸는 총 10명 모여 스터디 모임을 시작했다. 모임에 참여한 이들의 직업은 학교 선생님, 관제사, 항공대학교 학생, 헬리콥터 조종사 등 다양했다. 결론적으로, 우리 스터디모임의 10명의 준비생 중 1명을 제외한 9명이 파일럿 시험을 준비에 하여 현재 국내 항공사에 취직하여 부기장, 기장으로 근무를 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1명은 바로 '나' 였다. 나는 돈 때문에 합격할 수 없었다. 이론 수업을 마치고 미국에 가서 항공실습을 거쳐야 되는 과정이였다. 그 당시 계산된 필요 금액은 현금 1억 5천만원 정도 였다. 모든지 돈이 문제였다. '돈이 없으면 꿈도 꾸면 안되는 거였나' 싶을 정도로 답답했다. 

경찰 재직 시절이였기에 대출을 받아서라도 시도를 하려했으나, 당장 미국에 가는 비행기 값부터 계산해 보니 대출을 받아도 돈은 턱없이 부족했다. 일정 금액만 들고 일단 미국으로 가서, 나머지 부족한 금액은 현지에서 파트타임 일을 하여서라도 돈을 마련해야겠다고 마음도 먹었었다. 

세상 물정 모르던 경찰관이였던 나는 막연히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돈이 많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급한 마음에 염치없게도 내 주변에 장사를 하는 친구들한테 찾아가서 돈을 꿔 달라고도 했다. "나에게 파일럿이라는 꿈이 있는데 월급이 작지가 않으니, 합격하면 내 월급을 너에게 전부 줄께", "내 미래에 투자 좀 해주지 않을래" 라고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친구들도 내가 참 어처구니가 없겠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너무나 간절했었다. 나쁜데 돈을 쓰는 것도 아니고, 그 돈만 있으면 내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돈이 없어서 파일럿의 꿈을 포기했지만, 부자의 꿈은 현재진행형이다.


이를 꽉 깨물고 해결책을 한달 간 고민을 하다가 결국에는 내 길이 아니라는 판단에 파일럿이 되기 위한 마지막 미국행은 포기를 하기로 결심했다. 파일럿이 되기위해 필요한 거액의 돈은 내가 도둑질을 하지 않는 이상 생겨 날 수 없었다. 부모님을 설득하는 것 또한 일이였다. 돈이 있더라도 앞으로 많은 공부가 필요로 했고 그동안에 또 돈이 필요했고, 경찰시험 필기시험 합격 후 신체검사의 시력의 기준이 있어 라섹 수술을 한 것이 결격 사유가 되었다. 돈도, 나의 신체적인 부분도 내가 파일럿이 되는데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내 나이 31살로 적지 않은 나이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10여 년이 지난 지금, 그 당시 같이 준비했던 친구들중 현직 A항공사 부기장으로 근무 하고 있는 동생과 가끔 만나면서 요즘 사는 얘기를 많이 한다. 내가 간절히 원했던 꿈을 이룬 그 친구는 지금은 반대로 나를 부러워 하고 있다. "형은 돈 많이 벌잖아!"라고 나를 부러워하는 그 친구의 말처럼, 현재 상황을 보면 내가 그 친구보다 돈을 많이 벌고 있는 건 사실이다. 

파일럿 준비를 못했던 그때는 너무 세상이 싫었다. 합격한 친구들이 그 어떠한 유명인사들 보다도 높아 보이고 부러움의 대상이였는데 말이다. 돈이라는 것이 평가가 되는 어른의 삶에서는 내 꿈이었던 직업을 가진 이들이 반대로 나를 부러워 하고 있는게 현실인 것이다.


나는 돈의 액수과 행복의 지수는 비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 100억을 기준으로 했을때, 1억이 있다고 1프로 행복하고, 100억이 있다고 100프로 행복하다고 볼 수 없으니 말이다. 

다만, 돈이 없으면 없는 만큼 불행해 지는 돈의 부족함의 액수와 불행은 비례한다고 생각한다. 누가 언제부터 언급하고 만들어 놓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인터넷 커뮤니티, SNS, 언론, 예능 등에서 금수저, 흙수저로 언급되어온 수저계급론은, 현재에 이르러 플라티늄, 다이아몬드, 금,은, 동, 놋, 플라스틱, 흙 등 더욱더 세분화되어 계급을 통해 출신과 현재의 부의 상태를 논하는데 활용되고 있다. 

그 기준에 따라서 보면 나는 과거에 흙수저 내지는 플라스틱 수저로 태어난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 그런 수저계급론 따위는 나에게 중요치 않다.


어릴적 나에게 슬픔이었던 그 가난한 시절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살고 있는 이런 열정과 도전은 없었을 거라 자부하고 있다. 그 경험이 나에게는 너무 소중한 지금의 나를 만들고 있는 나만의 무기라고 여긴다. 그렇기에 나는 지금도 그 무기를 이용하여 나를 믿고 내 계급과 신분을 상승시키려 노력을 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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