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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해빈 Sep 28. 2023

죽음이 부정되고 고통이 멸절된 세계들

영화 <바쿠라우>, <킬링>, <코끼리는 그 곳에 있어>를 중심으로

죽음이라는 서두

탄생 그리고 살아가는 과정만큼 죽음은 존재에 관한 인상을 심어주는 결정적인 대목이다. 죽음은 존재의 최후이면서 산 자(상실한 자)들의 기억을 공회전하는 최초의 분기점, 다시 말해 아이온의 시간을 끊임없이 배양하는 중심부다. 숱한 전설, 신화, 예술, 우주에서 죽음은 죽음 자체로 완전한 자력을 갖추지 못했다. 자아가 맞이할 미래의 궤도에 안착해있으나 미지의 상상만으로 근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사는 동안 의식의 영역에서 결코 도달할 수 없고 오직 타아의 경험으로 대체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 자신의 죽음이다. 그 빈 자리에는 죽은 자를 회고하는 상실한 자들의 기억이 있다.      


<정말 먼 곳>(박근영, 2021)은 사라져 가는 것을 응시하며 상실감의 자리를 마련한다. 영화는 죽은 명순(최금순)의 육체를 육안으로 비추기 대신 그의 영정을 등장시킨다. 인물들이 관망실에서 고인을 바라보는 동안 명순 역시 영정이 되어 산 자들의 틈에 섞인다. 죽은 자와 산 자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정면으로 맞닿은 스크린 속 배우와 관객의 얼굴은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무너트린다. 죽음은 사라짐이라는 상태에서 영원한 기억으로 환원되어 살아갈 날들 앞을 비춘다. 거기에는 사회적으로 배제되고 억압된 진우(강길우)와 현민(홍경)의 온전한 삶의 지속과 복원이라는 염원도 담겨 있다. <아네트>(레오 카락스, 2021)에서 오페라 가수인 안(마리옹 꼬띠아르)은 비극 속 주인공이 되어 죽음 연기를 통해 관객을 구원한다. 죽(는 연)기를 반복해도 끝없이 되살아나 타아의 위태로운 영혼을 잠재우던 안은 그녀의 심연을 욕망한 헨리(아담 드라이버)에 의해 살해된다. 마리옹 꼬띠아르가 또 한 번의 죽음을 연기했을 때 관객은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아네트) 이거나 구원을 준다던 죽음조차 목격할 수 없게(헨리) 된다. 그러나 여전히 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죽지 않는 안의 영혼이다. 그녀는 헨리의 심연이 곤두박질치듯 그의 목하에서 죄책감과 절망이 빗어낸 환상의 포자로 지속된다. 영화가 막을 내린 뒤에도 죽은 ‘인형’ 아네트와 유령 안이 그가 사랑할 수 없는 형태로 영원히 죽어가는 ‘중’ 일 것이다. 그래서 <아네트>가 자신이 만든 유령을 어깨에 짊어진 남자의 이야기라면, <고스트 스토리>(데이빗 로워이, 2017)는 어깨 위에 안착한 유령의 남은 생을 그린다. 되돌아오지 않을 사랑과 시간을 기다리는 유령 C(케이시 애플랙)의 여생은 불멸하는 무형 무색의 고통을 어떻게 망각할 수 있을지 모를 데이빗 로워이의 죽음에 관한 은유다. 이렇게 죽음은 고통조차 털어놓을 수 없는 저주이거나 마법처럼 누군가의 일생을 통틀어 바꿔놓기도 하며, 삶의 고통과 대적할만한 유일한 은유로 끝이 보이지 않는 현재 진행형 사건인 셈이다.   


<죽여주는 여자>(이재용, 2016)의 엔딩에서 마주한 소영(윤여정)의 죽음은 여태껏 영화에서 본 것들과 적잖게 달랐다. 죽음에 가까워진 노인들의 고통을 살인으로 대신 덜어주던 소영은 진실을 말할 힘을 모두 잃었거나 더 이상 자신이 살아온 날 따위를 설명하는 것이 권태롭고 괴로운 것처럼 저항 없이 교도소로 입소한다. 시대의 격동을 맞아 쓸쓸하고 고된 인생을 살아온 소영의 지난날들을 러닝타임이 모두 수용하지 못하는 대신, 영화는 그녀의 죽음을 보여준다. 소영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긴 건 기억이나 슬픔, 애도의 마음이 아닌 요란했던 지난날이 모두 소멸된 무연고자로서의 죽음, 정확히는 죽은 몸이다. 그녀의 죽음은 요란하지도 서글프지도 잔혹하지도 않다. 그것은 그녀가 언젠가 마주해야 할 숙원처럼 고요하고 정확한 몸-언어로 가시화된다. 유골함 위의 언어들(이름, 생년월일)은 누구도 알지 못했던 진짜 소영의 삶이 이곳에 명백히 존재했다는 묘비명으로 들어맞는다. 즉 <죽여주는 여자>는 누군가의 죽음을 응시하는 것이 가혹하거나 섬뜩한 사건이 아니라 한 인간을 이 세상에 온전히 존재하게 만드는 방법일 수 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 세계에는 기억을 매개로 환원되지 않고 애도할 자마저 잃은 완전무결한 죽음의 형상도 있다. 이제 환희와 여운, 고통조차 제거한 채 인간이 일생을 바치며 걸어온 종말적 세계로서의 죽음을 이야기할 차례다.


죽음의 불가능한 교환

: 클레버 멘돈사 필로의 <바쿠라우>의 경우

<바쿠라우>에도 끝나지 않는 아니, 끝을 모르는 죽음이 있다. 물길이 모두 막혀 트럭으로 운반하는 급수가 진정한 의미에서 생명수인 바쿠라우. 어느 날 급수 차량에 의문의 총탄 자국이 발견되는 것을 시작으로 마을 사람들이 서서히 살해된다. 거기다 ‘바쿠라우’는 인터넷 지도에서 흔적이 지워진 지 오래. 이 모든 이유 모를 죽음은 자신의 재선에 방해되는 요소를 제거하려던 시장이 설계한 몰살 작전이었다. 시장이 고용한 용병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학살된 마을 사람들은 감각 억제제를 복용한 뒤 복수에 나선다. 거칠게 나열해 보았지만 <바쿠라우>에서 그 외에, 죽음들이 얼마나 잔혹하고 고통스러운지를 낱낱이 묘사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바쿠라우>의 죽음은 잔혹성의 무게를 따지거나, 승자를 가리는 수단이 아니라 무엇으로도 비유가 불가한 절대적인 진실임을 발화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 죽음은 원인불명의 살인에서 원인이 불필요한 살인의 문제로 변주된다. 전자의 죽음은 원인을 사설하는 것이 주요 과제라면, 후자의 죽음은 이유를 제거해야만 합당하게 맞아떨어지는 현상이 된다. 영화는 바쿠라우 사람들이 마을의 지주이자 원로인 카르멜리타의 죽음을 기리는 추도식으로 시작된다. 도밍가스(소냐 브라가)는 오랜 친구 카르멜리타를 향해 폭언을 퍼부으며 슬픔과 고통을 감당한다. 카르멜리타의 생애를 짧게 복기하던 그의 아들은 죽음이란 기억으로 환원되는 “살아있는 증거”라고 연설한다. 구덩이 속에 위치한 카르멜리타의 관을 응시하던 테레사는 직전에 보았던 이름 모를 이의 주검을 함께 떠올린다. 이 장례식 시퀀스는 애도를 표하는 공동체의 여러 방법이면서, 어느 죽음으로부터 시작되는 피의 복수에 관한 복선이고 영화 말미 등장하는 잘린 머리들(용병들)을 향한 애도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는 확언이기도 하다. 마을 사람들에게 죽음은 필수 불가결한 사건이며 무엇으로도 교환 불가능한 것 즉, 죽음과 교환 가능한 것은 그에 대응하거나 능가하는 오직 죽음뿐이다. 이들이 나란히 진열된 용병들의 잘린 머리 앞에 카메라를 들이밀어 학살의 결과를 기록하고, 살인이 벌어졌던 ‘바쿠라우 역사박물관’ 벽면의 선명한 핏자국을 역사로 보존하는 것. 여기서 죽음이 “살아있는 증거”라는 말에는 죄책감과 두려움, 충격과 혼돈이 모조리 제거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이때의 살인은 절대로 외면하거나 왜곡될 수 없고 헛된 망상도, 재연도 될 수 없다는 의미가 중첩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검 없는 죽음과 자학적 생존의 절합(節合)

: 츠카모토 신야의 <킬링>의 경우

<킬링>에선 죽음 자체가 존재의 자격이거나 정체성의 문제다. 사무라이에게 있어서 칼의 단련은 마땅히 인간을 베는 것이다. 그러나 사무라이 모쿠노신(이케마츠 소스케)은 칼이 칼이라는 사실을 부정한다. 초반부에 벌어지는 사와무라(츠카모토 신야)와 어느 무사의 대결은 제련된 칼날이 각자의 옆구리에서 뽑히는 것으로 시작되어, 상대의 신체를 베는 것으로 종결된다. 영화는 이 대결을 숨죽여 관망하는 유(아오이 유우)와 이치스케(마에다 류세이), 그리고 모쿠노신의 제시적 블로킹을 통해 사무라이 칼의 시작과 종결을 응시한다. 어느 무사의 갈라진 손의 상처는 사무라이 칼의 쓸모를 증명하듯 선명하게 제시된다. 한편 모쿠노신과 이치스케의 대결은 사와무라의 제시적 블로킹을 경유해 목격된다. 모쿠노신의 나무칼은 이치스케를 여러 번 베지만, 실재의 절단을 불러오지 않고 칼의 힘으로 대결을 종결하지도 못한다. 카메라의 렌즈와 맞닿은 사와무라의 흥취가 꺼져가는 눈은 절단 없는 칼의 대결이 사무라이의 대결일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사실은 영화에서 빈번히 죽이기를 유보하는 모쿠노신의 행위로 이어진다.  


<킬링>에는 모쿠노신이 베지 않는 신체 대신, 손과 칼이 절합(節合)된 형상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하나는 칼을 쥔 채로 경직된 신체의 잘림이고, 다른 하나는 칼을 쥔 손이 프레임에 의해 잘려 나간 미완의 상이다. 손과 칼의 절합이 도달해야 할 지점은 잘려서 결합된 두 개체가 본능적으로 회귀하는 ‘죽어가는’ 몸체에 있다. 부랑자 패거리가 머물다 간 동굴에서 사와무라가 모쿠노신의 칼을 강제로 뽑아 실력을 증명하라고 다그치는 대목을 떠올려보자. 모쿠노신은 칼을 잡기를 거부하지만, 대결은 폭주하듯 벌어지고 만다. 지연되거나 보류되는 건 죽음뿐이다. 사와무라는 모쿠노신을 대신해 패거리를 베기 시작한다. 패거리의 우두머리 세자에몬(나카무라 타츠야)의 손이 나무에 꽂힌 칼을 쥔 채로, 사와무라의 칼에 의해 무자비하게 절단된다. 세자에몬의 칼과 그의 잘린 손의 절합은 나무에 매달린 손의 추락을 지연시키고, 이것이 몸체의 문제로 이동했을 때 세자에몬의 죽음은 지연된다. 그는 사와무라의 말처럼 “피가 다 빠질 때까지의 시간 동안 죽지 못한다”. 즉 <킬링>의 칼이 주는 두려움은 단번의 죽음을 지연시킨다는 것이다. 확인 사살되지 않은 죽음은 그 앞의 행위자(사와무라)가 아니라, 몸체-주체(세자에몬)에게로 죽음의 감각을 회귀시킨다. 사와무라의 살인은 최후의 목격자이기를 부정하기에 무정하고 괴물적(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는, 그러나 둘 중 무엇도 아니므로)이다.  


죽음의 지연은 무릇 사와무라도 예외는 아니다. 패거리와의 대결에서 자상을 입은 사와무라는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것을, 달리 말해 죽음을 지연시키고 있다. 그것이 지혈되느냐 죽음이 되느냐의 문제는 전술했던 프레임에 의해 잘린 손, 즉 칼을 잡은 모쿠노신의 손의 형상에 달려 있다. 오프닝에서 쇳덩어리가 사무라이 칼의 형태를 갖춰가는 과정 끝에, 칼을 쥔 손의 클로즈업 샷이 삽입된다. 카메라는 오직 칼을 붙잡은 혹은 칼에 붙잡힌 손의 격양을 포착할 뿐 프레임 바깥의 실체를 관객에게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칼을 잡은 모쿠노신의 손이지만 아직 우리는 칼날이 향한 곳과 칼을 쥔 손의 얼굴, 그리고 돌출된 이 샷의 목적을 알 수 없다. <킬링>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모쿠노신의 절합 샷은 그가 에도로 향하려는 이치스케의 무모한 선택을 유보하기를 권한 다음 다시 등장한다. 그러나 손은 여전히 그 무엇도 하지 못하고 돌연적이며, 감정에 과열된 채로, 프레임에 의해 잘려 몸체가 감춰져 있다. 해당 샷의 두 번의 출현은 모쿠노신이 사무라이 칼의 본성과 손의 태도를 부정함을 상징하면서, 보기를 욕망하는 관객의 눈이 지닌 본성을 부정한다. 강제로 절단된 욕망의 부정은, 손과 칼의 회귀점인 모쿠노신의 몸체가 거부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본성에 관한 의심을 배양시킨다.


그리고 세 번째로 모쿠노신의 절합 샷이 등장했을 때, 카메라는 칼을 든 손에서 이동해 그의 몸체를 보여준다. 그러면 분명하게도 모쿠노신이 쇠로 단련한 ‘진짜’ 칼을 뽑아 겨누고 있다. 그런데 모쿠노신의 겨눔세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부랑자 패거리와 눈을 마주치지 말라는 마을 어른의 당부를 거스른 날의 밤, 그의 사무라이 칼은 낮의 소란과 공포가 잠적한 밤에 도달하자 암흑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이때 그의 ‘진짜’ 칼은 아무것도 베지 않거나 공중을 가를 뿐이다. 검술의 갈무리에는 모쿠노신의 눈과 칼날이 오랫동안 부딪힌다. 최후의 순간 모쿠노신이 다시 ‘진짜’ 칼을 겨누었을 때 칼날을 향한 응시는 되려 불발된다. 모쿠노신의 눈은 자신이 베어야 할 곳을 응시할 새 없이 사와무라의 몸통을 가른다. 그것은 카메라라는 눈마저 배제한다. 대신 칼을 든 손 또는 손을 든 칼을 응시하자 모쿠노신이라는 실체가 카메라의 눈에 들어맞는다. ‘손이 눈보다 빠르다’라는 비유는 무언가를 베는 주체는 칼날 그 자체가 아니라 칼을 잡은 모쿠노신이라는 진실을 폭로한다.


여기서 절합 샷의 정체보다 중요한 것은 모쿠노신의 손이 베는 행위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욕망했다는 사실이다. 손의 태도는 칼이라는 무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프레임 바깥에 감춰온 모쿠노신의 무의식적인 욕망에서 기인한 것이다. 정말 두려운 것은 자신이 죽지 않기 위해 상대를 베고 마는 생존 본능이다. 베는 성질을 가진 사무라이 칼의 본능이 그저 칼의 단련으로 그치지 않고, 모쿠노신의 생존에 대한 단련으로 이어지고 말았을 때 인간의 본능에 관한 혐오와 수치심이 인다. “사람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벨 수 있는가?”라는 모쿠노신의 물음은 기어코 자조적인 답변으로 변주된다. 따라서 가장 절망적인 것은 베지 못하거나 베는 본성이 대극에 위치하지 못하고 하나의 본능으로 점철되는 것에 있다. 사와무라의 칼이 누구도 위협하지 않는 모쿠노신을 좇는 이유는 “진심인 그 녀석을 이겨서 내 자신이 쓸모 있는 존재임을 확인”하려는 실존에 대한 본능 때문이다. 실존의 미확인, 그것은 신체의 절단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자아의 파괴다.    


<킬링>은 복수와 보복의 종말적 굴레라는 외피가 생존 본능의 가혹함을 감싸고 있는 영화다. 유는 마을을 떠나려는 모쿠노신에게 “죽어요?”라고 여러 번 묻고, 그는 매번 “안 죽어요”라고 답한다. 그것은 ‘아니다’라는 부정의 형태일 때 유를 안심시킨다. 그러나 영화에서 ‘안 죽는’ 상태가 확정되자 역설적으로 절망이 피어오른다. 사와무라를 벤 후 피투성이가 된 모쿠노신이 숲 속으로 아득해진다. 카메라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집요하게 응시하고 선명한 모쿠노신의 모습은 자신이 벤 사와무라의 주검을 대신한다. ‘눈보다 빠른’ 모쿠노신의 베기를 목격해야 할 눈은 유의 경악스러운 얼굴에 있다. 일그러진 얼굴은 마치 그의 ‘사라짐’을 눈으로 확인하라는 신호같이 느껴진다. 유가,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자신을 잃은’ 혹은 ‘(봉인해온) 자신이 된’ 어느 사무라이의 주검 없는 상태의 죽음이다. 이 순간 가장 비극적인 절합이 나온다. 프레임을 뒤덮는 유의 비명과 모쿠노신의 응시(시점샷)의 절합. 이 기이한 형상이 회귀할 곳은 죽음이 부정된 유와 모쿠노신의 ‘살아있음’이라 불리는 지연된 죽음이다.



보이지 않는 죽음과 죽어버리라는 메아리

: 후 보의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의 경우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에서 죽음은 전조증상 없이 갑작스럽게 벌어지고 관객이 목격했을 때 사건은 종결된 다음이며, 죽은 몸 없이 죽음의 여운만 남아있다. 이러한 여운은 롱테이크를 전면화한 영화 전반의 느릿하고 긴 호흡으로 그 무게가 가중되는데,  그러한 기진함 속에서 유독 생생한 감각은 어떤 죽음에서 기인한다. 산 자들은 일방적으로 죽음을 목격하고선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일로 확정되고 나면 죽음을 모르려는 것처럼 권태롭게 군다. 이런 방식의 죽음이 다른 죽음과 공명하거나 냉혹히 경계를 치면서 순차적으로 벌어진다. 인물들은 회상할 만한 과거도, 미래도 없이 더 이상 절망할 기력조차 잃은 채 ‘죽어버리라’는 말로 걸음을 지탱하고 있을 뿐이다.      


위청(장 위)이 친구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 날, 현장을 급습한 친구가 고층 아파트에서 투신한다. 카메라는 추락하는 친구 대신 위청이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 행위를 담아낸다. 관객은 이미 주검이 된 친구의 상태를 확인하려는 위청의 어깨너머로 죽음을 짐작한다. 이후 위청은 투신한 친구의 아내와 그 죽음을 서로의 책임이라고 탓한다. 급기야 그는 친구의 자살이 마땅하다는 듯 “죽어야지”하고 망언하고, 남자의 아내는 원망 조로 차라리 위청이 죽었어야 한다고 저주한다. 이들은 책임을 회피하며 자신이 지닌 죄책감과 두려움을 움켜쥐는 것 말고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심지어 위청은 과거의 여자를 찾아가 친구의 투신자살이 자신을 만나주지 않은 그녀 탓이라고 말한다. 불륜이 불발된 사랑에 관한 결핍 때문이라고 막무가내로 덧붙일 수 있겠지만 중요하지 않다. 그는 엉망으로 굴면서 강박적으로 친구의 투신 현장에서 보았던 부동자세의 자기 자신의 모습을 망각하려고 애쓰는 중이다. 그러나 영화는 위청에게 반성의 기미나 변화의 분기점 대신, 인정하지 않으려는 위선적 자아와 묵인된 진실을 증오하는 자아 사이의 혼란을 외면할 수 있는 또 다른 구실을 마련한다. 그것은 애정 없는 동생 위솨이를 중태에 빠트린 가해자를 응징하는 일이다. 후미에 드러나지만 위솨이의 폭력적 성향에는 그가 이끄는 조폭 패거리가 연루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위청이 그 역시 위솨이의 중태에 공모했다는 사실이 느슨하게 연결된다.      


웨이부(팽욱창)는 동급생 위솨이의 폭력에 시달리는 리카이를 도우려다 사고로 살인자가 될 처지다.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해 돈을 구하던 그의 앞에 할머니의 죽음이 갑작스럽게 틈입한다. 이때도 영화는 어둠과 벽면을 장애물로 죽었다는 정보를 지연시킨다. 갑작스러운 죽음을 직면한 웨이부와 마찬가지로 관객 역시 이미지 없이 배우의 대사를 통해 일방적으로 죽음을 통보받는다. 여기서 할머니의 죽음은 부모의 폭력과 방관에 방치된 웨이부의 마지막 조력자까지 제거되었다는 절망을 가중하고선 금세 잊혀진다. 이는 웨이부는 애도할 새 없이 위청 패거리의 추적과 도저에 깔린 소문으로부터 도망치는 처지를 가리킨다. 그러나 끝내 그는 자신이 희망도 절망도 없는 사멸의 한가운데 위치해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리카이가 위솨이에 관한 사건의 전말(누명이 아니라 정말로 잘못을 저질렀음)을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이 고백으로 웨이부는 자신이 몰랐던 진실의 크기만큼 ‘상관없는 일’에 휘말려서 살인이 아니라 사고라는 결백을 주장하는 데 어떠한 정당성도 확보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보다 괴로운 건 폐허가 된 세계에서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결심한, 빈약한 희망에 건 그 결심이 만들어낸 파국적 미래다. 그것을 견디지 못해 웨이부는 저보다 약하고 죽음에 가까워 보이는 이들(양로원의 노인들)에게 괜한 분풀이를 하며 죽여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러나 잠시 후 그 말은 웨이부 자신에 대한 저주로 되돌아온다. 웨이부가 공터를 바라보며 죽어버리라는 불행을 목이 터져라 외치는 동안 그걸 들을 사람은 웨이부 자신밖에 없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죽음을 담았던 것처럼 인물(웨이부)의 뒤에 서서 렌즈 반대편으로 던져지는 죽어버리라는 말을 관조한다. 다음은 그 광경의 실질적인 목격자(역시 웨이부)가 고통을 자의로 털어버렸다고 착각하는 무기력한 얼굴을 보여준다. 죽어버리라는 말은 죽음이 벌어진 순간부터 혹은 죽음이 적절한 구실이 되어 도망치기 위해 분투하는 웨이부의 목적과 이질적이다. 그는 살인자가 되거나 패거리의 손아귀에 놓이거나 무엇이 되었든 간에 죽음의 기운에서 멀어지려 한다. 게다가 절규를 통해 억압된 고통이 분출되었다고 하기엔 문제적 사건은 그대로다. 심지어 하나의 불행이 다른 불행으로 묵인되는 고질적인 구조와 병패가 순환된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은 끝을 모르고 배양되고 이제 자기 자신조차 믿을 수 없게 된다.     


죽어버리라는 말이 자학적 의식의 투사라면 만저우리 코끼리 이야기는 유토피아로 위장된 불신과 무지의 세계다. 오프닝, 위청이 만저우리 코끼리 이야기를 꺼내는데, 다음의 대사는 유토피아로의 위장의 기저로 그의 대사를 직접 들어보길 바란다. “만저우리 동물원에 코끼리가 있는데 늘 한자리에 앉아 있대. 사람들이 찌르는 게 싫었거나 거기 앉아 있는 게 좋아서겠지. 사람들이 난간에 몰려들어 구경하고 먹을 것을 던져 줘도 꿈쩍도 안 한대.” 이 이야기는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에서 죽음과 죽어버리라는 말처럼 반복되고 재구성된다. 위청이 자살한 친구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웨이부가 아는 이야기로 전환되고, 말미에는 구체적인 정보나 수식어는 사라진 채로 ‘만저우리 코끼리’로 축약되고 재구성된다. 심지어 이야기는 전혀 다른 것으로 둔갑해 혼란을 유발하기도 한다. 황링(왕위원)이 거리에서 발견한 포스터에서 동물원의 코끼리는 만저우리 서커스 쇼의 가부좌하는 코끼리가 된다. 이야기 속 코끼리가 둘 중 무엇에 해당되는 것인지 모호해졌다. 앉은 자세는 능동적인 무기력에서 훈련된 재주로 변주된다. 그러나 인물들은 무엇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이리저리 옮기는 것도 모자라 ‘이곳(마을)’을 회피하기 위해 ‘그곳(만저우리)’이라는 불신과 무지를 향해 홀린 듯이 걷는다. 동물원과 서커스 중 하나가 사실이거나 모두 사실이라 할지라도 만저우리 코끼리는 그들의 현실과 미래를 뒤바꿀 존재가 되지 못한다. 코끼리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무력하게 체감하는 자들의 상상적 동물, 즉 오직 상상으로 망각되었을 뿐인 고통의 유예(猶豫)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만저우리 코끼리는 문제를 해결하거나 개선하는 구원적 존재가 아니라 절망조차 유예된 자들의 도피처다. 만저우리로 함께 가자는 웨이부를 비관하던 황링은 원조교제 사실이 폭로된 후 자기 사정만 운운해대는 어른들의 비겁함을 확인하고서 절망조차 외면하기 위해 동행을 결심한다. 왕진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기다리는 집으로 되돌아가는 대신 홀로 비굴함을 감수한 채 되려 집으로부터 멀어지기를 택한다. 웨이부는 만저우리행 차표를 사러 간 터미널에서 마을 곳곳에 포진된 조폭 패거리에게 붙잡혀 위청에게 넘겨진다. 위솨이가 죽고 웨이부가 살인자가 되는 소문은 기어코 현실이 된다. 위청이 웨이부를 단죄할 결심을 바꾼 데에는 만저우리 코끼리 이야기가 관여한다. 그러나 위청은 두 번째 자살의 목격자이자 방조자가 되고야 만다. 그가 웨이부를 처리하지 않기로 결심을 바꿨다는 사실이 리카리에게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이, 리카이는 총으로 위청을 협박하기 시작하고 웨이부는 친구의 폭주를 잠시 만류하다가 이내 포기하고선 터미널로 걸음을 옮긴다. 리카이가 기다렸다는 듯 총으로 제 머리를 겨누자 카메라는 눈을 감는 것조차 포기한 위청의 얼굴로 이동해 총성을 울린다. 그리고 웨이부는 다시 한번 죽음의 고통에서 유예된다.    


불행이 이토록 되풀이되는 이유는 왕진의 말을 통해 선명히 드러난다. 그는 차표를 구매하기 직전 웨이부와 황링에게 ‘이곳’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곳’에 남아있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자신의 비밀을 폭로해 불행을 받아들일 용기도, 낙관적 미래를 상상할 여력도 없다. 제 세상의 암흑을 밝힐 결단력도 없으면서 타인의 고통에까지 개입되어 무력한 처지만 실감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 인물들은 디스토피아를 증오하면서 유토피아를 상상하지도 않는다. 웨이부와 황링이 원숭이 우리에서 나눈 대화를 복기해보자. 황링이 웨이부의 계획을 들은 후 내뱉는 말은 그가 만저우리에서 할 수 있는 건 제기차기뿐이라는 비수다. 이때 그녀에게 자조하듯 동의하던 웨이부는 “다른 걸 하면 더 끔찍하다”라고 말한다. 이들의 분주한 걸음은 현실 도피 혹은 끔찍한 것을 감수하는 동형적인 두 세계 간의 싸움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웨이부와 황링이 만저우리로 가는 결심을 굳혔다고 했을 때 두 사람은 나락인 이쪽 세계에서 가망 없는 저쪽 세계를 향할 수밖에 없는 무력한 길목에서 절망을 돌려 막고 있는 것이다. 인물들은 자신이 몰랐거나 깨닫지 못하는 진실을 품고서 죽거나 죽어가는 존재들의 최후를 목격한다. 더욱이 고통이라 말할 법한 건 그 충격과 슬픔을 누리기도 전, 죽음에 가담했다는 의혹과 인정의 경계에서 발을 빼지도, 깊숙이 밀어 넣지도 못한 채 담가진 발을 바라보는 무력함일 것이다. 만저우리에 관한 욕망에는 선명한 죽음과 잿빛 미래로부터의 도피 심리가 깔려있다. 책임과 진실 회피하기, 슬픔과 절망으로부터 도피하기. 다시 왕진의 조언을 떠올려보자. 죽음을 둘러싼 고통을 외부 세계로 표출하고 폭로하는 것, 그런 절망을 외면하지 않고 스스로 생산했을 때 생의 약동이 움튼다. 그러나 영화는 왕진의 말을, 무엇도 믿을 수 없는 만저우리 코끼리에 관한 상상으로 외면해버린다. 그는 웨이부와 황링을 터미널에 남겨둔 채 미련 없이 돌아서는가 싶더니, 같이 가 보자는 웨이부의 손길 하나에 내심 간절했거나 막다른 길에 다다른 것처럼 단번에 마음을 되돌린다.      


영화는 무엇도 확신할 수 없는 길목에서 도무지 회피할 수 없는 광경을 보여준다. 경유지를 향하던 버스가 두 번째로 정차했을 때(분명한 건 만저우리가 아니다) 승객들의 머리 위로 코끼리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들은 하던 것을 멈추고 그 울음이 들려오는 곳을 따라 일제히 천공을 바라본다. 코끼리의 세 번의 울음은 마치 죽어버리라는 애절한 외침이자 제 머리를 겨눈 총성처럼 정확하고 절박하다. 그것이 주는 압도감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무력한 믿음마저 꺼져갈 때, 그런 불신이라도 잡아두려는 자신의 절박을 자각하는 것, 그리하여 자기 안의 무력을 스스로 인정한 자들이 도달할 수 있는 기이한 연대의 신호처럼 들린다. 후 보는 만저우리에 도달하기 전의 황무지에 서서 실체 없이 울음만 울리며 미지로의 걸음에 관한 상상을 지속하게 만든다. 그리고 드디어 죽어버리라는 메아리가 멎고 나면, 도무지 부정할 수 없는 영화의 마지막 죽음이 등장한다. 영화 속 인물들이 그러했듯, 보이지 않는 후 보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그것을 결코 알 수 없고, 죽음의 기운을 찾을 수 없는 얼굴을 마주한 채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듯, 일상 속으로 걸음을 밀어 넣게 된다.        

       


<바쿠라우>가 죽음에서 야기되는 모든 감각을 스스로 제거했다면 <킬링>의 경우 불가항력의 고통을 대체할 유일한 수단으로 죽음을 꺼내 들었으며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는 희망이 절멸된 상태에서 절망조차 유예된 세계를 그렸다. 그곳에서는 오직 죽어버리라는 자학의 말로 생의 기력이 지탱된다. 이 영화들에서 죽음을 이야기했지만 동시에 영원히 끝맺을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죽음들은 구체적인 하나의 사건을 넘어서 고유한 감각과 고통을 외면한 산 자들의 필수 불가결한 앞으로의 삶에 관한 비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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